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잠 못 든 밤, 검이 빛나다

5화

휴대폰은 계속 울렸다. 진동이 배낭 속에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걸 느끼며, 나는 그게 곽 팀장이거나 인사팀일 거라고 짐작했다. 짐작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 나에게 전화할 만한 사람은 회사 사람 말고는 없었으니까. 연락처에 저장된 이름을 다 헤아려도 손가락 두 개면 충분했다. 부모님 번호 하나, 그리고 삼 년 전 신인 시절 함께 뛰던 동기 하나. 그 동기와도 마지막으로 연락한 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작년 명절 즈음이었을 텐데, 그마저도 서로 안부를 묻는 문자 몇 줄이 전부였을 것이다. 연차가 쌓일수록 사람은 줄어든다. 이 바닥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아는 사실이었다. 초년병 때는 팀원끼리 밥도 먹고 술도 마셨지만, 삼 년 차쯤 되면 그런 자리부터 줄어들었다. 나는 그게 서운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계산에 넣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진동을 무시한 채 남은 목록을 확인했다. 바질리스크 하나, 폭군 드래곤 셋. 시간은 오전 일곱 시 십일 분.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열여섯 시간 사십구 분. 계산상으로는 여유가 있었지만, 폭군 드래곤 세 마리가 그 여유를 얼마나 갚아먹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S급 몬스터 한 마리를 처리하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은 개체 편차가 커서 표준값을 잡기 어려웠다. 짧게는 십 분, 길게는 한 시간을 넘기는 경우도 봤다. 낙하로 이동한 지점은 원래 계획한 경로에서 크게 벗어난 협곡 하단이었다. 지형도를 다시 확인하니, 이곳에서 바질리스크의 두 번째 서식지가 멀지 않은 곳에 표시되어 있었다. 계산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맞아떨어진 셈이었는데, 나는 그런 우연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우연이 셋을 넘으면 우연이 아니라는 말을, 나는 오래전 어느 선배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 말을 지금 떠올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스치듯 지나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대개 나중에 다시 찾아오곤 했다. 지금은 아니었지만. 협곡 하단을 걸으며, 나는 드론이 여전히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드론의 배터리 잔량 표시가 눈에 들어왔는데, 아직 육십 퍼센트 이상 남아 있어서 걱정할 상태는 아니었다. 이 드론이 어떤 경로로 지금 이런 신호를 내보내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회사에서 지급한 감시용 기기라는 것만은 분명했지만, 평소와는 뭔가 달라 보였다. 그 화면 옆에, 아주 작은 글씨로 표시된 숫자가 있었다. 나는 그 숫자를 이번에는 눈으로 스쳤다. 사백이십삼만.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곱씹을 여유가 없었다. 곧바로 바질리스크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바스락거리는 비늘 소리가 협곡 벽을 타고 울려서, 정확한 방향을 짚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 바질리스크는 아까 것보다 몸집이 컸다. 던전 안내판에는 이 개체가 서식지의 우두머리급이라는 표기가 있었는데, 우두머리급 바질리스크는 시선 공격의 범위가 넓어져서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근접하면 위험할 수 있다는 게 안전 교육 자료의 경고였다. 그 교육을 받은 게 언제였더라. 입사 초년 차, 지금은 회사를 떠난 강 대리가 옆자리에서 하품을 참으며 필기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나는 그 경고를 기억해내며, 최대한 거리를 유지한 채 접근했다. 바질리스크가 몸을 세우며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는 재빨리 눈을 감았지만, 이번에는 소리로만 위치를 특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개체가 크다 보니 비늘 소리도 사방으로 울렸기 때문이었다. 협곡의 벽이 소리를 튕겨내는 통에, 진짜 위치와 반사된 소리를 구분하는 데 몇 초가 더 걸렸다. 그 짧은 혼란의 순간, 몸이 알아서 반응했다. 나는 낮게 몸을 굴려 바질리스크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런 자세는 위험했다.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상태에서 몬스터의 몸통 아래로 들어가는 건, 조금만 판단이 늦으면 그대로 짓눌려 죽을 수도 있는 도박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이런 도박을 몇 번이나 해왔는지 헤아릴 수 있었다. 정확히는 스물세 번. 그중 실패는 없었다. 실패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테니까, 그 숫자에 별다른 자부심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살아남았다는 결과가 곧 확률이었을 뿐이다. 검을 위로 찔러 넣었다. 검끝이 바질리스크의 복부를 관통하는 감각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몬스터가 크게 몸을 뒤틀었고, 나는 그 반동에 밀려 옆으로 굴렀다. 등이 바닥의 자갈에 긁혔는지 따끔한 감각이 잠깐 이어졌지만, 통증이라고 부르기엔 미미했다. 검은 입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노르마 목록에서 마지막 바질리스크가 지워졌다. 남은 목록. 폭군 드래곤 셋. 나는 몸을 일으키며 옷의 먼지를 털었다. 왼쪽 어깨가 뻐근했다. 방금 굴렀을 때 어딘가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큰 부상은 아니었다. 계산상으로도, 감각상으로도 그랬다. 어깨를 몇 번 돌려보니 움직임에 큰 지장은 없었다. 통증의 강도로 부상의 등급을 가늠하는 습관은 이 일을 오래 하면서 몸에 붙은 것이었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진동이 좀 더 길게 이어졌다. 부재중 전화가 아니라 걸려온 지 한참 지난 전화 같았다. 나는 힐끗 배낭 쪽을 쳐다봤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업무 중이었다. 이 말은 삼 년째 내가 스스로에게 되풀이하는 규칙이자 변명이었는데, 이번에도 그 규칙은 힘없이 통과되었다. 전화를 받아도 달라질 건 없었다. 곽 팀장이라면 노르마 진행 상황을 물을 게 뻔했고, 인사팀이라면 서류 얘기를 할 게 뻔했다. 어느 쪽이든 지금 이 자리에서 대답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협곡을 벗어나 폭군 드래곤의 영역으로 이어지는 통로 앞에 섰다. 통로 안쪽에서부터 이미 열기가 느껴졌다. 폭군 드래곤은 화염 속성을 지닌 S급 몬스터로, 체온만으로도 주변 온도를 몇 도씩 끌어올린다는 게 도감 기록이었는데, 세 마리가 한 공간에 있다면 그 온도는 짐작하기 어려운 수준일 게 분명했다. 도감에는 개체 하나당 반경 십 미터의 기온을 오 도씩 올린다고 적혀 있었다. 셋이면 단순 합산으로 십오 도, 실제로는 그보다 더 오를 확률이 높았다. 나는 통로 입구에서 잠깐 걸음을 멈췄다. 드론의 화면이 내 시야 가장자리에 걸렸다. 그 화면 한쪽에, 이번에는 조금 더 선명하게 숫자가 보였다. 사백오십이만.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걸, 나는 어렴풋이 인지했다. 앞서 본 숫자보다 약 삼십만이 늘어 있었다. 늘어난 시간과 견줘보면 뭔가 일정한 비율로 오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게 무엇을 세고 있는 숫자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회사 서버의 어떤 진행률이거나, 드론의 저장 용량 표시이거나, 아니면 그냥 오류겠거니 여겼다. 피곤함이 그런 무심함을 만들어냈는지도 몰랐다. 2주 넘게 제대로 눈을 감아본 적이 없었으니, 숫자 하나에 신경을 쏟을 여력이 남아 있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통로 안쪽에서 낮게 울리는 세 개의 숨소리가 겹쳐 들렸다. 폭군 드래곤 세 마리가 서로 다른 리듬으로 숨을 쉬고 있었는데, 그 소리만으로도 각 개체의 대략적인 체구를 짐작할 수 있었다. 숨을 짧고 얕게 내쉬는 놈은 아직 어린 개체일 가능성이 높았고, 느리고 깊게 내쉬는 놈일수록 몸집이 크다는 게 경험상의 셈이었다. 가장 큰 놈의 숨소리가 유독 낮고 길었다. 그 숨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통로 벽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게 손끝에 전해졌다. 나는 검을 고쳐 잡았다. 남은 시간은 열다섯 시간 남짓, 남은 목표는 폭군 드래곤 셋. 계산은 이미 다 나와 있었고, 이제 몸이 그 계산을 채울 차례였다. 통로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열기가 얼굴을 훅 덮쳤다. 숨을 쉴 때마다 목 안쪽까지 뜨거운 공기가 밀려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 열기라면 오래 버티기는 힘들 것이다. 최대한 짧게, 최대한 정확하게 끝내야 한다는 계산이 다시 한번 머릿속을 지나갔다. 휴대폰이 배낭 속에서 다시 한번 길게 울렸다. 나는 그 소리를 뒤로하고, 가장 낮은 숨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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