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은발 영애의 두 번째 생

4화

겨울이 깊어질수록 궁정의 오후는 유난히 짧아졌는데,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 회랑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길어져 사람들의 얼굴을 반쯤 가려버리곤 했다. 그날도 그러했다. 강태오가 회랑 저편에서 걸어 나와 이하윤의 옆에 서서 가볍게 예를 갖추자, 이하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방금 전까지도 서연을 향해 서늘한 시선을 던지던 그녀였건만, 태오를 발견하자마자 그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이 서연의 눈에도 뚜렷이 보였다. "마침 잘 오셨어요, 태오." 이하윤이 말하며 서연을 향해 손짓했다. "선 영애께서 저를 능멸한 일로 이야기를 나누던 참이었는데, 태오도 자리를 함께해 주시겠어요?" 목소리에는 은근한 즐거움이 섞여 있었다. 마치 오랫동안 기다려 온 손님을 맞이하는 듯한 태도였는데, 그것이 서연에게는 이 자리 전체가 애초부터 짜인 판이었다는 확신으로 다가왔다. 그 말에 태오는 잠시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머무는 시간은 채 숨 한 번 들이쉴 만큼도 되지 않았으나, 서연에게는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서연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삼 년 전의 그 다정했던 눈빛이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러나 태오의 눈동자는 아무런 동요 없이 그저 사무적인 예의만을 담고 있었다. "전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태오가 짧게 답하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 사무적인 태도에 서연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때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배어 나오던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그저 왕녀의 명을 수행하는 도구처럼 굳어 있었다. 목소리마저 저렇게 변할 수 있는 것일까. 서연은 생각했다. 사람의 마음이 식으면 목소리의 결마저 바뀌는 것일까. 두 사람 사이에 이런 거리가 생긴 것은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었다. 삼 년 전 어느 봄날, 태오가 서연을 찾아와 처음으로 냉랭한 얼굴을 보였던 순간이 있었다. 그날은 궁정 연회가 열렸는데, 봄바람에 흩날리던 벚꽃잎이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했다. 그 화사한 풍경 한가운데서 서연은 은채가 태오의 소매를 붙잡고 우는 것을 목격했다. 은채는 서연이 자신을 밀쳐 넘어뜨렸다며 눈물로 하소연했고, 그 눈물은 어찌나 정교했던지 그 자리에 있던 이들 중 누구도 서연의 결백을 증명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은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차며 서연을 흘겨보았을 뿐이었다. 태오는 그날 이후로 서연을 대할 때마다 어딘가 거리를 두었다. 처음에는 사소한 어긋남이었다. 인사를 건네도 한 박자 늦게 답하거나, 눈을 마주치는 시간이 조금씩 짧아지는 정도였다. 그러나 그 어긋남은 시간이 지날수록 벌어지는 틈이 되었고, 마침내는 이렇게 완전한 남남처럼 서 있게 되었다. 서연은 그것이 은채의 거짓말을 믿었기 때문이라 짐작할 뿐, 정작 태오가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는 끝내 듣지 못했다. 몇 번이고 물으려 했으나 그때마다 태오는 자리를 피했고, 서연 역시 자존심이 상해 그 이상 매달리지 못했다. 오해를 풀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삼 년이 흘렀고, 그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았던 것이다. "태오 공자님." 서연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써 힘을 주었다. "저는 오늘 다과회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걸, 공자님은 아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태오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으나, 그는 곧 표정을 다잡으며 답했다. "제가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애. 목격자가 여럿이라 들었습니다." 그 대답에 서연은 손이 떨려 오는 것을 느꼈다. 삼 년 만에 다시 마주한 자리에서 들은 말이 고작 목격자 운운하는 사무적인 문장이었다는 사실이, 그 어떤 모욕보다도 아프게 다가왔다. 예전의 태오였다면, 적어도 예전의 태오였다면 이런 말을 하기 전에 서연의 눈을 한 번은 더 들여다보았을 텐데. 지금 그의 눈은 서연이 아니라 저 멀리 회랑 기둥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목격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졌습니까?" 서연이 되물었으나, 태오는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렸다. 마치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질문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서연은 다시 물었다. "설마 은채입니까? 삼 년 전에도, 지금도, 언제나 그 아이의 말이 진실이 되는 겁니까?" 그 물음에 태오의 어깨가 아주 잠깐 굳었으나, 그는 끝내 아무런 답도 내놓지 않았다. 이하윤이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침묵을 즐기듯 지켜보다가, 문득 웃음기를 지우고 말했다. "진실이야 어찌 되었든, 이미 궁 안에 소문이 퍼진 이상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겠지요."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 담긴 뜻은 서늘했다. 진실 따위는 애초에 관심 밖이라는 말이었다. 그녀가 손짓하자 뒤편에 서 있던 귀족 남성들이 다시 서연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하나둘 다가오는 발소리가 마치 벽이 좁혀 오는 듯 서연의 귀를 어지럽혔다. 서연은 벼랑을 등진 채 물러설 곳을 잃었다. 등 뒤로는 회랑 난간이 서늘하게 등에 닿았고, 앞으로는 낯선 사내들의 그림자가 하나씩 드리워졌다. 태오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도 왕녀의 명이 떨어지기 전에는 함부로 나설 수 없다는 듯 미간만 좁혔다. 저 사람은, 서연은 생각했다. 저 사람은 삼 년 전에도 그러했듯 지금도 나를 위해 나서 줄 마음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나설 수 없는 것일까. 표면적으로는 우호적인 이 자리가, 실은 서연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판이었다는 것을 그제야 누구보다 뚜렷이 깨달으며, 서연은 다가오는 사내들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이하윤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고, 태오의 눈은 여전히 서연을 향하지 않았다. 그 순간 누군가의 손이 서연의 어깨를 향해 뻗어 왔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