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다음 날 아침, 나는 한소은을 학원 뒤뜰로 불러냈다.
수업이 시작되기 삼십 분 전, 아직 학생들 대부분이 식당이나 기숙사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었다. 뒤뜰은 오래된 등나무 넝쿨이 벽을 타고 올라간 곳으로,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구석이었다. 나는 일부러 그 시간과 장소를 골랐다.
'누구에게도 들려서는 안 될 이야기니까.'
한소은은 내가 보낸 쪽지를 받고 놀란 얼굴로 뛰어왔다. 숨을 몰아쉬며 등나무 아래 도착한 그녀는, 한동안 말도 못 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소은아, 부탁이 있어."
"음, 부탁? 뭔데?"
한소은은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먼저 부탁을 한다는 게 그만큼 드문 일이었다. 평소 같으면 그녀가 먼저 나서서 도와줄 일이 없냐고 물어보는 쪽이었으니까.
"뭐, 뭐길래 이렇게 은밀하게……. 설마 큰일 난 거야?"
"큰일인지 아닌지는 아직 몰라. 그래서 확인하려는 거야."
나는 등나무 넝쿨 사이로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한 뒤, 목소리를 낮췄다.
"어제 다과회에서, 정령계에 이상 징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궁정 마법사 조사단이 파견됐다더라."
"그, 그거랑 네 계약식이랑 관계가 있는 거야?"
"확신은 없어. 그런데 확인은 해봐야 해."
나는 그동안 정리해둔 생각을 짧게 늘어놓았다.
"내가 여섯 살 때 만난 정령이 있어. 그 정령이 계약식에서 만나러 오겠다고 약속했어. 그런데 나타나지 않았어."
한소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말을 곱씹었다.
"그, 그럼 그 정령이 뭔가 사정이 있어서 못 온 거란 얘기야?"
"그럴 가능성이 있어. 그게 개인적인 실패가 아니라, 정령계 전체의 문제와 관련 있을 가능성이."
한소은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여러 번 흔들리는 게 보였다. 뭔가를 열심히 계산하는 표정이었는데, 그 결과가 뜻밖의 방향으로 튀었다.
"그, 그럼…… 진짜 소문처럼 네가 남자라는 게 아니라……?"
"당연히 아니지."
"그, 그렇지. 그렇지……."
그녀는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스르르 풀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나는 그 반응을 보며, 이 소문이 얼마나 깊게 퍼져 있는지 다시금 체감했다.
'대체 그 소문은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걸까.'
정령이 안 나타난 것과 내가 남자인 것 사이에 무슨 논리적 연결이 있는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부분을 파고들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네가 해줬으면 하는 게 있어."
"뭐, 뭐든지 말해!"
한소은은 두 손을 꼭 쥐고 눈을 반짝였다. 그 열의가 부담스러울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 열의가 필요했다.
"궁정 마법사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 알지. 네 오라버니."
"어, 어. 알아……. 근데 왜 갑자기 오라버니 얘기가……."
"정령계 이상 징후에 관한 최근 보고서, 열람할 수 있는지 알아봐줘. 특히 늑대형 대정령과 관련된 자료가 있는지."
"늑, 늑대형 대정령? 그런 게 있어?"
"있어. 내가 여섯 살 때 만난 정령이 그거였으니까."
한소은은 잠시 멈칫하더니, 뭔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오라버니한테 부탁해볼게. 근데 그런 걸 열람하려면 이유를 대야 할 텐데……."
"적당히 둘러대. 학술적인 관심이라고 하든지."
"음, 그, 그러니까…… 알겠어. 해볼게."
그녀는 여전히 어딘가 불안한 표정이었지만, 더 묻지 않고 몸을 돌려 뒤뜰을 빠져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나도 수업을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오후, 나는 강예린과 다시 마주쳤다.
이번에는 복도 한가운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간대였다. 오전과는 완전히 다른 자리, 다른 시간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번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서윤 영애."
"강예린 영애."
그녀는 아쿠아페어리 없이 혼자 서 있었다. 늘 그녀의 곁을 지키던 정령이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번 대화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정령을 데리고 오지 않았다는 건.'
이건 정령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뜻이었다. 그녀답지 않은 방식이라, 나는 조금 긴장했다.
"곧 열릴 왕실 무도회에서, 정령 시연 대결을 제안하고 싶은데요."
"대결이라니."
"정령이 없는 영애께서 계속 왕자님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는 게,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저 말고도 많거든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감춰지지 않는 날이 서 있었다. 복도를 지나가던 몇몇 학생들이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흘겨보기 시작했다.
"그러니 공개적으로 확실히 하는 게 어떨까요. 누가 진짜 왕자님 곁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나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대결이라. 지금 이 시점에서 그걸 받아들이는 게 유리할까, 불리할까.'
계약식에서 정령이 나타나지 않은 사건이 아직 소문으로만 떠도는 지금, 공개 대결은 위험한 도박이었다. 이겨도 얻는 게 적고, 지면 모든 걸 잃는다.
대답을 하기 전에, 저 멀리 궁정 문양이 새겨진 전령이 학원 정문으로 다급하게 들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숨을 몰아쉬며 뛰어오는 그의 손에는 붉은 봉인이 찍힌 서신이 쥐여 있었다. 걸음걸이가 다급했고, 옷차림은 먼 길을 급히 달려온 사람처럼 흐트러져 있었다.
전령은 곧장 학원장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저건, 급보의 봉인.'
붉은 봉인은 국가 비상 사태에만 쓰이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파란 봉인이나 노란 봉인으로도 충분한 전달 사항들이 학원과 오가곤 했지만, 붉은 봉인은 그런 것들과는 격이 달랐다. 왕실과 관련된 급박한 일이 아니면 쓰이지 않는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강예린의 도전을 뒤로한 채, 그 전령이 사라진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왜 지금.'
정령계 이상 징후 이야기를 들은 게 바로 어제였다. 조사단이 파견됐다는 소식도 함께였다. 그리고 오늘, 붉은 봉인이 찍힌 급보가 학원으로 날아왔다.
이 두 사건이 서로 관계가 없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영애, 제 말 듣고 있으신가요."
강예린의 목소리가 조금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있다고 여기는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나는 그녀를 향해 짧게 대답했다.
"대결은 나중에 이야기하죠."
"지, 지금 저를 무시하시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니라."
나는 학원장실 쪽으로 다시 한번 시선을 돌렸다. 전령이 사라진 문 너머로, 뭔가 심각한 대화가 오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지금은, 저 급보가 무슨 내용을 담고 있는지가 훨씬 더 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