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왕실 다과회는 매년 이맘때에 왕궁 정원에서 열렸다.
붉게 물든 단풍과 하얀 천막들이 어우러진 그 풍경은, 매년 봐도 낯설지 않을 만큼 익숙했다.
나는 혼약자로서 매번 초대받았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원에는 각 가문의 자제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찻잔이 부딪히는 소리, 낮은 웃음소리,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흐르는 시선들.
강예린도 물론 있었다.
그녀는 이번에도 아쿠아페어리를 데리고 나타나, 몇몇 귀족들 사이에서 즉석으로 작은 시연을 선보이고 있었다. 물방울이 그녀의 손끝에서 튀어 올라 작은 무지개를 그렸다가 다시 흩어졌다. 사람들은 감탄사를 흘렸다.
"어머, 정말 아름답네요."
"영애께서는 역시 정령의 축복을 받으셨나 봐요."
나는 그 광경을 멀찍이서 바라보며 찻잔을 들었다. 딱히 부럽지는 않았다. 물방울로 무지개를 만드는 재주가, 지금 내게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이서윤 영애는 정령이 없으시니, 그 부분은 좀 아쉽겠어요."
누군가 지나가듯 말했다. 대놓고 나를 향한 말은 아니었지만, 방향은 명확했다.
나는 그저 찻잔을 들었다. 세 번째로 비슷한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 말들에 반응하지 않는 법을 이미 익혀두고 있었다.
'네 번째쯤 되면 아마 웃으면서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찻잔을 내려놓았을 때, 옆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러게요. 요즘은 정령 하나 없이는 명함도 못 내미는 시대인데."
"쉿, 그래도 후작 영애신데……."
수군거림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대놓고 손가락질하지는 않지만, 등 뒤에서 충분히 들릴 만큼의 목소리로.
나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신경 쓴다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다른 방향에서 상황이 흘러갔다.
선우진 왕자가 정원 중앙에서 몇몇 대신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쪽을 굳이 쳐다보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그가 자리를 옮겨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은발에 가까운 밝은 금발, 곧게 뻗은 등, 절제된 걸음걸이.
그는 늘 그런 사람이었다. 서두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마치 자신의 속도가 곧 이 정원의 속도라는 듯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슬그머니 자세를 고쳐 앉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강예린도 시연을 잠시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이서윤."
"전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짧게 예를 갖췄다.
"안색이 좋군."
짧은 인사였지만, 그 말이 지금 이 정원에서 얼마나 이례적인 발언인지 나는 알았다.
다들 내 안색이 나쁘다고 수군거리고 있는 마당에, 왕자가 정반대의 말을 던진 것이다.
'안색이 좋다니.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놀란 기색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옆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오래 머무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저 확인하듯, 스치듯.
마침 그때, 강예린 옆에 있던 귀족 영식 하나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손에 든 찻잔을 살짝 흔들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표정이었다.
"전하, 혹시 모르시나 본데, 요즘 저잣거리에 이상한 소문이……."
그의 말투에는 은근한 재미가 섞여 있었다.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소개하는 사람처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선우진과 나에게로 향했다. 몇몇은 이미 그 소문의 내용을 알고 있는 듯, 입가에 은근한 웃음을 매달고 있었다.
'무슨 소문인지는 나도 대충 짐작이 가는데.'
나는 태연하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속으로는 그리 태연하지 못했지만.
"들었다."
선우진은 그 말을 자르며 대답했다. 짧고, 낮고, 조금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영식은 잠시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그렇다면……."
"그런데 그 소문이 사실이라 해도, 내 혼약자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원이 잠시 조용해졌다.
찻잔 부딪히는 소리도, 웃음소리도, 순간 멈춘 것 같았다.
나조차도 그 말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건, 무슨 뜻으로.'
소문이 사실이어도 상관없다는 말은, 여러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그저 정치적인 발언일 수도 있고, 나를 감싸려는 배려일 수도 있고, 혹은 전혀 다른 의미일 수도 있었다.
'설마 뭔가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 순간에는 그저 그가 소문을 일축했다는 사실만 남았다. 그러나 그 말은, 훗날 내가 진짜 정체를 밝혀야 할 순간에 이상한 방식으로 다시 떠오르게 될 문장이었다.
선우진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대신들 쪽으로 걸어갔다. 나를 향해 특별히 더 오래 머물지도, 더 다정하게 눈을 맞추지도 않았다. 그저 지나가듯 한마디를 던졌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짧은 몸짓 하나가, 정원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을 조금 바꿔놓았다.
방금까지 나를 두고 수군거리던 목소리들이 잠시 잠잠해졌다. 대신 다른 종류의 시선들이 나를 향했다. 궁금해하는 눈빛, 조금 전과는 다른 무게의 시선.
강예린의 얼굴에서 미소가 잠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다.
더 얇아진 미소였다.
그녀는 다시 아쿠아페어리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방금까지의 여유는 조금 옅어진 듯 보였다. 물방울이 이전보다 조금 덜 반짝였다.
'괜한 착각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과회가 끝나갈 무렵, 정원 한쪽에서 궁정 마법사들이 심각한 얼굴로 모여 무언가를 논의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라면 그런 광경에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은 뭔가 달랐다. 마법사들의 표정이 지나치게 굳어 있었고, 그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다급했다.
몇몇은 손에 두꺼운 서류를 들고 있었고, 그중 한 명은 지도처럼 보이는 것을 펼쳐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지나가는 시녀에게 슬쩍 물었다.
"저기 무슨 일이니."
시녀는 잠시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저, 그게…… 정령계 쪽에 뭔가 이상 징후가 있다고, 조사단이 파견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상 징후라니, 구체적으로 어떤."
"그, 그건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다만 마법사님들이 며칠째 저러고 계시다고……."
나는 걸음을 멈췄다.
'이상 징후.'
그 단어가 내 안에서 무언가와 겹쳐졌다.
늑대 정령의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침묵.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그 어떤 신호도 오지 않았다. 약속이라고 하기엔 너무 조용했고,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시기가 맞아떨어졌다.
단순한 우연으로 넘길 수 없는 조합이었다.
나는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쪽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그들 중 하나가 서류를 넘기다가, 문득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나로서도 아직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