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실업급여 받는 심연 번역가

1화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뜨는 버릇은, 심연 최심층에서 삼 년을 드나들다 보면 저절로 생기는 습관이었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창밖으로 스며드는 희끄무레한 새벽빛을 바라보았고, 오늘도 별다를 것 없는 하루가 시작된다는 사실에 묘하게 안심하고 있었다. 이불을 걷어내며 발끝으로 바닥의 냉기를 느끼는데, 그 서늘함조차 익숙해서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원룸 한 켠에 쌓인 라면 봉지와 편의점 도시락 껍데기를 보며 '이번 달도 배달비가 많이 나갔네' 하고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 정도 지출은 감당할 수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봐도 텅 빈 것을 확인하고는 '오늘도 편의점 신세구나' 하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나는 이유담, 서른한 살, 직업은 심연 번역가—라고 말하면 열에 아홉은 그게 뭐 하는 직업이냐고 되물었고, 나는 그럴 때마다 그냥 '통역사 비슷한 거예요'라고 얼버무리곤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통역사라기보단 조율사에 가까운데, 그렇게 설명하면 더 이해를 못 하니 그냥 대충 넘기는 게 편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게이트 안쪽, 그중에서도 헌터들조차 발을 들이기 꺼려하는 최심층에서 마물이나 마신 계열 존재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을 했다. 협상이라고 부르기엔 거창하고, 통역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일이었다. '백은 궤적단'에 소속된 지 삼 년째였는데, 팀 내 서열로 보면 늘 맨 밑바닥이었다. S급 탐색자 강태윤이 이끄는 이 팀은 구독자 삼백만을 자랑하는 유튜브 채널까지 운영하고 있었고, 나는 그 채널에 단 한 번도 얼굴이 제대로 잡힌 적이 없는 존재였다. 가끔 편집본에서 뒷모습이나 그림자 정도로 스쳐 지나가는 게 전부였는데, 구독자들 사이에서는 "저 사람 뭐 하는 사람이에요?"라는 댓글이 종종 달렸지만 누구도 정확한 답을 달아주지 않았다. 출근 준비를 하며 나는 옷장에서 늘 입던 회색 후드를 꺼냈고, 카메라에 잡히지 않을 색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기에 별생각 없이 그걸 골랐다. 후드 지퍼를 올리며 거울을 슬쩍 보는데, 삼 년 전보다 눈 밑이 조금 더 꺼진 것 같기도 했다. '뭐, 야근 수당도 없는데 피곤한 건 당연하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신발을 신었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다른 팀원들은 벌써 촬영 장비를 세팅하며 오늘의 게이트 브리핑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조명 스탠드를 옮기는 스태프와 마이크를 점검하는 카메라팀 사이를 지나치며 나는 늘 그렇듯 벽 쪽으로 붙어 걸었다. 나를 본 부팀장 서지혁이 대충 손을 흔들며 인사를 대신했다. "유담 씨, 오늘도 뒤에서 조용히 계세요. 카메라 각도 잡을 때 어슬렁거리지 마시고." 나는 그 말에 별다른 감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취급은 이제 익숙했다. 삼 년이면 웬만한 서운함도 굳은살이 박이는 법이니까. 브리핑 룸으로 들어서자 팀장 강태윤이 화이트보드 앞에서 오늘의 일정을 설명하고 있었는데, 나는 늘 그렇듯 맨 뒷자리에 앉아 노트에 오늘 할 일을 정리했다. 오늘 일정은 '심연'이라 불리는 던전의 100층, 그곳에 봉인되어 있는 마신 잔영의 주변 결계를 점검하는 것이었다. 팀 전체가 100층까지 내려가는 건 아니고, 나 혼자 정기 점검 명목으로 들어가는 게 관례였다. 다른 팀원들은 그걸 '유담 씨의 잡일'이라 불렀지만, 나에게는 조금 다른 의미가 있는 시간이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그 삼십 분이, 어쩌면 내가 이 팀에서 유일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엘리베이터처럼 작동하는 이동 결계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벽면에 새겨진 층수 표시가 빠르게 줄어들었고, 30층, 50층, 70층을 지날 때마다 공기 중에 섞인 마기의 농도가 짙어지는 게 느껴졌다. 100층에 도착하자 익숙한 서늘함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갔다. 결계 안쪽, 봉인실 중심에는 검은 날개를 늘어뜬 존재가 늘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지만, 이제는 익숙한 얼굴을 보러 가는 기분이었다. "오셨습니까, 유담님." 낮고 깊은 음성이 결계 너머에서 울려왔고, 나는 늘 하던 대로 준비해 온 보온병을 꺼내 뚜껑을 돌렸다. 뚜껑을 돌리는 손끝에서 따뜻한 열기가 배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오늘은 캐모마일이에요. 어제 팀원들이 인삼차 사왔는데 그건 좀 별로더라고요." 그 말에 마신 잔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아주 작게—사람이라면 웃음이라 부를 법한—숨을 내쉬었다. "유담님이 우려주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나는 그 말에 괜히 민망해져 헛기침을 하며 찻잔을 결계 틈으로 밀어 넣었고, 우리는 그렇게 삼십 분 남짓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뉴스에 나온 부동산 얘기부터, 마신 잔영이 예전에 지배했다는 어느 차원의 흥망사까지—대화의 스케일이 지나치게 널뛰었지만, 이상하게도 대화는 늘 편안하게 흘러갔다. "그 차원에서는 하늘이 세 개였다는 게 진짜예요?" 내가 묻자 마신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다만 그중 하나는 늘 붉은빛을 띠고 있어, 백성들은 그것을 재앙의 눈이라 불렀지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와, 부동산 이야기보다 훨씬 스케일이 크네' 하고 속으로 감탄했다. 돌아가는 길, 결계 밖에서 나를 기다리던 마신이 문득 물었다. "유담님, 다음엔 언제 오십니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다음 주 화요일이요, 늘 그렇듯이." 그 대답에 마신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눈빛에 스치는 어떤 그림자를 나는 그날은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결계를 나서며 등 뒤로 느껴지는 시선이 유난히 오래 머무르는 것 같았지만, 그저 기분 탓이라 여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이동 결계를 타고 다시 올라가는 동안 나는 오늘 저녁 메뉴를 고민하고 있었다. '편의점 도시락도 슬슬 질리는데, 오늘은 그냥 라면에 계란이나 풀어 먹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지상으로 올라온 나는, 사무실 복도에서 부팀장 서지혁과 마주쳤는데 그가 평소와 다르게 눈을 찌푸리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유담 씨, 오늘 100층 다녀오셨죠? 뭔가 이상한 거 없었어요?"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이상한 거요? 딱히 없었는데요." 그 말에 서지혁은 잠시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자리를 떴다. "아니, 됐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게, 내가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린 마지막 평온이었다는 걸, 그때는 전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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