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동굴 벽을 타고 울려서, 실제로는 어디서 나는지도 잘 구별이 안 됐다.
'이거 서라운드 사운드인가.'
나는 검을 앞으로 겨눈 채 조심조심 걸었다.
발밑에서 자갈이 부서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좀 조용히 걸어라, 발.'
동굴 안은 습했다.
이끼 냄새와 뭔가 탄 냄새가 섞여 있었다.
벽을 만져보니 축축한 게 손에 묻었다.
'이거 무슨 냄새지, 누가 여기서 고기라도 구웠나.'
조금 걸어가니 넓은 공간이 나왔다.
천장이 뚫려 있어서 빛이 한 줄기 내려오고 있었다.
딱 보스룸 컷씬 같은 조명이었다.
'제작진 성의 있네.'
거기, 초록색 피부의 작은 존재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키는 나보다 훨씬 작았고, 등은 살짝 굽었다.
눈이 노랗게 빛났다.
[고블린 샤먼 (Lv.6)]
[스킬: 바람 화살, 보조 결계]
오, 이거 딱 테이머 상대로 좋은 몬스터인데.
전투형이 아니라 지원형.
나는 침을 삼켰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지원형 몬스터면 나중에 진짜 유용할 텐데.'
'근데 저거 잡으면 안 되고, 데려가야 하는 거잖아.'
'육탄전은 안 되고, 뭔가 다른 방법이 필요한데.'
"어어, 안녕." 나는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고블린 샤먼은 지팡이를 세게 내려찍으며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외쳤다.
동시에 바람이 칼날처럼 날아왔다.
슈아악!
나는 검으로 대충 쳐냈다.
용룡의 검 덕분인지 바람 화살이 검신에 닿자마자 그냥 흩어졌다.
'오, 이거 생각보다 편한데.'
'무기가 좋으니까 뭘 해도 쉽네.'
"공격할 생각 없어! 진짜야!" 나는 소리쳤다.
고블린 샤먼은 안 믿는 눈치였다.
당연했다, 방금까지 검을 들고 다가온 인간이 갑자기 공격할 생각 없다고 하면 누가 믿겠나.
'나라도 안 믿겠다, 이건.'
고블린 샤먼이 다시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검을 등 뒤로 슬쩍 숨겼다.
"봐, 봐, 검 치웠잖아."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블린 샤먼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조금 흔들리긴 했는데, 이걸로는 부족한가.'
나는 급하게 배낭을 뒤졌다.
뽑기로 얻었던 마나 회복 포션이랑, 아까 산 육포 몇 조각이 있었다.
'포션은 좀 아까운데...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이거, 먹어봐." 나는 육포를 던졌다.
고블린 샤먼은 경계하며 코를 킁킁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육포를 주워 씹었다.
눈이 살짝 풀렸다.
씹는 소리가 오도독, 오도독 들렸다.
'저거 되게 맛있게 먹는데.'
고블린 샤먼이 지팡이를 짚은 채로 나를 다시 쳐다봤다.
이번에는 눈빛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테이밍 시도가 가능합니다.]
오, 뭐야, 갑자기 뜨네.
"테이머 스킬로 유대를 시도하시겠습니까?" 시스템이 물었다.
"응, 할게."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빛이 고블린 샤먼과 나 사이에 실처럼 이어졌다.
녀석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빛이 점점 굵어지더니, 마지막에는 반짝, 하고 터졌다.
[테이밍 성공. 고블린 샤먼이 당신의 동료가 되었습니다.]
됐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첫 테이밍 성공이었다.
동시에 좀 웃겼다.
용의 뼈로 만든 검을 들고 와서, 육포 몇 조각으로 마물을 굴복시킨 셈이었으니까.
'전략이 좀 저질스럽긴 한데, 성공했으니 됐지.'
'다음에는 좀 더 폼 나는 방법으로 해보자.'
고블린 샤먼이 지팡이를 짚으며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했다.
나이가 좀 있는 녀석인가 싶었다.
"주군... 이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녀석이 갑자기 격식 있는 말투로 물었다.
뭐야, 갭이 왜 이렇게 커.
방금까지 바람 화살 날리던 녀석이 갑자기 저렇게 나오니 적응이 안 됐다.
"어, 그냥 형이라고 해도 되는데."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주군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녀석이 지팡이를 번쩍 들며 소리쳤다.
딱 옛날 게임에서 나오던 과장된 소환수 대사 같았다.
나는 웃음을 참았다.
'이거 완전 옛날 콘솔게임 조연 캐릭터 톤인데.'
"이름은 뭐라고 부를까." 나는 물었다.
"이름이 없습니다, 주군께서 지어주시면 영광입니다!" 녀석이 눈을 반짝였다.
음.
나는 잠깐 고민했다.
'뭐 있어 보이는 이름을 지어줄까, 아니면...'
결국 별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온 대로 말했다.
"뿌글이." 나는 즉흥적으로 말했다.
"영광스러운 이름이군요! 뿌글이, 오늘부터 목숨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뿌글이가 지팡이를 흔들며 소리쳤다.
이거 완전... 코믹한 소환수 캐릭터를 뽑은 기분이었다.
'하필 이름도 뿌글이라니, 어울리기는 하는데.'
동료를 얻은 김에 나는 던전을 더 들어가보기로 했다.
뿌글이는 뒤에서 보조 결계를 펼쳐줬는데, 그게 생각보다 든든했다.
결계에 닿는 공격은 위력이 반으로 줄었다.
[던전 진행도 30%]
오, 이런 것도 표시가 되네.
나는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작은 고블린 몇 마리가 튀어나왔지만, 용룡의 검 앞에서는 그냥 종이였다.
서걱, 서걱.
두 번 휘두르니 세 마리가 동시에 쓰러졌다.
[던전 진행도 65%]
생각보다 빠른데.
용의 검이라는 게 진짜 사기템이었다.
옆에서 뿌글이가 지팡이를 흔들 때마다 결계가 파앙, 하고 펼쳐졌다.
가끔 마나가 부족한지 지팡이를 붙잡고 헥헥거리기도 했다.
'귀엽게 열심히 하네.'
"주군, 굉장하십니다!" 뿌글이가 뒤에서 소리쳤다.
"허허, 그냐?" 나는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속으로는 '이거 그냥 무기빵인데'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그걸 말할 필요는 없었다.
칭찬받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으니까.
'가끔은 무기빵이라도 폼 나는 척 좀 하면 어때.'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던전 보스로 추정되는 커다란 고블린 대전사가 나타났다.
녀석은 몽둥이를 들고 있었는데, 몽둥이 자체가 나만한 크기였다.
체격도 다른 고블린들이랑 비교가 안 됐다.
가슴팍이 웬만한 방패보다 두꺼워 보였다.
[고블린 대전사 (Lv.12)]
[던전 보스]
레벨 차이가 좀 있었다.
나는 침을 삼켰다.
'이건 좀 세게 나오려나.'
뿌글이가 결계를 펼치며 소리쳤다.
"주군, 조심하십시오!"
목소리에 걱정이 잔뜩 섞여 있었다.
대전사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콰아앙!
바닥이 움푹 파였다.
흙먼지가 훅 튀어 올랐다.
'저거 한 방 맞으면 진짜 아플 것 같은데.'
나는 검을 들어 정면으로 맞섰다.
용룡의 검이 붉게 타올랐다.
[화염 속성 발동. 데미지 증폭.]
'어, 이거 원래 이런 기능도 있었어?'
서걱!
검이 몽둥이를 그대로 갈라버렸다.
대전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딱 봐도 '이게 뭐야' 하는 표정이었다.
나도 속으로 똑같이 생각했다.
'이게 뭐야, 진짜.'
대전사가 남은 손으로 나를 향해 주먹을 뻗었지만, 나는 옆으로 굴러 피했다.
굴러가는 도중에 돌부리에 걸려서 한 번 더 굴렀다.
'아, 이건 예정에 없었는데.'
그리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서걱!
대전사가 그대로 무릎을 꿇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쿠웅.
바닥이 다시 한 번 흔들렸다.
[던전 보스를 처치했습니다.]
[던전 클리어 시간: 12분 43초]
[역대 최단 클리어 기록 갱신.]
뭐라고?
나는 검을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이거 뭐 계기판 잘못 읽은 거 아니야.'
몇 번을 다시 봐도 똑같은 문구였다.
뿌글이가 지팡이를 흔들며 환호했다.
"주군의 위대함이 이 던전에 새겨졌습니다!" 녀석이 소리쳤다.
지팡이 끝에서 작은 불꽃이 팡팡 터졌다.
축하 폭죽 대신인 모양이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첫 던전, 첫 동료, 첫 신기록.
오늘 하루만 놓고 보면, 인생 최고의 확률운을 다 써버린 느낌이었다.
'로또를 맞아도 이렇게는 안 될 텐데.'
'이거 너무 잘 풀리는 거 아닌가.'
좋은 예감보다는, 이상하게 불안한 예감이 먼저 들었다.
던전 밖으로 나가는 길, 뿌글이가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라오며 계속 뭔가를 중얼거렸다.
"주군, 다음 던전은 언제 가십니까?"
"어, 일단 좀 쉬고." 나는 대충 대답했다.
'벌써부터 다음 던전 얘기하는 거야, 이 녀석.'
동굴 입구에 가까워지자 빛이 점점 밝아졌다.
바깥 공기가 훅 들어왔다.
시원했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런데 그 순간,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계속 이어졌다.
한 번이 아니라 연달아서였다.
'이거 뭐야, 누가 이렇게 급하게 연락을...'
나는 걸음을 멈추고 화면을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열 통도 넘게 쌓여 있었다.
발신자는 전부 협회였다.
불안한 예감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