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삼형제 황궁, 귀환 공주

3화

그날 밤, 나는 배정받은 처소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하린은 낯선 침대가 무섭다며 내 품에 파고들었다. 이불에서 나는 낯선 향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느끼는 궁 특유의 공기 때문인지 아이는 자꾸만 뒤척였다. 나는 하린의 등을 토닥이며 자장가 대신 아무 말이나 웅얼거렸다. 밭에서 감자 캐던 얘기, 옆집 개가 짖던 얘기. 하린은 그런 시답잖은 얘기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지 조금씩 숨소리가 고르게 변했다. 오랜만에 맡는 아이의 냄새를 맡으며 나는 오늘 알현실에서 벌어진 일을 곱씹었다. 잠은 진작에 포기했다. 이런 상황에서 잠이 오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한서준이 하린을 궁 밖으로 내보내려는 건 분명했다. 명분은 있었다. 전례가 없다, 법도에 어긋난다. 아주 그럴싸한 말들. 궁중 대신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말빨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어디서 저런 문장을 그렇게 매끄럽게 뽑아내는지, 나였으면 벌써 말 더듬었을 거다. 하지만 그 말들 뒤에는 다른 의도가 숨어 있었다. 나는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윤미경이 위독한 지금, 궁 안의 권력 구도가 흔들리고 있었다. 강태오는 황제지만 온화한 성정 탓에 강경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강지훈은 그 틈을 노려 자기 입지를 다지려 했고, 강도현은 정치에 관심이 없어 방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서준은 그 사이에서 자기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나와 하린은 그 판에 갑자기 끼어든 변수였다. 변수는 위험했다. 특히 하린처럼 신분이 애매한 존재는, 누군가에게는 이용할 카드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제거할 대상이 됐다. 카드나 제거 대상이나, 어느 쪽이든 내 딸을 두고 하는 소리라 생각하니 속이 뒤집혔다. 이 사람들 눈엔 하린이 사람이 아니라 무슨 체스판 위의 말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다음 날 아침, 대신전에서 회의가 열린다는 전갈이 왔다. 하린의 신분 처리를 논의한다는 명목이었다. 나는 하린을 유모에게 맡기고 회의장으로 향했다. 심장이 뛰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걸었다. 걸음마다 발바닥에 힘을 꾹꾹 눌러 담았다. 무너지면 안 됐다. 여기서 밀리면 다음은 없었다. 회의장엔 이미 한서준과 몇몇 대신들이 앉아 있었다. 강지훈도 있었다. 강태오와 강도현은 자리에 없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확인하니 씁쓸했다. 딸 문제라면서 정작 결정권 있는 사람들은 코빼기도 안 보인다. "공주님께서 오셨군요." 한서준이 나를 보며 말했다. 어제와 같은 온화한 미소였다. 저 미소, 이제 볼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제 딸 문제라니 참석하는 게 당연하죠." "그러시죠. 다만 결정은 저희가 합니다." 결정은 저희가 한다. 참 편한 말이다. 나는 그 말을 속으로 곱씹으며 자리에 앉았다. 회의가 시작됐다. 대신들은 돌아가며 하린의 신분을 어떻게 처리할지 떠들었다. 대부분 궁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쪽이었다. 근거는 어제와 똑같았다. 전례, 법도, 위신. 마치 어제 못다 한 대사를 다시 읽는 것 같았다. 이 사람들, 대본이라도 미리 맞춘 건가 싶었다. 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이 사람들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싶었다. 화내는 건 나중에도 할 수 있다. 지금은 정보가 필요했다. 그러다 한 대신의 말에서 실마리를 잡았다. "이번 일로 서라 왕국과의 관계도 신경 써야 합니다. 그쪽에서 우리 황실의 기강이 흐트러졌다고 여기면 곤란하니까요." 서라 왕국.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나는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왜 갑자기 남의 나라 얘기가 나오지. 하린 신분 문제에 서라 왕국이 왜 끼어들어. "실례지만." 나는 손을 들어 발언권을 요청했다. 한서준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서라 왕국과의 관계가 왜 이 일과 얽히는 거죠?" 대신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벌써 답이었다. "제가 알기론 서라 왕국은 내정간섭을 극도로 꺼리는 나라입니다. 우리 황실 내부의 신분 문제에 그들이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을 텐데요." "그, 그건……" 말을 더듬는 대신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이건 핑계다. 그냥 갖다 붙인 말이다. "혹시 이 회의가 하린의 신분 문제가 아니라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닌가요?" 내 말에 회의장이 술렁였다. 강지훈이 처음으로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 어제 알현실에서 봤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뭐랄까,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찾은 사람 같은 얼굴. "예를 들면 어떤 목적 말씀입니까, 공주님." 그가 물었다. 나는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내가 없는 사이 굳어진 세력 구도에, 갑자기 나타난 나와 내 딸이 변수로 작용할까 봐 미리 정리하려는 거겠죠. 하린을 핑계 삼아서." 정적이 흘렀다. 한서준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 미묘한 표정 변화 하나 잡아내려고 나는 눈에 힘을 잔뜩 줬다. "공주님께서 상상력이 풍부하시군요." "상상이 아니라 관찰입니다. 저도 오 년 동안 그냥 밭만 갈고 살진 않았거든요." 사실은 그냥 밭만 갈고 살았다. 정말로. 감자랑 배추랑 무만 알고 살았다. 하지만 여기서 그걸 밝힐 이유는 없었다. 지금은 세게 나가야 할 때였다. "만약 제 말이 틀렸다면, 이 회의를 공개적으로 진행하시죠. 폐하와 원수님도 참석하시고, 기록도 남기고요. 떳떳하다면 못 할 이유가 없잖아요?" 대신들이 서로 눈치를 봤다. 한서준의 침묵이 길어졌다. 나는 그 침묵을 견디며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침묵이 길어질수록 내 쪽이 유리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가 결국 회의를 접었다. 나는 그 순간 알았다. 내 말이 정곡을 찔렀다는 걸. 속으로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이겼다, 일단은. 회의장을 나오는데 강지훈이 뒤따라왔다. 발소리가 유난히 여유로웠다. "의외군요, 공주님." "뭐가요?" "밭일만 하고 사신 분치고는 정치판 돌아가는 걸 잘 보시길래." "본 게 아니라 겪은 거죠. 궁에서 자랐잖아요, 저도." 강지훈이 나를 잠시 응시했다. 그 눈빛에서 처음으로 경계 비슷한 게 느껴졌다. 아까와는 또 다른 눈빛이었다. 흥미와 경계가 반반 섞인, 뭐라 설명하기 애매한 눈빛. "앞으로 지켜보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려는 걸 겨우 붙잡았다. 일단 급한 불은 껐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한서준이 이렇게 순순히 물러날 사람이 아니었다. 저런 인간들은 한 번 막히면 다른 길로 돌아서 다시 온다. 오늘은 정면 돌파가 막혔으니, 다음엔 분명 옆구리를 노릴 거다. 하린을 데리러 가는 길, 나는 오랜만에 궁 안의 정원을 지났다. 어릴 때 뛰어놀던 그 길이었다. 나무도, 연못도, 그때 그대로였다. 변한 건 나뿐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예상치 못한 것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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