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실업급여 받는 심연 번역가

4화

뉴스에서는 이미 속보가 뜨고 있었다.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걸린 화면이었는데, 앵커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손에 든 리모컨을 놓칠 뻔했다. "현재 서울 상공에 정체불명의 균열 현상이 관측되고 있으며, 대한헌터관리청은 긴급 대응 체계에 돌입했습니다." 화면 속에는 하늘을 뒤덮은 검붉은 기류가 도심 전체를 감싸고 있었고, 그 기류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천천히 소용돌이치며 형태를 바꾸고 있었다. 그 아래로 건물 몇 채가 균열의 파장에 흔들리며 유리창이 깨지는 모습이 잡혔고, 카메라가 흔들릴 정도로 진동이 심한 듯 화면 자체가 자꾸 지지직거렸다. 나는 소파에 앉은 채로 몸이 굳어버렸다. '설마, 정말 잔영 때문인가.' 나는 그 생각을 하자마자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내가 안 갔다고 세상이 멸망할 뻔한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하지만 그 순간 창밖에서 느껴지는 진동은 분명 100층의 결계가 흔들리는 감각과 똑같았고, 나는 삼 년간 그 감각을 몸으로 익혀왔기에 헷갈릴 리가 없었다. 마치 초저음의 북소리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듯한, 그 특유의 웅웅거림이었다. 나는 리모컨을 던지듯 내려놓고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기 시작했는데, 그게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뭔가 잘못됐다는 확신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됐다. 나는 일단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섰다. 후드 티에 청바지, 딱히 헌터도 아닌 실업자 주제에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가만히 방 안에 앉아 뉴스만 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신발을 신으면서도 손이 자꾸 미끄러졌다. 거리는 이미 대혼란이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 뛰어다니고, 경찰차와 헌터관리청 소속 차량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대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디선가 확성기로 "시민 여러분은 즉시 지정된 대피소로 이동해 주십시오"라는 안내 방송이 반복해서 흘러나왔지만, 그 소리조차 사람들의 비명과 발소리에 묻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 틈에서 인파를 피해 자연스럽게 골목길로 방향을 틀었는데, 큰길보다는 그쪽이 오히려 덜 위험할 것 같다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골목을 따라 걷던 중, 문득 뒷골목 어딘가에서 낮게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난 쪽을 살폈다. 작은 균열 하나가 벽면에서 갈라져 있었고, 그 틈에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마물이 낑낑거리며 몸을 빼내려 애쓰고 있었다. 하급 마물치고는 유독 겁먹은 눈빛이었는데, 마치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으로 끌려온 것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쭈그려 앉아 그 마물을 바라보았다. "괜찮아, 천천히 나와도 돼. 여긴 위험한 곳 아니야."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말을 걸었다. 딱히 뭔가 대단한 걸 기대한 건 아니었다. 심연 번역가로서 마물과 눈을 마주치고 말을 거는 건 일상적인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마물은 놀랍게도 그 말에 몸을 움찔하며 진정하더니, 이내 균열 틈으로 다시 사라져버렸다. 도망친 게 아니라, 마치 안심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나는 그 순간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이거 뭐지.' 평소라면 마물이 사람 말을 알아듣고 반응한다는 게 신기할 일도 아니었다. 심연 번역가로서 그 정도 소통은 늘 하던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방금 그 마물의 눈빛에서 느껴진 두려움과, 그것이 순식간에 가라앉는 방식이 이상했다. 마치 내가 무언가 특별한 힘을 쓴 것처럼, 지나치게 매끄럽고 자연스러웠다. 나는 손을 들어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무 변화도 없었다. 그냥 평범한, 굳은살 하나 없는 서른한 살 백수의 손이었다. 손금이나 좀 봐줄까 싶을 정도로 별다를 게 없는 손. '착각이었나.' 나는 그렇게 넘기려 했지만, 몇 걸음 더 걷다가 또 다른 균열을 마주쳤을 때, 나는 다시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균열에서 튀어나온 마물이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며 앞발을 세우는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쉿, 괜찮아." 마물은 그대로 얼어붙은 듯 멈췄다가, 몇 초간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조용히 몸을 돌려 물러났다. 마치 방금까지 이빨을 드러냈던 게 다른 존재였던 것처럼, 순식간에 태도가 바뀌었다. 주변에 있던 시민 몇 명이 그 모습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휴대폰을 들어 나를 찍는 것 같기도 했는데, 나는 그걸 눈치채자마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 이거 찍히면 안 되는데.' 신상 노출 걱정이 지금 이 상황에 가당키나 한 걱정인가 싶었지만, 그런데도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는 괜히 민망해져 얼른 자리를 벗어났지만, 걸음을 옮기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게 왜 되는 거지. 나는 그냥 협상 좀 해본 게 다인데.' 번역가 일을 하면서 마물과 대화를 시도한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반응이 즉각적이고 완벽하게 통하는 경우는 없었다. 원래는 눈치를 살피고, 몸짓을 관찰하고, 몇 번의 시도 끝에야 겨우 의사소통의 물꼬가 트이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마물들이 내 말 한마디에 절대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이 현상 앞에서, 애써 별일 아닌 척 넘기려 했지만 심장은 계속 이상하게 뛰고 있었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됐고, 골목 어귀마다 혹시 또 균열이 있는지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서지혁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았다. 받자마자 들려온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능글맞은 어투와는 완전히 달랐다. "유담 씨, 지금 어디예요?" 목소리부터 잔뜩 떨리고 있었다. "거리에 있어요. 무슨 일이에요?" "태윤 님이랑 팀원들이 100층 봉인실 들어갔는데, 연락이 끊겼어요. 뭔가 심하게 잘못된 것 같아요." 그는 말을 이어가면서도 자꾸 말을 더듬었는데, 평소 브리핑을 할 때는 그렇게 깔끔하고 정확하던 사람이 지금은 문장을 제대로 완성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연락이 끊겼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통신 장비 문제 아니고요?" "그게 아니라, 마지막 교신 이후로 완전히······ 신호 자체가 사라졌어요. 위치 추적도 안 되고요."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등줄기로 소름이 쫙 퍼지는 걸 느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