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오거의 남은 팔이 허공을 갈랐다.
나는 그 팔의 그림자가 채 다 드리우기도 전에 이미 옆으로 반보 움직여 있었다. 이런 종류의 몸놀림은 생각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삼 년간 던전에서 몸에 새긴 감각이 알아서 반응했고, 나는 그 결과만 확인하는 사람에 가까웠다.
검이 오거의 목을 스쳤다.
소리는 크지 않았다. 두꺼운 천을 가위로 자를 때 나는 소리 정도였는데, 그 조용함이 오히려 무서운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걸, 오거의 머리가 몸통에서 살짝 기울어지는 순간에 알았다.
A급 오거의 목을 단 한 번의 검격으로 절단하는 장면.
트루캐스트 시청자 수는 그 순간 이미 오만을 넘어서고 있었다. 실시간 급상승 목록 1위. 채팅창은 초당 수백 개의 댓글이 쌓이며 흐름을 따라가기도 힘든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중 절반은 감탄이었고 절반은 의심이었다.
'이 사람 정체가 뭐야', '랭커 중에 이런 실력 있는 사람 없는데', '몸에 배지도 로고도 없다, 뭐 하는 사람이지'.
나는 그 댓글들을 여전히 보지 못했다.
오거의 몸이 뒤로 넘어가며 협곡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그 잔해가 완전히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다음 위치로 이동했다. 노르마 목록에서 오거 한 마리가 지워졌다는 계산이 자동으로 머릿속에 새겨졌다.
남은 목록. 오거 넷, 바질리스크 둘, 폭군 드래곤 셋.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다섯 시 십칠 분. 자정까지 열여덟 시간 조금 넘게 남아 있었다.
숫자로만 보면 여유가 있어 보였지만, 폭군 드래곤은 이야기가 달랐다. S급 몬스터인 폭군 드래곤 한 마리를 처치하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은 헌터 한 명이 하루 종일 매달려도 다섯 시간을 넘긴다는 게 업계 통계였고, 세 마리를 상대하려면 아무리 계산을 아껴도 열두 시간 이상을 그쪽에만 쏟아야 했다.
남는 시간은 여섯 시간. 그 안에 오거 넷과 바질리스크 둘을 처리하고 이동까지 마쳐야 한다는 뜻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계산은 맞아떨어져야 하는데, 몸이 그 계산을 따라갈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나는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2주째 이런 상태였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발목이 시큰거렸다. 어제 착지할 때 삐끗한 곳이었는데, 파스도 붙일 시간이 없어서 그냥 붕대만 감고 넘어간 자리였다. 걸을 때마다 발목에서 저릿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그 통증도 곧 익숙해질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몸이라는 게 그랬다. 처음엔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다가, 계속 무시하면 어느 순간 신호 자체를 그만 보냈다.
협곡을 따라 이동하는 동안, 드론이 계속 뒤를 따라왔다.
드론이 내는 저음의 프로펠러 소리는 언제나 익숙한 배경음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그 소리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다른 소리가 겹쳐 들렸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스피커가 낡아서 나는 잡음이라고 넘겼다.
그 잡음은 사실 드론이 자동으로 실시간 댓글 몇 개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부가 기능이었는데, 볼륨이 최소로 설정되어 있어서 거의 들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어제 업데이트에서 새로 추가된, 아직 제대로 설명서를 읽지 않은 기능 중 하나였다.
드론으로 촬영 기록을 남기는 것도 사실 내 의지는 아니었다. 회사가 요구하는 최소 조건 중 하나였는데, 단독 노르마 수행자는 반드시 촬영 기록을 켜 놓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사고가 나면 최소한의 증거는 남겨야 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제로는 노르마 수행 과정을 감시하고 벌점을 매기는 구조가 더 큰 이유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 영상이 회사 서버에 얼마나 쌓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확인할 시간도, 확인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협곡 끝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 통로가 나왔다. 오른쪽은 바질리스크의 서식지로 표시된 구역이었고, 왼쪽은 폭군 드래곤의 영역이었다.
나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순서는 정해져 있었다. 상대적으로 처리 시간이 짧게 걸리는 걸 먼저 끝내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걸 나중에 몰아치는 게 효율적이었다. 이건 협상이나 다름없는 계산이었고, 누가 먼저 아쉬운 티를 내느냐가 아니라 누가 시간을 더 잘 쓰느냐의 싸움이었다.
바질리스크는 돌로 변하는 시선 공격을 쓰는 몬스터였다.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면 전신이 굳어버리는데, 굳는 시간은 개체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삼십 초에서 일 분 사이였다. 그 시간 안에 다른 몬스터가 접근하면 그대로 즉사였다.
하지만 나는 바질리스크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칠 생각이 없었다.
서식지 입구에 들어서자, 바위 틈에서 비늘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린 채 걸었다. 바질리스크의 시선 공격은 눈과 눈이 마주쳐야 발동한다는 사실을, 나는 삼 년 전 한 선배 헌터의 사냥 일지를 훔쳐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그 선배는 지금 은퇴해서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들었다.
그 일지에는 바질리스크뿐만 아니라 웬만한 몬스터의 습성이 촘촘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필체는 엉망이었지만 내용만큼은 어떤 협회 교본보다도 정확했다. 나는 그걸 몇 번이나 다시 읽으며 머릿속에 통째로 눌러 넣었는데, 그 선배가 그런 정보를 왜 아무에게도 넘기지 않고 조용히 은퇴했는지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마 알아도 쓸 데가 없었을 것이다. 이 바닥에서 지식은 그 자체로 돈이 되지 않았다. 지식을 쓸 수 있는 몸이 있어야 돈이 됐다.
비늘 소리가 점점 커졌다.
바질리스크가 몸을 일으키는 순간, 나는 이미 눈을 감은 채 소리의 방향으로 검을 내질렀다.
확신은 없었다. 소리만으로 위치를 특정하는 건 언제나 오차 범위가 존재했으니까. 하지만 검끝에 걸리는 저항감이, 계산이 맞아떨어졌다는 걸 알려주었다.
검을 눈을 감은 채 내지르는 장면.
트루캐스트 화면에는 그 순간이 그대로 담기고 있었다. 채팅창의 반응 속도는 이제 사람이 따라 읽을 수 없는 수준으로 빨라져 있었다. '눈 감고 찌른 거야?', '저거 실력 아니라 그냥 미친놈이잖아', '이 사람 소속 어디임'.
나는 여전히 그 반응을 몰랐다.
바질리스크가 짧은 신음을 내며 쓰러졌다. 검끝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입자를 보며, 나는 노르마 목록에서 또 한 줄을 지웠다.
남은 목록. 오거 넷, 바질리스크 하나, 폭군 드래곤 셋.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다섯 시 사십이 분. 계산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검을 다시 허리춤에 꽂으며, 나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협곡의 새벽 공기는 차가웠지만, 몸은 계속 열을 냈다. 삼 년 동안 이 짓을 하면서 배운 게 있다면, 몸은 위기 상황에서 스스로 알아서 온도를 조절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조절이 언제까지 버텨줄지 몰랐다는 점이었다.
다음 갈림길로 이동하는 동안, 드론의 프로펠러 소리 사이로 그 미세한 잡음이 다시 섞여 들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선명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잠깐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의 목소리 같은 파형이었는데,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2주째 잠을 제대로 못 잤으니 헛것이 들릴 만도 했다.
수면 부족이 사람 감각을 얼마나 망가뜨리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던전 안에서 사흘을 못 잔 헌터가 자기 손을 몬스터로 착각해서 스스로 벤 사례도 있었고, 나흘째 되던 날 갑자기 없는 소리를 듣고 패닉에 빠져 낙사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 사례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지금 2주째 비슷한 상태를 견디고 있었다. 안다는 것과 피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 소리가 실은 드론이 자동으로 읽어주던 실시간 시청자 수 발표였다는 사실을, 나는 그 순간까지도 전혀 몰랐다.
발밑에서 자갈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다음 서식지 표지판이 저 앞에 보였다. 오거 넷, 바질리스크 하나, 폭군 드래곤 셋. 남은 시간은 열일곱 시간 오십오 분.
셈은 여전히 맞았다. 몸이 그 셈을 따라가 줄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드론의 프로펠러 소리 사이에서, 그 미세한 목소리는 다시 한번 짧게 끊겼다가 이어졌다. 마치 무언가를 반복해서 외치고 있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