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천분의 일 고룡, 내 사역마

1화

삼각김밥 두 개로 하루를 버틴 지 사흘째였다. 편의점 알바생이 폐기 처분 직전에 몰래 챙겨준 거였는데, 이것마저 없었으면 나는 오늘 던전에 들어가기도 전에 쓰러졌을 거다. 그 알바생 오빠도 참 대단하다. 매번 "이거 유통기한 5분 지났어요" 하면서 슬쩍 건네주는데, 그 5분의 유예기간이 나한테는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다. 언제 한 번 정식으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하는데, 매번 배고픔에 눈이 뒤집혀서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우걱우걱 먹기만 했다. [전도서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지금은 그냥, 배가 고픈 때였다. 하나님, 이 타이밍에 참기름 냄새 나는 삼각김밥 얘기를 굳이 인용해주시는 센스는 뭡니까. 관악 던전 게이트 앞. 오전 여섯 시. 안개가 낮게 깔린 광장에 탐방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다들 방검복이니 마도구니 번쩍번쩍한 걸 걸치고 있는데, 나만 시장에서 산 삼천 원짜리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 장갑, 원래는 김장할 때 쓰라고 파는 고무장갑이었는데 내가 그냥 던전용으로 재활용한 거다. 가성비로는 최강이었다. 다만 몬스터 상대로는 최약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짐짝. 뒤에서 누가 그렇게 부르는 걸 들었다. 그럴 리가. 아니, 맞다. 나 얘기다. 15세, 여고생, 최하위 등급 탐방자 이서하. 그게 나다. 신화급 UR 테이머 스킬 '거대 벽의 인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게 내 유일한 자랑거리인데, 이게 웃긴 게 뭐냐면 3년째 단 한 번도 발동한 적이 없다는 거다. 발동 안 되는 스킬이 뭔 의미가 있냐고 물으면, 나도 모른다. 비유하자면 로또 1등 당첨 확정 문자를 받았는데, 그 문자가 스팸함에 갇혀서 영원히 안 열리는 느낌이다. 관리국 감정관이 처음 스테이터스보드에서 등급을 뽑았을 때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는데, 그 뒤로 3년 동안 나는 그냥 '짐짝'이었다. 신화급이니 UR이니 하는 딱지는 이력서에 붙은 화려한 미사여구일 뿐, 실전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차라리 그 감정관이 "죄송한데 오류였습니다" 하고 등급을 F로 정정해줬으면 마음이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이서하 씨, 오늘도 후방 지원이에요. 알죠?" 박준혁이 말했다. '청은의 날개' 파티의 리더. 서른 초반쯤인가, 젠틀한 척하는 말투에 눈빛은 늘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저 사람 눈빛을 오래 보고 있으면 왠지 내가 무슨 부동산 매물처럼 감정평가받는 기분이 든다. "네, 알아요." 후방 지원. 그거, 실은 짐 나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포션 챙기고, 시체 정리하고, 지도 그리고. 지도 제작은 내 유일한 특기였다. 3년 동안 이 던전 지도를 손으로 그려서 판 돈으로 여동생 병원비를 보태 왔으니까. 요즘은 배달앱처럼 지도 구독 서비스라도 만들어서 팔면 좀 낫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여동생 이서윤. 실제 나이는 이제 열다섯 살이다. 하지만 3년 전 관악 던전 스탬피드 사고 때 나와 함께 휘말린 뒤 혼수상태에 빠졌고, 시간마저 멈춘 것처럼 몸과 얼굴은 열두 살에 머물러 있다. 부모님은 그날 이후로 행방불명이다. 원인 불명, 마도 치료 필요, 비용은 천문학적. 그래서 나는 이 던전에 다닌다. 죽은 부모가 사고 낸 그 던전에, 딸이 다시 들어가는 아이러니. 누가 이걸 시나리오로 쓰면 작위적이라고 욕할 텐데,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니 나도 할 말이 없다. 가끔 병실에 누워 있는 서윤이 얼굴을 볼 때마다 코끝이 찡해지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바로 병원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면서 감정을 흘려보낸다. 농담이다. 사실은 그냥 눈물이 안 나오게 딴생각을 하는 거다. "자, 오늘 목표는 6층 몬스터 퍼레이드 구역이에요." 박준혁이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울프 무리 서식지인데, 개체수가 많아서 위험도가 높습니다. 다들 각오하세요." 각오는 무슨. 나는 그냥 뒤에서 포션 세는 사람인데. 파티원들 표정을 보니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궁수 담당 여자애는 화살통을 몇 번이나 확인했고, 방패 든 탱커 남자는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몸을 풀었다. 나만 혼자 조용히 지도 노트를 꺼내서 오늘 그려야 할 구역을 미리 체크하고 있었다. "이서하는 후방에서 지도 갱신만 해. 절대 앞으로 나오지 마." 박준혁이 나를 보며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알겠습니다." 대답하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나갈 일도 없거든요. 애초에 스킬이 발동 안 되는데 앞에 나가서 뭘 하겠나. 몸빵이라도 하라는 건가. 게이트를 통과하자 특유의 서늘한 공기가 몰려들었다. 던전 내부는 항상 이상하게 습했다. 벽에서 은은한 발광석 빛이 번지고, 발밑으로는 이끼가 낀 돌바닥이 이어졌다. 2층, 3층, 4층까지는 순조로웠다. 고블린 몇 마리 정리하고, 잡템 몇 개 챙기고, 나는 뒤에서 지도만 그렸다. 3층에서는 고블린 하나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다들 화들짝 놀랐는데, 알고 보니 그냥 발을 헛디뎌서 넘어진 거였다. 탱커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 고블린을 한 방에 처리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너나 나나 오늘 운은 없구나' 하고 동질감을 느꼈다. 지도 그리는 게 내 특기라고 했지만 사실 이건 그냥 살아남기 위한 기술이다. 지도가 없으면 6층 이상은 아무도 못 들어간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최소한의 존재 가치를 갖고 있는 거다. 짐짝치고는 나름 쓸모 있는 짐짝. 가끔은 이게 내 유일한 자존감의 원천이라는 게 좀 슬프기도 하다. 5층에서 6층으로 넘어가는 계단 앞에서 파티원 중 하나, 궁수 담당인 여자애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저기... 뭔가 이상한데요." "뭐가?" 박준혁이 물었다. "공기가... 무거워요." 나도 느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느낌. 뭐지? 설마, 아니겠지. 던전이 원래 이런 데다. 습하고 무겁고 찝찝한. 백화점 지하 주차장처럼 원래 좀 그런 곳이잖아, 라고 스스로를 설득해봤지만 이번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신경 쓰지 말고 이동합시다." 박준혁이 말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다들 그를 따라 6층으로 진입했다. 나도 그 뒤를 따라갔다. 지도를 그려야 하니까.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발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쿵, 쿵, 쿵. 누가 내 귓가에 대고 심장 박동을 확성기로 틀어놓은 것 같았다. 6층에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울프 떼가, 그야말로 강을 이루고 있었다. 수백 마리. 어쩌면 그 이상. 붉은 눈알들이 어둠 속에서 별처럼 박혀 있었다. 동물원에서 늑대 한두 마리 구경하는 거랑, 이렇게 수백 마리가 한 공간에 몰려 있는 걸 보는 거랑은 완전히 다른 얘기였다. 차라리 콘서트장 스탠딩석 인파가 더 안전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게... 이게 몬스터 퍼레이드라고?" 파티원 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박준혁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이 정도 규모는... 보고에 없었는데." 그의 손에 들린 지도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저 사람도 결국은 사람이구나 싶어서 잠깐 짠했다. 잠깐이었다는 게 중요하다. 그 순간, 공간이 뒤틀렸다. 촤아아아아악! 마치 캔버스를 찢는 소리 같았다. 허공에 검은 균열이 생기더니, 그 안에서 뭔가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뭐지? 또 뭔가 터졌다. 오늘 하루가 이렇게 다사다난할 리 없는데 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관악 던전에서 다사다난하지 않은 날은 없었다. 매일이 이런 식이면 차라리 스탬피드 전용 보험이라도 하나 들어야 할 것 같다. 박준혁이 뒷걸음질치며 소리쳤다. "전부 후퇴! 지금 당장!"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젠틀한 척하는 톤과는 완전히 달랐다. 날것 그대로의 공포가 섞여 있었다. 파티원들이 순식간에 흩어지며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궁수 여자애는 이미 화살통을 놓칠 뻔하며 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 균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안에서 뭔가 거대한 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울프 떼의 붉은 눈알들조차 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수백 마리 늑대가 일제히 숨죽이는 광경이라니. 차라리 편의점 알람 소리에도 놀라던 그 늑대들이 지금은 마치 얼음이 된 것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데, 발은 땅에 붙어서 움직이질 않았다. 오늘 진짜 뭐 하나 뒤지게 되는 거 아냐? 그런 생각이 스치는 동시에, 균열 속에서 튀어나온 발이 바닥을 쿵, 밟았다.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