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적화 공작가를 다녀온 지 이틀 만에, 후작가로 낯선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발신인은 설란 공작가였다. 윤아라의 친가.
봉투를 받아 든 순간부터 손끝이 살짝 떨렸다. 인장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금박으로 눌러 찍은 문장(紋章), 그 위에 겹겹이 두른 붉은 밀랍. 이런 격식을 갖춰 보낼 편지가, 나 같은 일개 후작가 영애에게 올 이유가 뭐가 있을까.
뜯기도 전에 이미 알 것 같았다. 좋은 소식은 아닐 거라는 걸.
편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내가 윤아라를 만나 협박성 발언을 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사교계 활동에 제약을 두겠다는 경고였다.
협박이라니.
나는 그 문장을 세 번쯤 다시 읽었다. 세 번을 읽어도 내용이 바뀌지 않았다. 나는 그저 붕대에 대해 질문 하나 했을 뿐인데. 그것도 아주 예의 바르게, 걱정하는 척까지 곁들여서.
"아가씨, 이거……." 다이앤이 편지를 보며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손에 든 찻잔이 살짝 흔들렸다. "설란 공작가가 직접 나섰다는 거잖아요."
"그러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거 진짜 웃긴다. 질문 하나 했다고 공작가가 직접 편지를 보내다니. 이 정도면 차라리 영광으로 여겨야 하는 거 아닐까. 후작가 영애 따위한테 공작가 인장이 찍힌 편지가 온다는 게, 원래는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일 텐데.
그런데 웃긴 것과 별개로, 등골이 서늘한 것도 사실이었다.
설란 공작가는 적화 공작가 못지않게 왕실과 가까운 가문이었다. 그런 곳에서 개인 영애에게 직접 경고 편지를 보냈다는 건, 절대 가볍게 볼 일이 아니었다. 보통은 이런 일이 있어도 사람을 통해 넌지시 흘리거나, 사교계 소문으로 슬쩍 압박하는 게 관행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이렇게 빨리,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온다는 건.
뭔가 다급했다는 뜻이었다.
아버지도 편지를 읽고 나서 안색이 굳었다. 평소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분인데, 미간이 눈에 띄게 좁아졌다.
"서연아, 너 그날 정확히 무슨 말을 한 거냐."
"붕대가 왜 이제야 나타났는지 물었을 뿐이에요."
"그것만으로 이런 편지가 온다고?"
"저도 그게 이상해요."
아버지는 편지를 든 손을 잠시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어 인장 부분을 손끝으로 훑었다.
"설란 공작 부인 성격이 보통이 아니다. 예전부터 자기 딸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걸로 유명했지. 하지만 이렇게까지 직접 나서는 건, 나도 처음 본다."
"그러니까 저도 궁금한 거예요. 대체 뭘 그렇게 숨기고 싶은 건지."
정말 이상했다. 질문 하나에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건, 그 붕대에 뭔가 진짜로 켕기는 게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내가 건드려서는 안 되는 뭔가를 건드렸거나.
어느 쪽이든, 이 정도 반응이 나올 정도라면 뭔가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날 저녁, 나는 다이앤을 통해 조심스럽게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다이앤은 설란 공작가에서 일하다 얼마 전 그만둔 하녀를 알고 있다고 했다. 어릴 적 같은 마을에서 자란 사이라, 서로 안부 정도는 종종 주고받는다고 했다.
"확실한 사람이지?" 내가 물었다.
"입이 무거운 편이에요. 저도 몇 번 만나봤는데, 쓸데없는 말은 절대 안 하는 성격이거든요."
그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됐다. 이런 일일수록 사람을 잘못 골랐다가는 오히려 화살이 나한테 돌아온다.
이틀 뒤, 다이앤이 그 하녀를 몰래 데려왔다. 이름은 미리였다. 나이가 지긋한, 눈매가 날카로운 여인이었다. 손등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했고, 오랫동안 몸을 낮추고 살아온 사람 특유의 조심스러운 걸음걸이가 눈에 띄었다.
"아가씨, 이건 정말 조심스러운 얘기라서……."
미리는 말을 꺼내기까지 한참을 망설였다. 시선이 자꾸 문 쪽으로 향했다. 누가 엿듣기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게 훤히 보였다.
나는 그녀에게 차 한 잔을 내밀며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았다. 이런 얘기는 재촉한다고 빨리 나오는 게 아니었다.
미리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한참을 그렇게 앉아만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윤아라 영애가 그 팔의 멍……. 사실 계단에서 넘어져서 생긴 게 아니에요."
나는 숨을 죽였다.
"그럼요?"
"본인이…… 직접 낸 것 같았어요. 제가 우연히 그 방에 들어갔다가, 영애가 팔에 뭔가를 세게 문지르는 걸 봤거든요. 딱딱한 걸로요. 처음엔 그냥 가려워서 긁는 줄 알았는데, 그러고 나서 다음 날 멍이 생겼다고 하시더라고요."
직접 낸 멍이라니.
심증은 있었지만, 실제로 이런 얘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머릿속이 잠깐 하얘졌다가, 다시 차갑게 정리됐다.
"확실한가요?"
"확실합니다. 제가 그날 방을 나가는 걸 영애가 봤는데, 그다음 날부터 저를 이상하게 경계하시더라고요. 눈도 잘 안 마주치시고. 그러다 얼마 안 가서 저는 별다른 이유 없이 해고당했어요. 짐 쌀 시간도 하루밖에 안 주시더라고요."
입막음이었구나.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단순히 나를 모함하려는 정도가 아니었다. 윤아라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것도 서슴지 않는 여자였다. 그것도 아주 태연하게,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이.
그 정도 각오면, 나한테 무슨 짓을 못 할까.
"이 얘기, 다른 곳에도 하신 적 있나요?"
"아니요. 무서워서…… 아가씨니까 말씀드리는 거예요. 다이앤이 워낙 신뢰가 가서……."
미리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손끝이 떨리는 게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얘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는 일은 없을 거예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확신은 없었다.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으니까.
미리를 돌려보내고 나서, 나는 한참 동안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이 증언 하나로 뭘 할 수 있을까.
미리는 이미 해고당한 하녀다. 신빙성을 의심받기 딱 좋은 증인이었다. 원한을 품고 거짓말을 지어냈다고 몰아가면 그만이었다. 이걸 섣불리 꺼냈다가는 오히려 내가 더 궁지에 몰릴 수도 있었다. 증거도 없이 공작가 영애를 모함했다는 죄목까지 얹어질 게 뻔했다.
그런데 그냥 묻어두기엔, 이건 너무 중요한 단서였다.
윤아라가 자기 몸에 상처를 낼 정도로 절박했다는 건, 그만큼 지켜야 할 뭔가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뭔가는, 아마도 내가 짐작하는 그 방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었다.
당장 쓸 수는 없어도, 손에 쥐고 있을 가치는 충분했다.
나는 밤이 깊도록 그 생각만 곱씹었다. 이걸 어떻게 써야 할지, 언제 꺼내야 할지, 누구에게 먼저 보여야 할지.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경우의 수를 그려봤지만, 딱히 명쾌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다음 날 아침, 후작가 정문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문양을 보니 설란 공작가의 마차였다.
다이앤이 창백한 얼굴로 뛰어들어왔다. 숨이 턱까지 차 있었다.
"아가씨, 설란 공작 부인께서…… 직접 오셨어요."
직접? 이렇게 빨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화려한 마차에서 내리는 중년 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옷차림 하나하나가 그 가문의 위세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진주로 장식된 목걸이, 흠 잡을 데 없이 손질된 머리, 그리고 그 위에 얹힌 표정. 표정이 결코 좋지 않았다.
미리를 만난 걸, 벌써 알아챈 걸까.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손바닥에 살짝 배어난 땀을 치맛자락에 슬쩍 닦았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했다.
부인은 마차에서 내려서자마자, 곧장 저택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걸이에서 망설임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편지 하나로도 이렇게 사람을 떨게 만들더니, 이번엔 아예 사람을 데리고 왔다.
응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