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성인식이 끝난 뒤, 나는 별채의 내 방으로 곧장 돌아왔다.
대강당을 빠져나올 때, 등 뒤에서 수십 개의 시선이 따라붙는 걸 느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큰 소리였다.
시녀들이 따라붙으며 옷매를 다듬어주려 했지만, 나는 손짓으로 그들을 물렸다.
"혼자 있고 싶어."
시녀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곧장 창가로 걸어가 앉았다. 유리 너머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하늘의 색이 주홍에서 남색으로 넘어가는 그 짧은 순간을, 나는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계약식 문양이 빛났는데,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실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다른 귀족가의 자제들은 크든 작든 정령 하나쯤은 응답을 받았다. 형체가 뚜렷하지 않아도, 최소한 빛이나 소리, 바람 한 줄기라도 있었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완전한 침묵. 그 침묵 속에서 대강당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씩 굳어가던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어머니가 문을 두드렸을 때, 나는 여전히 창가에 앉아 있었다.
"서윤아."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괜찮아요."
"괜찮을 수가 없잖니."
어머니는 문을 열고 들어와 내 곁에 섰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괜찮아요."
세 번째 대답에서 어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내 손을 잠시 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어머니의 손은 따뜻했는데, 그 온도차가 오히려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내 손을 놓고, 방을 나갔다.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청연 공작가의 가주가, 장녀의 성인식 날 밤에 방을 찾지 않는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 대강당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다시 곱씹을 필요가 없었다.
혼자가 되자, 나는 그제야 오늘 낮에 눌러두었던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여섯 살 때였다.
후원 깊은 곳, 아무도 오지 않는 연못가에서 나는 다리를 다친 늑대를 발견했다. 회색 털에 은빛이 섞인, 눈동자가 사람처럼 총기 있는 짐승이었다. 다리 한쪽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고, 그 주변의 풀이 짓눌려 있었다.
나는 배운 적도 없는 치유 마력을 손끝에 모아 그 다리에 흘려보냈다. 그때는 그게 무슨 힘인지도 몰랐다. 그냥, 아파 보이니 낫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늑대의 다리가 서서히 원래 형태로 돌아왔다.
그때 늑대가 말을 했다.
"네가 나를 살렸구나."
짐승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훨씬 낮고, 훨씬 오래된 것이 담긴 목소리였다. 나는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했지만, 늑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나는 이 나라 최고의 대정령이다. 지금은 사정이 있어 이런 모습으로 다닌다만."
여섯 살의 나는 그 말을 반은 믿고 반은 흘려들었다. 대정령이라는 게 뭔지도 정확히 몰랐던 나이였으니까. 그저 말하는 늑대가 신기했고, 다친 다리가 나은 게 기뻤을 뿐이었다.
"이름이 뭐지, 어린 것."
"서윤이요."
"서윤. 좋은 이름이군."
늑대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숲으로 향했다. 그리고 떠나기 전, 고개만 돌려 한 가지를 약속했다.
"네가 계약식을 치르는 날, 반드시 만나러 가겠다."
나는 그 약속을 몇 번이나 되새기며 다짐했던 것도 기억한다. 잊지 않겠다고, 손가락까지 걸었던 것 같은데 — 정작 상대는 손이 없는 늑대였으니 무슨 소용이었을까.
그런데 그날의 약속을 나는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아홉 해가 지나는 동안, 그 늑대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나 역시 그것을 어린 시절의 몽상쯤으로 정리해버렸다. 유모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했다면 분명 열병으로 헛것을 봤다는 얘기를 들었을 테니까.
그런데 오늘, 계약식 문양이 빛나는 순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나는 그 생각을 곧바로 지웠다가, 다시 끄집어냈다.
'그 정령이 오려다가 못 온 걸까. 아니면 애초에 오지 않을 작정이었을까.'
만약 그 대정령이 정말로 존재했다면, 그리고 정말로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면, 오늘 그 자리에 나타나야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나를 놀리려던 것뿐이었나.'
어느 쪽이든, 이 침묵이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는 확신만이 남았다. 대강당을 가득 채웠던 그 완전한 무(無)는, 그냥 마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확신의 근거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동시에 그걸 의심할 수도 없었다.
나는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며 그 확신을 붙잡았다.
다음 날, 학원 등교 준비를 하던 중, 시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흘렸다.
"아가씨, 저잣거리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요."
나는 머리를 매만지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무슨 소문."
"그, 그러니까…… 정령이 응답하지 않는 현상이, 원래는 남성이 계약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나는 손끝의 움직임을 잠시 멈췄다.
거울 속에서 시녀의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그녀는 말을 꺼낸 것 자체를 후회하는 표정이었다.
"계속해봐."
"저, 저도 그런 소문일 뿐이라……"
"계속해."
시녀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결국 입을 열었다.
"남성 마력자가 여성형 계약식을 강행하면 정령이 응답을 거부한다는, 그런 옛 전설이 있대요. 그래서 사람들이……."
시녀는 뒷말을 삼켰다.
나는 그 뒷말을 굳이 요구하지 않았다. 이미 짐작이 갔으니까.
청연 공작가의 장녀가 사실은 장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그런 수군거림이 저잣거리를 타고 흐르고 있는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그런 소문이 만들어지고, 퍼지고, 이제는 내 시녀의 입에서까지 흘러나올 정도로 자란 셈이었다.
"그거 말고는 없어?"
"네? 아, 네…… 그것 말고는……"
시녀는 더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더 캐묻지 않았다.
거울 속의 나를 잠시 바라보았다. 열다섯 해 동안 익숙하게 봐온 얼굴이었다. 눈매도, 콧대도, 입술의 각도도 모두 익숙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우습다.'
우스운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시녀가 머뭇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가씨…… 혹시 괜찮으세요?"
나는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괜찮아."
그 대답이 어제 어머니에게 했던 것과 똑같다는 걸, 나는 말을 끝낸 뒤에야 깨달았다.
창밖으로 학원 마차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그 소문들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