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너를 떠난 밤, 편지가 왔다

4화

나는 윤서아. 방금 들은 말을 이해하는 데 잠깐 시간이 걸렸다. "스킨십……이요?" "정확히는, 그, 신체적으로 밀접한 접촉이요. 정도가 클수록 회복량도 커요." 준서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대답했다. 방패 뒤에서도 그 붉어진 귀 끝이 다 보였다. '이 상황에서 그런 스킬을 갖고 있다는 것도 신기하네.' 나는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몬스터 무리가 다시 방패에 부딫히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쿵! 방패가 밀리며 준서의 몸이 반 발짝 뒤로 밀려났다. 발바닥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버, 버틸 수 있어요!" 준서가 다시 다리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목소리는 씩씩했지만 팔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저러다 팔 빠지는 거 아니야.' 나는 그 와중에도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저도 처음엔 이런 스킬 나온 거 보고 되게 당황했었는데……지금은 그냥, 있는 대로 써야 할 것 같아서요." 준서가 방패를 고쳐 잡으며 덧붙였다. 말투에 자조가 살짝 섞여 있었다. '그러게. 스킬이라는 게 사람 사정 안 봐주고 막 튀어나오니까.' 던전에 들어오고 나서 각성한 스킬이 하필 이런 거라니. 준서 입장에서도 얼마나 곤란했을지 짐작이 갔다.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통로 안쪽에서 울렸다. 낮고 습한 소리였다. 마치 벽 전체가 숨을 쉬는 것 같았다. 하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그거 쓰면 마나가 회복된다는 거예요?" "손을 잡는 정도로도 조금은 되는데, 확실하게 하려면……" 준서가 말끝을 흐렸다.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도현을 쳐다봤다. 걘 검을 쥔 채로 앞쪽 몬스터를 견제하면서도, 시선은 계속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검날에 묻은 검붉은 액체가 조명 없는 통로 안에서도 번들거렸다. "도현아,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내가 물었다. "나는……판단은 너희가 해. 나는 방패 역할 못 하니까 계속 앞을 막아야 돼." 도현이 앞을 향해 검을 내지르며 대답했다.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퍽! 검이 몬스터의 머리를 스쳤다. 완전히 베지는 못했는지 몬스터가 짧게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저도 당황했으면서 티는 안 내네.' 십오 년을 봐온 얼굴이었다. 저 목소리 떨리는 거, 나는 안다. 진짜 아무렇지 않을 때랑 아무렇지 않은 척할 때는 미묘하게 다르다. 지금 저건 후자였다. 준서가 나를 바라봤다. "윤서아 님, 어떻게……"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나가 회복되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다는 건 알았다. 힐러인 나는 지금 마나가 바닥을 치고 있었고, 도현의 검에 걸어줄 축복도 몇 번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방식이라니. '이건 좀…….' 도현이랑 십오 년을 알아온 사이인데, 지금 이 자리에서 낯선 남자랑 그런 식으로 접촉한다는 게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유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그냥 그랬다. 머리로는 효율을 따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먼저 거부감을 느꼈다. 준서는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이었다. 던전 입구에서 파티가 급하게 꾸려질 때 합류한, 방패 스킬을 가진 힐러 지망 탱커. 그게 내가 아는 전부였다. 그런 사람 손을 잡는다고? 아니, 그 이상을 요구한다고? '아니 근데 지금 그거 가릴 처지인가.' 또 다른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툭 튀어나왔다. 몬스터 무리가 이 좁은 통로를 다 채우고 있는데, 마나 없이 버틴다는 건 말장난이나 다름없었다. "저는……괜찮아요. 어떻게든 버틸게요." 나는 결국 그렇게 대답했다.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좀 웃겼다. 버틴다니, 뭘로. 준서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지만 더 강요하지는 않았다. "알겠어요, 그럼 저는 계속 방패 역할만……" 그때 하늬가 끼어들었다. "저는 할게요." 다들 잠깐 하늬를 쳐다봤다. 하늬는 우리 파티의 마법사였다. 원거리 딜을 주로 담당했고, 마나 소모가 제일 심한 포지션이었다. 지금 이 통로 안에서 마나가 가장 급한 사람도 사실 하늬였을 거다. "저는 마나 회복이 시급하니까요. 그리고……" 하늬는 잠깐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갔다. "이런 거 별로 안 가려요." 말투는 여전히 센 척이었지만,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저거 안 가리는 거 아니고 그냥 티 안 내려는 거 같은데.' 나는 순간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하늬 성격을 좀 아는데, 저건 백 퍼센트 허세였다. 그래도 지금 이 상황에서 그 허세가 고마웠다. "그럼, 좀…… 실례할게요." 준서가 방패를 잠시 서아 쪽—아니, 하늬 쪽으로 옮기며 말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 스킬 자체보다 이 상황 자체가 부담스러운 거겠지. 나는 그 순간 몬스터 무리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정확히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냥 지금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몬스터 하나가 방패의 빈틈을 노리고 튀어나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짧은 보호막 스킬을 걸었다. 마나가 순식간에 깎여 나가는 게 느껴졌다. '얼마 안 남았는데.' 숫자로 보이지 않는 감각이지만, 몸이 먼저 안다. 이건 곧 바닥이라는 걸. "서아야, 힐 좀!" 도현이 소리쳤다. 검을 쥔 팔이 눈에 띄게 느려져 있었다. 몬스터 하나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톱을 휘둘렀다. 도현이 몸을 틀어 겨우 피했지만, 옷깃이 길게 찢어졌다. 나는 남은 마나를 긁어모아 그에게 축복을 걸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옅은 금빛이 도현의 몸을 잠깐 감쌌다. 상처 부위가 조금씩 아무는 게 눈에 보였다. 완전한 치유는 아니었다. 이 정도 마나로는 그게 최선이었다. "이게 마지막이야." 내가 말했다. "알아." 도현이 짧게 답했다. 그러면서도 검을 다시 고쳐 쥐고 앞으로 나섰다. 그 뒷모습에 순간 화가 났다. 왜 항상 저렇게 태연한 척인지. '너 지금 안 괜찮잖아.'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지금 그럴 시간도 없었다. 등 뒤에서 하늬의 짧은 숨소리가 들렸다. 준서의 낮은 목소리가 뭐라고 속삭이는 것도 어렴풋이 들렸다. 나는 애써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편했다. '이게 맞는 방법일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뭔가 걸리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지금 뭔가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그냥 내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걸까. 몬스터의 파도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통로 안쪽에서 들리던 낮은 울음소리도 조금 잦아들었다. 다음 파도가 오기까지 아주 짧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숨을 몰아쉬었다. 폐가 타는 것처럼 뜨거웠다. 얼마나 오래 이 자세로 버티고 있었는지, 다리에 감각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하늬 씨, 마나 좀 돌아왔어요?"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답 대신, 뒤쪽에서 익숙한 빛—마법사의 마나 회복을 알리는 옅은 청색 빛—이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빛은 처음엔 희미했지만 점점 또렷해졌다. 확실히 효과가 있다는 뜻이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뭔가 목에 걸린 것처럼 답답했다. 이 방법이 계속 반복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다음엔 나도 해야 하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스스로도 놀랐다. 아까는 그렇게 거부감을 느꼈으면서, 지금은 벌써 효율을 계산하고 있었다. 사람 마음이 참. 그리고 바로 그때, 미궁 통로 저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또각또각, 급하지 않은 걸음. 하지만 분명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였다. 도현이 잠깐 척후를 나간 사이였다는 걸, 나는 그제야 기억해냈다. 도현이 지금 내 옆에 없는데, 그러면 저 발소리는 누구지. '도현이가 지금 돌아오면…….'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 도현은 여기 없는데. 그럼 저건 누구의 발소리인가. 몬스터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가.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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