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은발 영애의 두 번째 생

1화

겨울이 깊어지면 왕궁 사람들은 처마 끝 고드름이 몇 자나 자랐는지를 세며 한 해의 추위를 가늠한다는데, 선서연이 머무는 별궁 청연당의 처마에는 올해도 어김없이 손가락 세 마디만 한 얼음이 매달려 있었다. 삼 년 전 겨울에도, 그 전 겨울에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길이로 얼어붙던 것이었으니, 그것이 유난한 일이 아니라 청연당 자체가 그렇게 멈춘 곳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별궁들은 겨울이면 새로 온 시녀를 들이고 화로를 바꾸고 창가에 서리꽃 장식을 내거는 등 나름의 변화를 겪는다는데, 청연당만은 삼 년째 같은 자리에 같은 화로, 같은 시녀 둘이 붙박여 있었다. 후작가 외동딸이라는 신분 하나로 왕궁에 발을 붙이고 있으나 찾아오는 이 없고 부르는 이 없어, 서연은 그 정적을 견디는 것이 곧 하루의 전부인 삶을 살아온 지 오래였다. 마력 한 줌 타고나지 못한 몸으로 귀족 사회에 섞여야 했던 그녀에게,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은 축복이 아니라 낙인이었다. 왕가의 색이라 불리는 그 빛깔을 미천한 핏줄이 감히 지녔다는 소문이 궁을 떠돈 지 오래였고, 그 소문의 근원이 어디인지는 굳이 캐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서연을 시중드는 시녀 둘은 다과 심부름을 핑계로 자리를 비웠다가 한참 만에야 돌아왔는데, 돌아온 그들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서연은 그 웃음의 정체를 굳이 묻지 않으려 했으나, 시녀 하나가 다른 하나의 옆구리를 슬쩍 찌르며 눈짓하는 것을 보고는 결국 입을 열었다.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있었느냐 물으니, 시녀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오늘 저녁 대전에서 열리는 소연에 관한 이야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게, 아가씨. 별일은 아닌데요." 나이 든 시녀가 그리 운을 떼고는 젊은 시녀에게 말을 넘기듯 물러섰고, 젊은 시녀가 마지못해 이어받았다. 강태오 공자께서 파트너로 함께 참석하실 분이 정해졌다는데, 그것이 선은채 아가씨라는 것이었다. 서연은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명목상의 혼약자는 자신이었으나, 삼 년 전 의모가 사촌 은채를 후작가에 양녀로 들인 그 순간부터 태오의 곁을 지키는 이는 언제나 은채였고, 서연은 그 사실에 이미 마음이 무뎌졌다고 믿어 왔던 것이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으나, 두 번째, 세 번째 들었을 때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끝났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아무렇지 않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보면, 무뎌졌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거짓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몇 번째였더라, 이런 소식을 듣는 것이. 서연은 속으로 헤아려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헤아려서 무엇하나. 어차피 오늘도 청연당에 홀로 앉아 창밖의 등불이 하나둘 켜지는 것을 지켜보는 밤이 될 것이었다.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나는 소리에 시녀들이 놀라 달려왔을 때, 서연은 이미 겉옷을 걸치고 문을 향해 걷고 있었다. "아가씨, 어디 가시려고요?" 나이 든 시녀가 다급히 물었으나 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젊은 시녀가 붙잡으려 손을 뻗으며 "이 시간에 어딜 나가신단 말씀이세요, 위험합니다" 하고 만류했으나, 서연은 그 손을 뿌리치고 청연당의 문턱을 넘었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스스로 문을 열고 나선 것이었다. 문턱을 넘는 그 짧은 순간, 서연은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만 이 방 안에 한 순간이라도 더 앉아 있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는, 그런 다급함만이 온몸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왕궁의 겨울 정원은 텅 비어 있었고, 마른 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저녁 안개가 발밑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는데, 서연은 그 안개를 밟으며 정원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겉옷 하나만 걸친 채였으므로 찬 기운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었으나 그것을 느낄 새도 없었다. 어디로 가야겠다는 목적지는 없었다. 다만 청연당의 정적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고, 그것이 삼 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발로 내디딘 걸음이었다. 발밑에서 마른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대전 쪽의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가 안개를 타고 희미하게 실려 왔다. 오늘 저녁, 저 대전 어딘가에서 태오와 은채가 나란히 서서 사람들의 축복을 받고 있겠구나. 서연은 그 생각을 떨쳐내려는 듯 걸음을 재촉했다. 삼 년 전, 처음 은채가 후작가에 들어오던 날의 풍경이 문득 떠올랐다. 그날도 이렇게 안개가 짙었던가. 아니, 그날은 맑았다. 지나치게 맑아서 모두가 은채의 미소를 더욱 환하게 여겼던 그런 날이었다. 정원 안쪽 회양목 울타리를 돌아설 때였다. 여러 명의 발소리가 안개 속에서 다가오는 것을 서연은 뒤늦게 느꼈는데,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그녀 앞을 가로막은 것은 왕궁 연회복을 갖춰 입은 귀족 남성 대여섯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술기운과 함께 짙은 비웃음이 걸려 있었고, 옷자락에서는 독한 술 냄새가 안개 사이로 퍼져나왔다. 그중 하나가 서연을 알아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선가의 아가씨 아니십니까." 그가 말하며 한 발짝 다가서자, 뒤에 선 다른 사내가 낄낄거리며 거들었다. "이 시간에 이런 곳엔 어인 일로. 대전엔 안 가십니까?" 또 다른 목소리가 비아냥거리듯 이었다. "가봐야 자리가 없으실 텐데. 오늘 자리 주인이 따로 계시다면서요." 그 말에 사내들 사이에서 낮은 웃음이 번졌다. 서연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는데, 발뒤꿈치가 젖은 낙엽을 밟아 미끄러지며 균형을 잃을 뻔했다. 손을 뻗어 옆의 나뭇가지를 붙잡았으나 차가운 껍질만이 손바닥에 닿았을 뿐, 몸은 여전히 불안하게 흔들렸다. 사내들 중 하나가 그 모습을 보고 더욱 가까이 다가서며 손을 뻗었다. 자유로워졌다고 믿은 순간이 실은 새로운 위협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을, 서연은 그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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