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3만 살 용, 던전을 접수하다

5화

손끝이 벽에 닿았다. 순간 시야가 뒤집혔다. 어두웠다. 아주 어두운 곳에서 무언가가 이 동굴 벽에 문양을 새기고 있었다.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역광 속에서 실루엣만 스쳤다. 웅. 낮은 진동음이 배경음처럼 깔렸다. 실루엣의 손이 벽을 훑을 때마다 문양이 빛을 뿜었다. 나는 그 빛의 색을 알아봤다. 엘렌티아 쪽 마력 색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짙고, 더 낡은 색. 색이라는 게 이렇게 무게를 가질 수 있나. 그 빛은 살아 있는 것처럼 벽 위에서 꿈틀거렸고, 마치 오래된 피가 굳기 전의 색깔 같았다. 나는 삼만 년 동안 온갖 마력의 결을 봐왔지만 이런 질감은 처음이었다. '저건... 지구 쪽 마력도 엘렌티아 쪽 마력도 아니야.' 제3의 것. 실루엣의 손끝이 문양의 마지막 획을 그리는 순간, 벽 전체가 잠깐 숨을 쉬듯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그 짧은 파동이 내 감각을 타고 전해졌다. 마치 누군가 내 심장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린 것 같은 이물감이었다. 그리고 멈췄어.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는 벽에서 손을 뗐다. 손이 떨렸다. 인간형 화신의 몸이라 그런지 이런 식의 역류에는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청은룡, 괜찮습니까?" 한도현이 내 어깨를 붙잡았다. "눈이 잠깐 하얘졌었는데." 나는 숨을 골랐다. 인간형 화신이라도 감각의 충격은 고스란히 받는다. "...아. 잠깐 뭘 좀 봤을 뿐이다." "뭘 봤다는 겁니까." 한도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이 남자는 늘 이런 식이다. 놀라도 놀란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다시 벽을 바라봤다. 아까와 똑같이 어두운, 그저 평범한 던전의 돌벽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여전히 그 문양의 잔상이 어른거렸다. "이 문양... 내 것도 아니고, 엘렌티아 쪽 것도 아니다." 나는 낮게 말했다. "제3의 세력이 이 던전 안에 손을 대고 있어." 대원들 사이에 불안한 침묵이 흘렀다. 김민재가 헬멧을 고쳐 쓰며 마른침을 삼켰다. 박서준은 총구를 슬쩍 벽 쪽으로 돌렸다가, 다시 거뒀다. "제3의 세력이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김민재가 물었다. "쐐기는 나 하나뿐이어야 해. 지구와 엘렌티아를 잇는 못은 하나면 충분하니까. 그런데 이 문양은... 마치 다른 무언가가 이 균형을 다시 설계하려는 흔적처럼 보인다." "쐐기가 하나 더 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아예 다른 존재가 개입했다는 뜻입니까?" 한도현이 되물었다. "모른다. 둘 다일 수도 있고, 둘 다 아닐 수도 있어." 솔직한 대답이었다. 나는 삼만 년을 이 세계의 균형을 지켜온 존재지만, 그 균형 바깥에 뭐가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애초에 바깥이라는 게 있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한도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당신 말은, 이 각성 사태 자체가... 누군가의 설계일 수도 있다는 겁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확신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최근 들어 지구 쪽 게이트가 갑자기 늘어난 것도, 인간들의 마력 각성이 이렇게 급속도로 진행되는 것도, 내가 삼만 년 동안 지켜본 균형과는 다른 속도였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변화는 수백 년, 수천 년에 걸쳐 서서히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몇 달, 몇 주 단위로 무언가가 뒤틀리고 있었다. '누군가 시계를 억지로 빨리 돌리고 있는 것처럼.' 김민재가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저, 그럼... 이거 위에다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국가 안보 차원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보고할 내용이 있어야 보고를 하지. 지금은 그림자만 봤을 뿐이다." 내가 말했다. "확실한 게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위에 던지면, 다들 겁만 먹고 판만 어지러워질 뿐이야." 한도현이 나를 힐끗 보더니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일단 여기서 오래 있을 필요는 없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3층 갱도로 가는 게 우선이다." 한도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원들을 다시 정렬시켰다. 박서준이 선두, 김민재가 후미, 한도현이 중앙에서 대원들을 살피는 평소 진형 그대로였다. 걷는 동안 나는 계속 그 문양의 색을 곱씹었다. 낡고 짙은 그 마력색은,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어디서 봤지... 아니, 못 본 게 아니라... 느껴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삼만 년 전, 처음 이 육신을 받았을 때, 그 어둠 속 목소리를 감쌌던 마력의 색. 기억이라는 게 이렇게 갑자기 튀어나올 때가 있다. 나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 형체 없는 존재가 나를 향해 말을 걸었던 그 첫 순간. 그때 그 목소리를 휘감고 있던 기운의 색깔이, 지금 이 벽에서 본 그 문양의 색과 이상하게도 닮아 있었다. '설마 그때 그 존재가...'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졌을 때, 앞서 걷던 박서준 상병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저기 뭔가 있습니다." 모두가 그 자리에 멈췄다. 나도 걸음을 멈췄다. 동굴 끝, 좁은 통로 너머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이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크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까 잡았던 흑린멧돼지보다 최소 두 배는 컸다. 한도현이 조용히 검을 뽑았다. "전원 정지. 소음 금지." 대원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총구가 조준선을 따라 통로 쪽으로 향했다. 나는 감각을 예민하게 세우며 그 형체의 윤곽을 쫓았다. 하지만 통로 너머의 그것은 이미 우리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걸음마다 바닥이 울렸다. 쿠웅. 쿠웅. 땅이 흔들릴 정도의 무게였다. 발밑에서 자잘한 돌가루가 튀어 올랐다. "청은룡, 이거 아까 그놈보다 훨씬 강해 보입니다." 김민재가 낮게 속삭였다.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지만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감각을 뻗어 그 생명체를 확인했다. 그리고 순간 숨이 막혔다. '이건... 이 층에 있어서는 안 되는 놈이다.' 등급이 달랐다. 심층 하급이 아니었다. 던전 관리자로서 내가 알고 있는 이 층의 생태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던 놈이었다. 마치 훨씬 더 깊은 층에서 강제로 끌어올려진 것처럼. 나는 재빨리 던전 전체의 생태 지도를 머릿속에서 훑었다. 이 3층에는 흑린멧돼지, 습곡거미, 아주 가끔 유입되는 하급 마수 몇 종이 전부였다. 지금 저 통로 너머에서 걸어오는 존재의 마력 밀도는 그 어떤 것과도 맞지 않았다. 이건 최소 5층, 아니 그 이상 심층에서만 볼 수 있는 급이었다. '설마 그 문양이...' 방금 본 그 문양, 그 낡고 짙은 색의 흔적이 이 생태계를 흔들어놓았다는 생각이 뒤늦게 스쳤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한도현이 나를 돌아봤다. "청은룡. 지금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놈입니까."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입이 열리지 않았다. 삼만 년을 살아온 존재로서, 확신 없는 말을 함부로 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침묵이 대원들에게는 더 큰 불안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박서준의 손가락이 총의 안전장치를 만지작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통로 너머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천천히 떠올랐다. 그 눈은 마치 우리를 이미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초점을 맞춰왔다. 크아아아아앙. 포효가 동굴 전체를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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