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마스터라며.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강태룡의 그 말이 뇌리에 박혔다.
마스터. 내가?
저 화룡이라는 걸 자칭하는, 2미터가 넘는 존재의 마스터가?
그럴 리가.
나는 원래 파티에서 포션 셔틀이나 하던 딜러였다. 3년 내내 후방에서 버프 걸고, 물약 나눠주고, 어그로 안 끌리게 숨어 다니던 그런 캐릭터였다. 그런 내가 갑자기 초월 존재의 계약자가 됐다는 게 말이 되나? 이건 무슨 배달앱 리뷰 이벤트로 갑자기 로또 당첨된 느낌이었다. 신청도 안 했는데 당첨 문자가 오는 그런 거.
하지만 손목의 계약 인장이 여전히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테이머 계약 유지 중]
[사용마: 강태룡 - 상태 이상 없음]
부정할 수 없는 시스템 메시지였다.
시스템은 거짓말을 안 한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근데 왜 하필 나였을까. 왜 하필 저 화룡이었을까. 신은 나한테 뭔가 억하심정이 있는 게 분명하다.
[성경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도 다 신의 계획이라는 건데, 그 계획이라는 게 왜 항상 나한테는 뒤통수치는 방식으로 오냐고요.
"저, 저기요! 이서하! 지금 당장 그 계약 풀어!"
박준혁이 뒤에서 소리쳤다. 목소리가 완전히 갈라졌다.
"저게 무슨 짓인지 알아? 미확인 초월 존재랑 계약이라니, 관리국이 알면 우리 파티 전체가 조사받는다고!"
조사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울프 떼가 다시 몰려오고 있는데요.
저 사람은 지금 이 상황에서 서류 걱정을 하고 있다. 대단하다. 존경스럽다. 진짜로.
"박준혁 씨,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됐어! 이서하, 너는 이제 우리 파티 아니야!"
뭐?
"오늘부로 파티에서 제명이야. 너 혼자 알아서 해!"
박준혁이 뒷걸음질치며 소리쳤다.
3년을 같이 다닌 파티장이 나를 저렇게 쉽게 버릴 줄은 몰랐다. 아니, 사실 예상은 했다. 이 던전 오기 전부터 은근히 나를 짐짝처럼 취급하던 걸 모를 정도로 내가 눈치가 없진 않았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대놓고, 이렇게 빠르게 버려질 줄은.
그 순간 궁수 담당 여자애도 무기를 챙기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저도 못 도와드려요, 죄송해요!"
전원 후퇴. 나만 빼고.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3년 동안 이 파티에서 후방 지원이나 하면서 버텼는데, 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버려지는 사람이 나였다.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벌어지니 배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이게 무슨 임대차 계약 만료도 아니고, 그냥 사람 하나를 통보 한 줄로 방 빼라 하는 거잖아. 계약갱신청구권도 없이, 묵시적 갱신도 없이 그냥 즉시 퇴거. 나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는 게 정상인가 싶었지만, 그거 말고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었다.
울프 무리가 우르르 밀려왔다. 이번엔 정말로 전체 무리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멀리서 봐도 숫자가 심상치 않았다. 회색 털에 붉은 눈, 침을 질질 흘리면서 이빨을 드러낸 놈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게 보였다. 저게 몇 마리야. 세다가 포기했다.
"저기요, 강태룡 씨!"
내가 소리쳤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진짜 모르겠는데, 일단 저것들 좀 어떻게..."
강태룡이 나를 힐끗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이 어이없을 정도로 인간적이었다. 2미터짜리 화룡이 저렇게 사람 같은 한숨을 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어이, 계약이 됐다는 게 진짜라면, 네가 나 부를 때 뭔가 신호 같은 게 있어야 할 텐데."
"신호요?"
"보통 이런 계약은 마스터가 명령을 내리면 사용마가 따르는 구조 아니냐. 근데 지금은 그냥 내가 알아서 움직이고 있잖아."
그 말에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게임으로 치면 지금 이건 스킬을 배웠는데 사용법을 모르는 상황이랑 비슷했다. 인벤토리에 아이템은 들어와 있는데 그게 뭔지, 어떻게 쓰는지 튜토리얼이 없는 거다. 이런 불친절한 게임이 어디 있나. 환불하고 싶다.
"저... 그럼 명령해볼까요?"
"해봐."
강태룡이 팔짱을 끼고 나를 내려다봤다. 그 시선이 어찌나 무심한지, 이게 정말 나를 마스터로 인정하는 태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인정한다기보다는 그냥 재밌는 구경을 하는 느낌.
울프 떼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저것들 좀 막아주세요!"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사용마가 명령을 인지합니다]
강태룡의 몸에서 순간 뭔가 번쩍였다.
"...뭐야, 이거 진짜네."
그가 중얼거리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처음으로, 이 존재가 얼마나 압도적인지 목격했다.
쾅!
강태룡이 땅을 박차자, 울프 무리 절반이 그 충격파에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땅이 흔들렸다. 진짜로 흔들렸다. 이게 던전 안에서 지진이 날 수도 있는 거였나 싶을 정도로.
"허, 이거 몸이 왜 이렇게 무겁냐."
그가 자기 팔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원래 세계에서는 이 정도면 손가락 하나로 대륙을 지웠는데."
대륙을 지운다고?
그 스케일이 도저히 상상이 안 됐다.
손가락 하나로 대륙을 지운다니, 그게 무슨 다이어트 광고 카피도 아니고. 30일 만에 대륙 하나 삭제, 이런 식으로.
하지만 지금 이 던전에서 그는 확실히 힘이 부족해 보였다.
주먹질 몇 번으로 울프를 처리하긴 했지만, 매번 뭔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마나가... 왜 이렇게 안 모이지. 여긴 대체 어떤 세계야?"
그는 마치 해외에서 로밍 데이터가 안 잡히는 사람처럼 팔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손바닥을 펼쳤다가 다시 오므렸다가, 뭔가를 끌어모으려는 듣한 동작을 반복했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대륙을 지우던 손이 여기서는 그냥 헛손질을 하고 있었다.
울프 떼는 여전히 백 마리쯤 남아 있었다.
숫자를 정확히 셀 여유는 없었지만, 대충 봐도 절반이 날아갔는데도 저만큼 남았다는 게 소름 끼쳤다. 이게 무슨 던전이야, 무한리필 고깃집도 아니고 계속 채워지는 것 같았다.
"저기, 괜찮으세요?"
내가 물었다.
"괜찮아. 이 정도 잡졸들은 몸으로도 밀어붙일 수 있어."
말은 저렇게 하는데, 표정에서 곤란함이 묻어났다.
콧등에 살짝 잡힌 주름, 입꼬리가 미세하게 처지는 그 표정. 저건 분명 강한 척하는 표정이었다. 나도 파티에서 3년 내내 저런 표정으로 물약이 다 떨어졌다고 말 못 하고 버틴 적이 많아서 딱 알아볼 수 있었다.
[성경 잠언 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지금 이 상황에서 의지할 건 명철이 아니라 저 화룡 아저씨의 근육뿐인 것 같은데.
근데 그 근육도 지금 완전체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반값 할인된 근육이랄까.
"제 이름은 이서하예요. 그... 강태룡 씨는 화룡이라고 하셨죠?"
"그래. 강태룡. 이 몸으로 변한 지 얼마 안 됐다."
"원래는 어떤 모습인데요?"
"용이지. 진짜 용. 이건 인간들 세계에 맞춰서 취한 형태고."
용인 형태라는 거구나.
드라고노이드라던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설정인데. 라이트노벨에서 자주 보던 그 클리셰가 눈앞에서 실체화된 느낌이었다. 근데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훨씬 무게감이 있었다. 만화에서 보던 것처럼 반짝반짝하고 멋있는 느낌이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가 압박이었다.
"근데 왜 하필 인간 모습이에요?"
"이 세계 규칙이 그런 것 같더라. 원래 형태로 있으면 뭔가 자꾸 튕겨나가. 여기서는 이 몸이 한계인가 보다."
"그럼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면요?"
"모른다. 아직 시도 안 해봤어."
시도를 안 해봤다는 게 더 불안했다. 지금 우리는 실험체를 데리고 실전에 뛰어든 상황이었다. 임상 3상도 안 거친 신약을 그냥 바로 몸에 주사하는 느낌.
울프 떼가 다시 몰려들었다.
"명령해라, 마스터."
강태룡이 나를 보며 말했다.
그 말투에 조금의 비아냥거림도, 조금의 존중도 섞여 있었다.
그 눈빛이 묘했다. 나를 정말 주인으로 인정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이 상황이 재밌어서 맞춰주는 건지 구분이 안 됐다. 근데 지금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뒤에는 도망친 파티원들의 뒷모습이, 앞에는 백 마리 넘는 울프 떼가 있었다. 선택권 같은 건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전부, 처리해주세요."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강태룡이 씩 웃었다.
그 웃음이 어딘가 낯설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마치 배달 앱에서 리뷰 좋은 가게 하나 골라 시켰는데 사장님이 직접 문 앞까지 나와서 서비스 안겨주는 그런 느낌이랄까.
"오케이. 몸 좀 풀어보자."
그가 앞으로 걸어나갔다. 발걸음 하나에 땅이 다시 울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방금 내가 내린 명령이 앞으로 내 인생을 어디로 끌고 갈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울프 무리 뒤편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훨씬 크고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