4화
‹ ›진료소에 딸린 작은 방을 임시 연구실로 내어준 강하온의 배려 덕분에, 설이연은 그날부터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채집한 습지 식물들을 늘어놓고 분석에 매달렸는데, 책상 위에는 말린 잎맥과 뿌리 조각들이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왕도에서 가져온 손때 묻은 도감 몇 권이 펼쳐져 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이었지만, 벽면 가득 매달아 놓은 마른 약초 다발들이 은은한 풀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그 냄새는 왕도의 궁정 의국에서 맡았던 것과는 사뭇 달라서, 설이연은 이따금 손을 멈추고 코끝을 스치는 냄새에 잠시 눈을 감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낯선 땅에서 낯선 병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실감되었다.
허담은 처음 며칠간 팔짱을 낀 채 멀찍이서 지켜보기만 했지만, 설이연이 환자들의 혈액 반응을 살피고 증상의 진행 속도를 세심하게 기록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점차 그 태도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왕도에서 온 의녀가 무슨 대단한 걸 하겠나 했더니……"
허담이 처음 며칠 동안 다른 조수들에게 흘리듯 뱉었던 말이었는데, 그 말을 전해 들은 설이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시험관을 흔들며 넘겼지만, 속으로는 씁쓸함이 스치고 지나갔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소리를 듣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져야지……'
왕도를 떠나올 때부터 각오했던 일이었으나, 막상 눈앞에서 직접 겪으니 마음이 쉬이 다스려지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설이연은 더욱 손끝에 집중하며 눈앞의 자료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사흘째가 되던 날, 설이연이 습지에서 캐온 월식수련의 뿌리를 잘게 갈아 시약을 섞어보던 중이었다.
"이 반응은…… 신경 전달을 차단하는 방식이 일반적인 마비독과는 조금 다릅니다."
설이연이 시험관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리자, 허담이 슬며시 다가와 어깨너머로 그것을 들여다보았는데, 그 거리가 처음보다 훨씬 가까워져 있다는 것을 두 사람 모두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다르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보통의 신경독은 즉각적으로 마비를 일으키지만, 월식수련의 독은 서서히, 그리고 깊게 잠재워 재우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겉보기엔 그냥 잠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뇌의 각성 기능이 조금씩 멈춰가는 것입니다."
설이연의 설명은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확신에 찬 무게가 담겨 있었고, 그것은 오랜 시간 왕실 의국에서 숱한 독초와 씨름해온 자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였다.
허담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탄과 놀라움이 섞인 표정이 스쳤고, 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해독할 방법도 있습니까."
"이론적으로는 각성을 유도하는 자극제와 독소를 분해하는 촉매를 함께 투여하면 가능합니다. 다만……"
설이연이 잠시 말을 멈추고 시험관을 내려놓았다.
"그 촉매가 되는 식물이 이 지역에는 자생하지 않습니다. 남쪽 삼림에서만 자라는 '청염초'라는 풀인데, 지금 계절에는 채집이 어렵습니다."
그 말을 듣던 강하온이 문가에 서서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에 있으면 구할 수 있습니까."
강하온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낮고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미세한 긴장이 배어 있었는데, 설이연은 그가 문 앞에 서서 얼마나 오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남쪽 국경 근처 삼림지대에 서식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위치는 저도 확실히는……"
"제 부하들을 보내겠습니다."
강하온의 즉각적인 결정에 설이연은 잠시 말을 잃었는데, 그 짧은 대화 속에서 그가 얼마나 실용적으로, 그리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사람인지를 새삼 체감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망설이지 않는구나.'
왕도의 관료들이라면 몇 번씩 회의를 거치고 문서를 작성하며 시간을 끌었을 일을, 강하온은 단 한 마디로 결정해버렸고, 그 결단력이 낯설면서도 어딘가 든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촉매가 도착하기 전까지, 환자들의 상태를 붙들어둘 방법이 필요합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환자들의 체온을 낮게 유지하고, 최소한의 영양을 공급하면서 각성 자극을 지속적으로 주어야 합니다. 잠이 더 깊어지지 않도록."
허담이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조수들을 불러 지시를 내렸고, 그날부터 진료소는 밤낮없이 사람들이 오가는 분주한 곳으로 변했다.
물을 나르는 발소리와 천을 적셔 환자들의 몸을 닦는 조수들의 손길이 끊이지 않았고, 설이연 역시 잠을 줄여가며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는 데 매달렸는데, 그 며칠 사이 그녀의 눈가에는 짙은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록 남쪽으로 보낸 부하들에게서는 소식이 없었고, 그사이 침상에 누운 환자들의 상태는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는데, 특히 처음부터 가장 위중했던 그 청년, 이름이 준호라고 불리던 환자의 호흡이 점점 얕아지고 있었다.
준호는 습지 근처 마을에서 나무를 베다가 넘어진 월식수련 줄기에 스쳐 병을 얻은 청년이었는데, 처음 실려 왔을 때만 해도 열이 오르고 헛소리를 하는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은 잠에 빠져들며 깨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이연은 매번 그의 손목을 짚으며 맥박이 조금이라도 강해지기를 바랐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질 뿐이었다.
탁, 탁.
허담이 서둘러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깨뜨렸고, 그 소리에 이어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맥박이 약해지고 있습니다."
허담이 다급하게 외쳤고, 설이연은 서둘러 청년의 곁으로 달려가 손목을 짚었는데, 손끝에 닿는 맥박이 마치 실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체온이…… 너무 낮아졌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설이연의 목소리가 떨렸고, 그녀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왜, 왜 이렇게 빠르게……'
다른 환자들과 같은 시기에 발병했음에도 유독 이 청년의 증상만 빠르게 악화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없어, 설이연은 자신이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초조하게 머릿속을 헤집었다.
'체질의 차이인가, 아니면 노출된 독의 양이 달랐던 건가……'
수십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었고, 그 불확실함이 설이연의 손끝을 더욱 떨리게 만들었다.
"각성 자극을 더 강하게 주어야 합니다. 지금 있는 재료로 임시방편이라도……"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허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지만, 설이연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더 위험합니다."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허담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몸을 돌렸는데, 그 짧은 순간의 침묵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 이미 어떤 신뢰가 자리 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하온이 그 순간 방으로 들어서며 다급하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침착함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고, 대신 다급함이 짙게 배어 있었는데, 설이연은 그런 그의 모습을 처음 보는 듯했다.
설이연은 그를 향해 몸을 돌리며, 처음으로 목소리에 절박함을 담아 말했다.
"청염초가 도착하기 전에, 이 사람이 먼저 숨을 거둘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이 방 안에 무겁게 내려앉는 순간, 청년의 숨소리가 한층 더 얕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