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부서진 맹세의 정원

1화

정원에 나온 지 반 시간도 안 됐는데, 강태준은 벌써 세 번째로 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봄이라기엔 아직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 끝에 겨우 매달린 꽃봉오리들이 바람에 떨렸다. 딱 저 꼴이었다. 나도 딱 저렇게, 떨어질 듯 말 듯 매달려 있었던 거였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원래도 이런 사람이었나. 아니, 원래도 이랬지. 나만 몰랐던 거지. 열두 해 동안 나는 그의 시계 확인 습관마저도 다정하게 해석해왔다. 바쁜 사람이니까. 워낙 나랏일에 신경 쓸 게 많은 사람이니까.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다정한 해석이 아니라, 그냥 내가 눈이 멀어 있었던 거였다. "서연아." 그가 나를 불렀다. 이름 뒤에 아무 존칭도 붙이지 않는 걸 보니, 오늘은 뭔가 작정한 얼굴이었다. "네, 태준님." 습관처럼 존댓말이 나왔다. 열두 해를 그렇게 불러왔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 호칭이 거슬린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나 진정한 사랑을 찾았어." 뭐라고? 순간 정원의 바람 소리도, 새 소리도 다 멎은 것 같았다. 나는 그가 무슨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근데 표정을 보니 농담이 아니었다. 이 남자, 진심이었다. 진정한 사랑이라니. 그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는 그런 단어를 써본 적이 없었으니까. 우리 사이에 오간 말들은 항상 '가문의 예법'이나 '후작가의 체면'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진정한 사랑? "아라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줘. 너처럼 계산하지 않아." 계산. 그 단어가 가슴에 콱 박혔다. 내가 뭘 계산했다는 거지. 열두 해 동안 그를 위해 외국어를 익히고, 예법을 익히고, 그가 좋아한다는 시집을 통째로 외운 게 계산이었나. 새벽마다 일어나 그의 어머니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간 것도, 그가 좋아하는 다과상을 손수 준비한 것도, 그게 다 계산이었다는 건가. 그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뭐가 사랑인 건데.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서연아, 너는 나만 보고 살아야 해. 알았지?" 여섯 살의 강태준이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때 그 말이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약속인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약속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태준님, 지금 그 말씀은……." "혼약을 파기하겠다는 거야." 그가 내 말을 잘랐다. 단정적이었다. 마치 오늘 날씨가 맑다는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머리가 핑 돌았다. 다리에 힘이 빠지려는 걸 나는 애써 붙잡았다. 여기서 주저앉으면 안 됐다. 최소한 서 있는 모습이라도 지켜야 했다.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돌아보니 윤아라가 서 있었다. 하늘하늘한 연분홍 드레스에,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벌써 우는 저 재주는 대체 뭘까. 머리는 정성스레 땋아 올렸고, 볼은 발그레했다. 방금 뛰어온 사람처럼 숨을 살짝 몰아쉬는 그 모습마저도 계산된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남을 의심하는 사람이 됐지. 아, 맞다. 방금부터였구나. "태준님, 저 때문에 이러시는 거면……" 그녀가 말끝을 흐리며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제가 그냥 물러날게요. 저는 괜찮으니까……." 괜찮다면서 왜 그의 팔을 붙잡고 안 놓는 걸까. 나는 그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강태준의 소매를 야무지게 움켜쥐고 있었다. 놓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물러난다는 사람이 저렇게 팔을 붙잡고 있으면 대체 누가 믿을까. "아니, 아라.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강태준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나를 향해 보인 적 없는 다정함이었다. "서연이가 너한테 한 짓, 내가 다 알고 있어." 한 짓? 내가 뭘? "태준님, 제가 아라 양께 대체 뭘 했다는 건지……." "시치미 떼지 마." 그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라가 너한테 얼마나 시달렸는지, 내가 다 들었어. 손찌검까지 했다며." 손찌검이라니. 나는 지금 이 순간까지 윤아라와 단둘이 마주 앉은 적조차 손에 꼽을 정도였다. 인사를 나눈 게 세 번, 그마저도 사람들 눈이 있는 자리에서였다. 그런데 손찌검이라니, 대체 언제, 어디서. "태준님,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지 말씀해주시면……." "증거가 필요해?"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라 팔에 든 멍을 봤는데도?" 윤아라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소매를 살짝 걷었다. 팔뚝에 푸르스름한 멍 자국이 보였다. 진짜 멍이었다. 저게 어디서 난 건지는 몰라도, 최소한 진짜 멍이긴 했다. 다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저 멍이 제가 만든 거라는 증거는 어디 있죠?" 조용히 물었는데, 강태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지금 아라가 거짓말한다는 거야?" "그런 말씀 안 드렸습니다. 다만 근거를 여쭤본 거예요." "근거는 무슨, 아라가 우는 걸 내 두 눈으로 봤어." 우는 걸 봤다는 게 근거가 될 수 있나. 나는 그 논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해가 안 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해할 필요조차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이미 답을 정해놓고 있었다. 나는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윤아라는 이제 아예 강태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어깨가 떨리는 걸 보니 흐느끼는 모양이었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이미 승부는 끝난 것 같은데. "오늘 이후로 혼약은 완전히 파기야. 청운 후작가에는 따로 사람을 보내겠다." 그가 몸을 돌렸다. 윤아라를 감싸 안은 채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처음 알았다. 열두 해였다. 여섯 살 때부터 저 남자만 보고 살아온 열두 해가, 방금 그의 등 뒤로 사라졌다. 머릿속이 하얘졌다가, 다시 새까매졌다.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억울하다는 생각도, 화가 난다는 생각도, 다 뒤엉켜서 하나로 뭉쳐졌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웃긴 건 뭔지 아나. 나는 그 순간에도 배가 고팠다. 아침을 거르고 나온 게 이제야 생각났다. 이런 상황에 배가 고프다니, 나도 참 어지간하다. 정원에 홀로 남은 나는, 멍이 든 자리처럼 시퍼렇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하늘 아래서 나는 오늘부로 죄인이 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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