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여의도, 오후 세 시.
34층 유리 빌딩 인사상담실.
형광등 불빛이 하얗게 내려앉았다.
강도현은 넥타이를 다시 고쳐 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세 번째였다. 오늘만 세 번째로 매듭을 풀고 다시 묶는 중이었다.
'이번 평가만 넘기면 승진이다.'
책상 위 서류 뭉치가 형광등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종이 냄새와 커피 찌든 냄새가 뒤섞인 방. 창밖으로 여의도 빌딩숲이 뿌옇게 내려다보였다.
맞은편 상담사가 서류를 뒤적였다. 손톱으로 종이 모서리를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강도현 씨, 지난달 협업 평가가 좀 낮게 나왔는데요."
"팀장님이 제출 기한을 어겼습니다. 제 잘못이 아닙니다."
딱딱한 목소리, 미간의 주름.
"근데 강도현 씨, 이게 세 번째예요. 매번 남 탓만 하시면 저희도 곤란한데."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상담사가 한숨을 삼켰다. 펜 끝으로 서류를 톡톡 치더니 뭐라 더 말을 이으려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쿠구구궁—
바닥이 흔들렸다.
책상 위 종이컵이 흔들리며 커피가 흘러넘쳤다. 형광등이 깜빡거리다 꺼졌다. 상담사의 얼굴에 순간 그림자가 덮였다.
창문이 안쪽으로 휘어졌다가,
콰아앙!
벽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먼지가 시야를 뒤덮었다. 눈앞이 하얗게, 그다음엔 회색으로 물들었다.
강도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무릎이 바닥에 닿는 순간 손바닥으로 상담사를 밀쳤다.
"엎드려!"
상담사의 몸이 책상 아래로 굴러들었다. 그 위로 천장 파편이 우르르 쏟아졌다.
먼지 사이로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검은 촉수, 수십 개.
윤기 없는 표면에서 썩은 내가 진동했다. 하수구 냄새와 비린내가 뒤섞인, 코를 찌르는 악취였다.
건물 골조가 촉수에 휘감겨 우드득 소리를 내며 뒤틀렸다. 철근이 엿가락처럼 구부러지는 소리. 콘크리트가 가루로 부서지며 흩날렸다.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터졌다.
"저게 뭐야!"
"살려줘, 살려줘!"
사람들이 계단 쪽으로 밀려들었다. 넥타이 맨 남자가 여자 어깨를 밀치고 앞서 나갔다. 하이힐이 부러진 채 절뚝이며 걷는 여자도 있었다.
강도현도 몸을 일으켜 뛰었다.
'저게 뭐야.'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십 년 넘게 회사원으로 산 인생, 이런 광경은 뉴스에서도 본 적 없었다.
등 뒤에서 콘크리트 덩어리가 쏟아졌다.
쾅!
먼지가 목구멍까지 밀려들었다. 숨이 막혔다. 폐 안쪽이 타는 듯 따가웠다.
기침이 터졌다. 눈물이 났다. 시야가 흐려졌다가 다시 초점이 잡혔다.
복도 끝, 비상계단 입구.
사람들이 몰려서 서로를 밀치고 있었다. 누군가는 넘어졌고, 그 위로 또 누군가가 발을 밟고 지나갔다. 신음이 뒤섞였다.
그 틈에 교복을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창백한 얼굴, 떨리는 두 손.
교복 치마 아래로 무릎이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만큼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소녀의 발 앞에 작은 황금빛 여우 인형 같은 것이 웅크리고 있었다. 털끝 하나하나가 빛을 머금은 듯 은은하게 빛났다.
"학생, 지금 안 나서면 다 죽어! 네가 그거잖아!"
넥타이를 맨 중년 남자가 소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손가락이 소녀의 살을 파고들 만큼 세게 움켜쥐었다.
"빨리 계약해! 뭐 하고 있어!"
"이 아가씨가 마법소녀라잖아! 빨리 안 해!"
주변에서 몇몇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그 손을 떼어내려 하지 않았다.
소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이 하얗게 말라 있었다. 목구멍에서 뭔가 나오려다 막힌 듯, 얕은 숨만 반복해서 내쉬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다. 무릎이 살짝 꺾이는가 싶더니 벽에 손을 짚고 겨우 버텼다.
'저 여우가 마법소녀 마스코트인가.'
강도현의 눈이 그 장면에 고정됐다. 발이 저절로 느려졌다.
촉수 하나가 천장을 뚫고 다시 솟아올랐다. 석고 가루가 눈처럼 흩날리며 떨어졌다.
서서히, 정확하게, 소녀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주변 어른들은 소리만 질렀다.
"학생, 빨리! 우리 다 죽어!"
"뭐 하는 거야, 빨리 안 해!"
아무도 소녀를 감싸지 않았다.
누구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다들 소녀 뒤로, 소녀를 방패처럼 세워둔 채 뒷걸음질만 쳤다.
'저게 사람이 할 짓인가.'
갈비뼈 아래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목덜미까지 뻗어 올라오는 열기였다.
분노인지, 역겨움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다만 손끝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촉수 끝이 채찍처럼 휘어졌다.
소녀의 목덜미를 향해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그 순간 소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입술이 벌어졌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강도현의 다리가 먼저 움직였다.
생각보다 몸이 앞섰다.
무릎을 굽히고, 발끝으로 바닥을 밀어냈다. 신발 밑창이 미끄러운 먼지 위에서 순간 헛돌았다가, 다시 바닥을 붙잡았다.
십 년 넘게 다져온 몸이 기억하는 감각이었다. 대학 시절 유도부에서 몸에 새긴 감각. 넥타이 매고 서류를 뒤적이던 손이 아니라, 몸을 던지던 손.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밑에서 깨진 유리 조각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소녀와 촉수 사이, 그 좁은 틈으로 그가 몸을 던졌다.
"움직이지 마!"
소녀의 눈이 커졌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다 멈췄다.
강도현의 등이 촉수의 궤적 안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시간이 늘어지듯 느려졌다.
먼지 입자 하나하나가 눈에 보일 만큼.
허공에 떠 있는 먼지 알갱이들이 빛을 받아 하나씩 반짝였다. 소리는 뭉개져 웅웅거리는 저음으로만 들렸다.
촉수 끝의 미세한 돌기, 번들거리는 점액.
가까이서 보니 그것은 단순한 살덩어리가 아니었다. 표면에 자잘한 돌기가 촘촘히 박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끈적한 점액이 흘러내렸다. 썩은 내가 코앞까지 진동했다.
'막을 수 있나.'
그의 팔이 반사적으로 올라갔다. 근육이 뻣뻣하게 굳는 느낌, 심장이 갈비뼈를 두들기는 소리가 귓속까지 울렸다.
그 순간, 발치의 황금빛 여우가 눈을 번쩍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