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그날 이후 보름이 지났다.
서라 왕국 사람이 온다는 여울의 말은 아직 현실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 사이 궁 생활에 조금씩 적응해 갔다. 적응이라고 해봐야 별거 없었다. 하린을 지키는 게 최우선이었고, 그 외엔 최대한 조용히 지내는 게 목표였다.
조용히 지낸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궁이라는 곳은 숨만 쉬어도 소문이 났다. 어제는 내가 시녀에게 반찬을 남겼다는 이유로 "공주님이 편찮으신 게 아니냐"는 얘기가 돌았고, 오늘은 내가 정원에서 하품을 세 번 했다는 이유로 "밤새 잠을 못 이루셨다"는 얘기가 돌았다. 나는 그냥 반찬이 짰고, 그냥 졸렸을 뿐인데.
윤미경의 병세는 여전히 위중했지만 당장 어떻게 될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나는 하루에 한 번 문안을 갔다. 정확히는 문안이라기보다 얼굴만 비추고 나오는 수준이었다. 그녀는 대부분 잠들어 있었고, 깨어 있을 때도 나를 보면 눈을 감아버렸다. 나도 딱히 서운하지 않았다. 애초에 기대한 게 없었으니까.
한 번은 문을 열자마자 그녀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었다. 정확히 삼 초쯤. 그 삼 초 동안 그녀의 눈에 스친 감정이 뭔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원망인지, 후회인지, 아니면 그냥 낯섦인지. 그러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고, 나는 문을 닫고 나왔다.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오 년이라는 시간은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도 하고,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갈라놓기도 하는구나.
하린은 궁 생활에 나보다 훨씬 빠르게 적응했다. 시녀들이 처음엔 어색해했지만 며칠 지나자 다들 하린을 예뻐하기 시작했다. 특히 유모로 붙여준 나이 든 시녀 하나는 하린이라면 껌뻑 죽었다.
"공주님, 하린 아기씨가 오늘 처음으로 글자를 읽으셨어요."
"진짜요?"
"네, 제 이름도 읽으시고, 저기 창가에 걸린 편액도 읽으셨답니다."
다섯 살짜리가 글을 읽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녀의 얼굴이 너무 뿌듯해 보여서 나도 덩달아 기뻤다. 시골에서였다면 하린은 지금쯤 호미질을 배우고 있었을 거다. 어느 쪽이 더 나은 삶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여긴 손에 흙이 안 낀다.
"엄마! 나 이거 읽었어!"
하린이 뛰어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자기 이름이 적혀 있었다. 획 하나가 삐져나와서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좀 이상한 모양이 됐는데, 그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우와, 우리 하린이 천재네."
"천재 맞아!"
하린이 자랑스럽게 가슴을 폈다. 그 조그만 가슴을 최대한 부풀린 자세가 우스꽝스러워서 나는 웃음이 났다. 그러다 그 모습을 보는데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오 년 동안 나 혼자 힘들게 키운 이 아이가, 이렇게 궁 안에서도 씩씩하게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밭에서 흙 묻은 손으로 재워주던 밤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이 아이를 궁에 데려올 날이 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강태오는 가끔 나를 불러 차를 마셨다. 정치 얘기보다는 시시콜콜한 근황을 주로 물었다.
"밭일은 힘들지 않았니?"
"힘들었죠. 근데 재밌었어요."
"재밌었다니, 다행이구나."
"왕도 폐하께서 그런 거 궁금해하실 줄은 몰랐어요."
"내가 궁금한 게 그거뿐이겠니."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오 년 전 나를 궁 밖으로 내보낼 때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때 일에 대한 죄책감을 완전히 떨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굳이 그 죄책감을 없애주려 애쓰지 않았다. 그냥 놔뒀다. 어차피 지난 일이고, 지난 일로 서로 불편해할 시간에 차나 한 잔 더 마시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강도현은 여전히 무뚝뚝했지만 하린을 만날 때마다 은근슬쩍 간식을 챙겨줬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사탕이며 곶감 같은 것들을 소매에서 꺼내는 재주가 있었다. 마치 마술사 같았다. 무뚝뚝한 마술사.
"이거 먹어."
"삼촌 이름이 뭐예요?"
"강도현."
"삼촌은 뭐 하는 사람이에요?"
"군대 지휘하는 사람."
"멋있다!"
강도현이 그 말에 픽 웃었다. 그의 무뚝뚝한 성정을 생각하면 그 웃음이 꽤 귀했다. 나는 그 장면을 몰래 지켜보다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사람도 웃을 줄 아는구나. 하린 앞에서만.
강지훈은 여전히 나를 경계하는 눈치였지만, 회의 때마다 내 의견을 슬쩍 물어보는 빈도가 늘었다. 처음엔 시험하는 건가 싶었는데, 나중엔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것 같기도 했다.
"이번 곡물 관세 문제, 공주님이라면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저야 뭐, 농사꾼 시선으로 보면 무조건 낮추는 게 답이죠. 근데 국고 사정이 어떤지는 저도 모르니까요."
"의외로 실용적이시군요."
"밭일 오 년 하면 다 그렇게 돼요."
"경험만큼 확실한 스승은 없다지요."
"그런 멋있는 말 할 시간에 세금이나 좀 깎아주시죠."
강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그게 그가 웃음을 참을 때 나오는 버릇이라는 걸 나는 최근에야 알아챘다.
한서준만은 여전히 나를 경계했다. 표면적으로는 정중했지만 마주칠 때마다 그 미소 뒤의 냉기가 느껴졌다. 그는 그 회의 이후로 하린 문제를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포기한 게 아니라는 걸. 그런 사람은 포기하지 않는다. 그냥 때를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그가 준비하는 게 뭔지 더 무서워졌다.
여울을 만나러 우물에 몇 번 더 갔다. 그때마다 여울은 심심하다며 온갖 잡담을 늘어놓았고, 나는 그 잡담 속에서 궁 안의 소소한 정보들을 주워들었다. 누가 누구와 손을 잡았는지, 누가 누구를 견제하는지.
"저기 그 시녀 있잖아,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걔가 요새 부엌 상궁이랑 안 친해."
"그게 왜요?"
"몰라, 그냥 재밌잖아."
"여울 씨는 할 일이 그렇게 없어요?"
"우물이 무슨 일을 해. 물이나 담고 있지."
"서라 왕국 사람은 아직도 안 왔어요?"
"몰라, 우물이 그 얘기 이후로 조용해."
"조용하면 안 오는 거예요?"
"아니, 조용한 건 그냥 조용한 거야. 뭐가 됐든 조만간 온다니까."
조만간이라는 말이 벌써 보름째였다. 나는 그 말을 반쯤 흘려들으며 지내고 있었다. 조만간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믿음직스럽지 못한 단어였나 싶을 정도로.
그날도 여느 때처럼 하린과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볕이 좋아서 하린은 나비를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는 그 뒤를 느긋하게 따라가며 오랜만에 마음 편한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궁 밖에서 요란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외국 사절이 도착했을 때 울리는 신호였다.
나비를 쫓던 하린도 그 소리에 멈칫했다.
지나가던 시녀 하나가 다급히 뛰어가며 외쳤다.
"서라 왕국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보름 동안 반쯤 흘려들었던 그 말이, 이제야 진짜 무게를 가지고 나를 짓눌렀다. 하린이 내 손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엄마, 왜 그래?"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정문 쪽에서 마차 여러 대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화려한 장식이 달린 마차들이 줄지어 늘어서는 모습이, 마치 오 년 전 그날처럼 낯설고도 익숙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앞에 선 마차의 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오 년 만에 그 얼굴을 다시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