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어야 사는 황자

3화

칼끝이 눈앞까지 다가온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눈으로 판단하기도 전에 손이 검을 들어 올렸다. 나는 검을 들어 사내의 칼을 막았다. 챙! 쇠붙이 부딪는 소리가 바위틈을 울렸다. 메아리가 절벽 사이를 몇 번이고 되튀며 사라졌다.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충격이 뼛속까지 저릴 정도였다. 그 순간, 이상한 감각이 온몸을 관통했다. 마치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팔에서, 다리에서, 그리고 단전 깊은 곳에서 낯선 힘이 솟구쳤다. 숨이 가빠졌다. 아니, 정확히는 숨을 쉬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 들이마신 기가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지, 몸이 스스로 알고 있었다. 5년 전 궁의 무학관에서 느꼈던 그 감각과 닮아 있었다. 아니, 그보다 몇 배는 더 강렬했다. 그때는 미약한 물줄기였다면, 지금은 둑이 터진 것 같았다. 사내가 눈을 크게 떴다. "뭐, 뭐냐 이건…" 그의 칼끝이 흔들렸다. 방금까지 확신에 차 있던 눈빛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그가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동작처럼, 검을 쥔 손이 자연스럽게 사내의 심장을 향해 뻗어 나갔다. 발끝이 바위를 밀어내고, 허리가 돌아가고, 팔이 뻗어 나가는 그 모든 과정이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졌다. 배운 적 없는 동작이었다. 그런데도 낯설지 않았다. 푹. 둔탁하면서도 선명한 소리가 났다. 검이 사내의 가슴을 관통했다. 손끝에서 뭔가가 갈라지는 감각이 전해졌다. 뼈와 살을 지나 심장 근처의 무언가를 건드리는 그 진동이 손목까지 그대로 올라왔다. 사내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입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어, 어떻게…"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나는 검을 뽑았다. 사내의 몸이 그대로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무릎이 먼저 꺾이고, 상체가 뒤로 기울고, 결국 옆으로 쓰러졌다. 그 과정이 마치 느린 화면처럼 눈앞에서 재생되었다.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바람 소리도, 절벽 아래에서 들려오던 물소리도, 전부 아득하게 멀어졌다. 오직 내 손과 그 손에 묻은 것만이 선명했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붉은 피가 손끝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뜨겁고, 진하고,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손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그 온기가 방금까지 살아 있던 사람의 것이라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졌다. 사람을 죽였다. 그 사실이 뒤늦게 실감으로 다가왔다. 숨이 턱 막혔다. 온몸이 떨렸다. 이가 딱딱 부딪는 소리가 스스로도 들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 떨림 속에는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 다른 것이 함께 섞여 있었다. 각성. 방금까지 내 몸을 지배하던 병약함이, 마치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늘 무릎을 꿇게 만들던 그 무력감, 숨 한 번 들이마시는 것조차 힘겨웠던 그 감각이 지금 이 순간에는 흔적조차 없었다. 물론 여전히 몸속에서는 액령단의 독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아랫배 깊은 곳에서 시커먼 것이 꿈틀거리는 감각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독기를 억누르는 힘이,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내 안에서 깨어난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방금 눈을 뜬 것처럼. 나는 고개를 들어 백현조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표정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고, 백발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빛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무언가 다른 것을 읽었다. 확인. 마치 예상했던 결과를 확인한 자의 눈빛이었다. 놀라움도, 안도도 아니었다. 그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답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눈빛. "이제야."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야, 라니요." 나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검을 쥔 손가락 사이로 피가 계속 흘러내렸다. 몸이 떨리고 있었지만, 그 떨림 속에서도 질문은 명확했다. "이 힘이, 대체 뭡니까." 백현조는 잠시 침묵했다. 절벽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그의 백발을 흔들었다. 그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마치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재는 것처럼. "…아니. 정확히는 지금 설명할 수 없다." 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대답에 만족할 수 없었다. 목구멍까지 다시 묻고 싶은 말이 차올랐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캐물을 여력이 없었다. 몸이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방금 각성한 힘의 여파인지, 아니면 그저 극한까지 몰아붙인 육체의 한계인지 알 수 없었다. 무릎이 저절로 꺾이려 했다. 나는 검을 지팡이처럼 바닥에 짚고서야 겨우 버텨 섰다. "…이 자는." 나는 시체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사내의 눈은 여전히 크게 뜨여 있었다. 그 눈에 담긴 마지막 표정이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홍채원의 명을 받고 온 것이 맞습니까." "틀림없다." 백현조가 짧게 대답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너를 죽일 생각이었다." "왜."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건 나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짐작이 가는 것은 있다." 그가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마치 길가에 떨어진 돌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가 999계단을 완주한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불편한 결과였을 것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단순한 시험을 통과한 것뿐인데, 그것이 왜 살해의 이유가 된단 말인가. 무학관의 시험은 통과하면 통과한 것이고, 실패하면 실패한 것이었다.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 리 없었다. "단지 계단을 오른 것뿐입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백현조가 나를 흘긋 보았다. "세상의 모든 일이 겉보기와 같다면, 애초에 궁 안에서 사람이 죽어 나갈 일도 없었겠지." 그러나 백현조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시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익숙한 손길이었다. 마치 여러 번 해본 일처럼, 시체의 옷섶을 확인하고, 품속을 뒤지고, 신원을 알 만한 것들을 챙겨 넣는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이 일을 원주에게 보고해야 한다." 그가 말했다. "네가 계단을 완주했다는 사실은 이미 명부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세정단을 청할 자격은 살아 있다. 그러나 홍채원의 폭행에 대해서는 반드시 진술해야 한다." "진술한다고 해서, 그녀가 순순히 인정할까요." 내가 물었다. 목소리에는 이미 확신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백현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답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불길한 예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홍채원 같은 인물이 순순히 죄를 인정할 리가 없었다. 그녀는 분명 이 일을 뒤집을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궁 안에서 살아남는 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는지, 나는 이미 몇 번이나 목격한 적이 있었다. 절벽을 내려오는 길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매 걸음마다 손끝의 마른 피가 옷깃에 스치는 감각이 신경을 긁었다. 백현조는 앞서 걸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등을 바라보며 나는 몇 번이고 방금 일어난 일을 되짚었다. 그날 밤, 나는 단약원의 객당에서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손끝에는 아직도 마른 피의 감각이 남아 있었다. 아무리 씻어내도 지워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손을 몇 번이나 대야에 담갔는지 모른다. 첫 살인. 그 무게가 온몸을 짓눌렀다. 눈을 감으면 사내의 마지막 표정이 떠올랐다. 어떻게, 라는 그 한마디. 그 말이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그러나 동시에, 내 안에서 무언가가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도 분명히 느껴졌다. 손끝에 남은 감각, 몸 안에서 낯설게 흐르는 그 힘. 그것이 두려움과 함께, 이상하게도 안도감마저 주고 있었다. 이 힘이 없었다면, 지금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은 나였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자 오히려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삼전주 조정헌 앞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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