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겨울이 깊어 갈수록 왕궁의 후원에는 안개가 짙어지는 법이었다. 궁인들은 그 안개를 두고 하늘이 왕실의 은밀한 일들을 가려 주는 것이라 수군거렸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 이 벼랑 앞에서 벌어지는 일 역시 하늘의 뜻으로 감춰질 것이 분명했다. 왕녀와 후작가의 딸이 이 안개 속에서 마주 서게 된 상황은 언뜻 우연처럼 보였으나, 실은 오래전부터 차곡차곡 쌓여 온 악연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왕실과 귀족 가문 사이의 세력 다툼에서 강가 공작가는 오랫동안 균형추 역할을 해 왔다.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기울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존재감을 지켜 온 가문이었는데, 그 균형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이 년 전 강태오가 왕녀 전속 호위로 발탁되면서부터였다. 명목상으로는 강가 공작가의 충성을 왕실에 보이기 위한 파견이었다. 그러나 명목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그 아래 감추어진 진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 궁 안 시녀들 사이에서는 이하윤이 태오의 검술 실력에 매료되어 직접 지목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것이다. 검술 실력. 그 단어가 얼마나 얇은 핑계였는지는 서연도 모르지 않았다.
선가 후작가와의 혼약이 이미 정해져 있던 태오를 곁에 두기 위해, 이하윤은 은채를 내세워 서연을 대신하게 하는 데에 손을 빌려주었다는 것이 궁 안 은밀한 소문의 요지였다. 은채가 어느 날 갑자기 선가의 양녀로 들어간 일, 그리고 그 직후 혼약자가 바뀌었다는 통보가 후작가로 날아든 일이 모두 우연이라 하기에는 시기가 지나치게 절묘했다. 명예도 사랑도 아닌 것이 권력의 저울 위에서 오가고 있었다는 것을, 서연은 그날 이후로 조금씩 깨달아 왔던 것이다. 처음에는 설마 했고, 다음에는 아니길 바랐고, 마침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세 단계를 거치는 데에 꼬박 이 년이 걸렸다.
"영애께서는 요즘 통 궁 행사에 나오지 않으셔서, 다들 걱정이 많으셨답니다." 이하윤이 벼랑 앞에 선 서연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걸음마다 치맛자락이 젖은 풀을 스치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안개 속에서 유난히 선명하게 들렸다. 그 말투는 상냥했으나, 걱정이라는 단어를 쓰는 입가에는 조소가 얇게 걸려 있었다. 서연은 그 미소를 이미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다과회에서, 무도회에서, 심지어 태오와의 약혼을 발표하던 그 자리에서도 이하윤은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연은 벼랑을 등지고 선 채 대답했다. "걱정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 짧은 대답이었다. 더 길게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에 이하윤은 소리 내어 웃었는데, 그 웃음소리가 안개 낀 후원에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 몇 마리가 놀라 날아올랐다. "그런 말씀을 하시니 더 걱정이 되는군요." 이하윤이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소문처럼 저를 원망하고 계신 건 아니겠지요?"
이하윤의 질문에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다. 서연이 무엇이라 답하든, 그 대답은 다시 소문의 재료가 되어 궁을 돌 것이 뻔했다. 원망한다 말하면 불경한 것이 되고, 원망하지 않는다 말하면 위선이 되는 함정이었다. 서연은 그 함정의 구조를 눈앞에 그려 보듯 선명히 이해하면서도, 벗어날 방도가 없다는 사실에 손끝이 서늘해졌다.
"저는 전하를 능멸한 적이 없습니다." 서연은 이하윤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오늘 다과회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이 그러했다. 아침부터 저택에 머물러 있었고, 하인들 모두가 그 사실을 증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실이라는 것이 이곳에서 무슨 힘을 가지는지, 서연은 이미 여러 번 배운 바 있었다.
그러자 이하윤의 표정이 순간 굳는 듯했으나, 곧바로 다시 자애로운 미소로 덧씌워졌다. 그 전환이 얼마나 빠르고 자연스러운지, 마치 오래 연습해 온 배우의 연기 같았다. "그러시겠지요." 이하윤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여러 사람이 들었다고 하니, 저로서도 곤란한 일입니다." 이하윤이 짐짓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는데, 그 목소리 속에는 서연을 어떻게 처리할지 이미 결정해 둔 자의 여유가 배어 있었다. 곤란한 일이라니. 서연은 속으로 되물었다. 곤란한 것은 나인가, 아니면 전하인가.
"여러 사람이라 하심은,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서연이 물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그 안에는 팽팽한 긴장이 숨어 있었다. 이하윤은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대답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의 웃음이었다. 서연은 그 웃음 속에서 이미 결론이 나 있음을 읽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서연의 잘못으로 정리될 것이었다. 명예도, 신분도, 진실조차도 이 벼랑 앞에서는 아무 힘이 없었다.
서연은 그 순간 자신이 무슨 말을 하든 소용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깨닫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하윤의 눈빛 하나, 그 여유로운 웃음 하나로 충분했다. 문득 발밑을 내려다보니 벼랑 끝이 안개에 가려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몇 걸음만 물러서면 그대로 떨어질 자리였다. 이하윤이 자신을 이곳까지 끌고 온 이유가 단순한 겁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자, 서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 왔다.
그때 후원 입구 쪽에서 절제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고 무게 있는 그 발소리는 궁 안에서도 몇 사람만이 낼 수 있는 것이었다. 시선이 그쪽으로 쏠리자, 왕궁 기사단의 검은 제복을 갖춰 입은 사내가 안개를 가르며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서연은 그 걸음걸이만으로도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강태오였다.
왕녀 전속 호위로서 이 시간에 이곳에 나타난 것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서연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예전의 다정함 대신 낯선 사람을 대하는 듯한 무표정만이 담겨 있었다. 한때는 그 눈빛이 서연만을 향해 따뜻하게 웃던 시절이 있었다. 함께 말을 타고 영지를 돌던 여름, 벽난로 앞에서 나란히 앉아 있던 겨울, 그 모든 계절이 이 무표정한 눈빛 하나로 지워지고 있었다. 그 눈빛 하나에 서연은 지난 삼 년의 거리가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했다.
"전하." 태오가 이하윤을 향해 예를 갖추며 말했다. 그 목소리는 정확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찾으시던 자를 데려오라 하셨는데, 이곳에 계셨습니까." 그 말이 서연의 귀에 닿는 순간, 안개 속에서 벼랑 끝의 바람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