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복수를 품은 열 살

5화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학원 교무실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복도 조명은 늦은 시간이라 절반쯤 꺼져 있었고, 신발 밑창이 바닥 타일에 닿을 때마다 저벅저벅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원래는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는데, 내 이름이 언급되는 걸 듣자마자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 섰다. 마흔여덟 해를 살아온 인간의 직감이라는 게 이런 순간에는 꼭 쓸데없이 발동해서, 나는 문틈에 몸을 반쯤 숨긴 채 숨소리까지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백 선생님, 그 이한결이라는 애 있잖습니까." D클래스를 담당하는 최도철 선생의 목소리였다. 목소리에 뭔가 눌러 담은 짜증 같은 게 섞여 있었는데, 그게 나를 향한 건지 백하윤을 향한 건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뭐가 문제입니까?" 백하윤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정했다.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사무적인 어조였다. "문제라기보다는... 이상하다는 거죠. 그 나이대 애가 그런 서술을 쓴다는 게 정상은 아니잖습니까. 혹시 부모가 답안을 대신 써준 게 아닐까 싶어서요." '...우리 엄마가 그런 논술을 쓸 수 있으면 이 집이 지금 이 형편이겠냐.'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지만,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지금은 웃을 때가 아니었다. "시험은 감독하에 진행됐고, 필체 대조도 이미 마쳤습니다. 본인이 쓴 게 확실합니다." "그럼 더 이상한 거죠. 이게 정상적인 발달 과정으로 나올 수 있는 결과입니까? 저는 십 년 넘게 애들을 가르쳤지만, 이런 케이스는 처음 봅니다." 최도철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불편함이 섞여 있었는데, 나는 그 불편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대략 짐작이 갔다. 자신이 담당하는 D클래스와, S클래스 사이의 격차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로 내가 소환된 것에 대한 불쾌함, 그리고 동시에 이 이상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는 당혹감. 아마 본인 반 학생들에게 자꾸 이 이름이 비교 대상으로 튀어나오는 것도 짜증이 났을 거고, 그렇다고 이걸 부정행위라고 몰아붙일 근거도 없으니 더 답답했을 것이다. 요컨대, 최도철은 지금 나라는 변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헤매고 있는 셈이었다. "저는 이 학생을 좀 더 관찰해볼 생각입니다." 백하윤이 그렇게 말하며 서류를 정리하는 소리가 들렸다. 종이 뭉치가 탁, 하고 책상에 부딪치는 소리였다. "관찰이요? 그러다 뭔가 문제가 생기면 어쩌실 겁니까. 만약 이게 부정행위와 관련된 거라면, 학원 신뢰도 문제로 커질 수도 있는데요. 게시판에 벌써 소문이 돕니다. S클래스 신입이 뭔가 이상하다고요." "부정행위였다면 이 정도 압도적인 격차는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오히려 이 학생이 우리 학원의 새로운 기준점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준점이라니요, 그건 너무 앞서가시는 거 아닙니까?" "두고 보면 알겠지요." 두 사람의 대화는 그렇게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이어졌다. 나는 그 문틈 사이에 서서, 내가 만들어낸 파장이 벌써 이렇게 어른들의 관계까지 흔들어놓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이건... 좀 생각보다 크게 벌어졌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계획은 조용히 격차만 벌려놓고 복수를 위한 발판을 마련하는 거였는데, 지금 이 상황을 보면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학원 안에서 하나의 사건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좋게 보면 관심이고, 나쁘게 보면 감시였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으니, 나는 조용히 문 앞을 떠나 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날 저녁,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좁은 골목길 담벼락에 앉아 있는 박도현을 발견했다. 그는 시험 결과 발표 이후로 학원에서 마주친 적이 거의 없었는데, 표정이 예전보다 훨씬 밝아 보였다. 담벼락에 걸터앉아 다리를 까딱거리며 편의점 봉지에서 뭔가를 꺼내 먹고 있었는데, 나를 발견하자마자 손을 크게 흔들었다. "야, 너 나 D반 됐다." 박도현이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나는 그 웃음에서 아무런 억울함이나 좌절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뭔가 짐을 하나 내려놓은 것 같은, 개운한 얼굴이었다. "D반이면... 안 좋은 거 아니야?" "몰라, 나는 좋은데. 거기는 숙제도 덜 주고, 방과 후에 놀 시간도 더 많대. 우리 반 애들도 다 착해. 이번에 축구 하러 갈 사람 모으는데, 너도 올래?" "나는 S반이라 안 될 것 같은데." "아, 맞다. 너 그거 됐지. 야, 근데 진짜 대단하더라. 학원 전체에 소문 다 났어. 니가 무슨 천재라고."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나는 마흔여덟 해 인생을 통해 등급이 곧 가치라는 세뇌를 온몸으로 받아들인 사람이었는데, 지금 눈앞의 이 아이는 그 등급이라는 잣대에서 완전히 자유로워 보였다. 성적표에 찍힌 알파벳 하나가 이 아이의 웃음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이게... 진짜 자유라는 건가.'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나는 이미 그 자유를 선택할 수 없는 위치에 서 있었다. 복수를 위해서는 최상위에 서야만 했으니까. 박도현이 저렇게 편하게 웃을 수 있는 건, 그에게는 지켜야 할 원한도, 갚아야 할 빚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 다음에 놀자. 나 먼저 갈게." "어, 그래. 조심히 가." 박도현은 다시 봉지 속의 과자를 꺼내며 손을 흔들었고, 나는 그 뒷모습을 잠깐 돌아보고는 골목을 빠져나왔다. 집에 돌아온 나는 저녁 밥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반찬은 김치와 콩나물국, 계란말이 정도가 전부였는데, 밥그릇에서 올라오는 김이 좁은 방 안을 데우고 있었다. 나는 그 밥상을 보며 문득 현실적인 계산을 하나 했다. 학원비였다. 이 학원의 S클래스 월 수강료가 얼마인지, 나는 상담실에서 흘러나온 안내문을 통해 이미 확인해두었다. 이 시대 아버지의 월급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부담스러운 액수였는데, 그 액수를 어머니가 순순히 감당하겠다고 나선 걸 보면, 이 집안이 나에게 걸고 있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짐작이 갔다. 간단한 계산식이었다. 월급에서 생활비를 빼고, 거기서 다시 학원비를 빼면, 남는 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어머니는 태연하게 밥을 뜨고 있었다. "한결아, 이번 달부터 학원비가 좀 오른다는데, 아빠랑 얘기해서 어떻게든 마련해볼 테니까 걱정 말고 열심히 해." 어머니의 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목이 메었다. 이건 계획에 없던 감정이었다. 나는 이 사람을 원망의 대상으로만 규정해두었는데, 지금 눈앞에서 자식을 위해 빠듯한 살림을 쥐어짜내려는 그 모습을 보자니, 뭔가 복잡한 감정이 뒤섞였다. 숟가락을 쥔 손끝이 살짝 굳는 게 느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나는 억지로 그 감정을 밀어냈다. 지금 흔들리면 지금까지 세워둔 계획이 전부 무너질 수 있었다. 나는 콩나물국을 한술 떠서 삼켰는데, 짜고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면서도 이상하게 속은 쓰렸다. "네, 걱정 마세요." 나는 짧게 대답하고 밥을 먹었다. 어머니는 별다른 대답 없이 그저 웃으며 계란말이를 하나 더 내 밥그릇 위에 올려주었는데, 나는 그 손짓을 못 본 척하며 젓가락을 다른 반찬으로 옮겼다. 다음 날, S클래스 첫 정규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나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열두 명뿐인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폈다. 교실은 D클래스보다 확실히 좁았지만, 책상 하나하나에 놓인 태블릿이나 참고서의 두께만 봐도 이 반의 밀도가 얼마나 높은지 느껴졌다. 다들 어딘가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맨 앞줄에 앉아 있는 한 여자아이가 유독 시선을 끌었다. 단정하게 자른 단발머리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칠판을 응시하고 있는 그 아이는, 이 반 전체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흘긋거리며 서로 눈치를 보는 것과 달리, 그 아이만은 시선을 어디에도 흔들지 않고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자리를 찾아 앉으며 그 아이를 슬쩍 다시 봤다. 그러자 그 아이도 마침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고, 우리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 눈빛에는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뭔가를 캐묻고 싶어하는 듯한 예리함이 담겨 있었다. 마치 내 겉모습을 뚫고 그 안에 있는 뭔가를 스캔하려는 것 같은, 그런 눈빛이었다. '...쟤는 또 뭐지.' 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지만, 속으로는 이상하게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이 학원에 들어온 이후로 나를 이상하다고 여긴 어른들은 여럿 있었지만, 같은 반 학생이 나를 저런 눈으로 바라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른들의 의심은 대체로 '이 애가 부정행위를 한 게 아닐까' 하는 방향으로 흘렀는데, 이 아이의 시선은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뭔가 더 근본적인 걸 캐내려는 눈빛이었다.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 백하윤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와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교실 앞쪽 교탁까지 이어졌고, 그 명단 순서에 따라 이름이 하나씩 불렸다. "강서윤." "네." 단발머리 아이가 짧게 대답했다. 목소리는 짧고 담백했지만, 그 안에 별다른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며, 방금 마주쳤던 그 시선을 다시 떠올렸다. 강서윤. 뭔가,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나를 정확히 꿰뚫어 보려 하는 존재를 만난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앞으로 이 반에서 내가 마주치게 될 일들이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신호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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