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슬라임 30만 마리 사냥꾼

3화

다음 날부터 나는 평소처럼 3층에 나갔다. 다른 게 있다면, 눈에만 보이는 은발 여자아이가 옆에 붙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던전 3층 입구는 늘 그렇듯 습했다. 벽을 타고 흐르는 물이 바닥에 고여 늪을 이루고, 그 늪 곳곳에서 슬라임들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냄새는 여전히 곰팡이와 젖은 흙이 섞인 그런 냄새였다. 10년을 맡아온 냄새라 이제는 코가 아무 반응도 하지 않는다. "슬라임 열네 번째." 설아가 담담하게 세고 있었다. "핵 회수율 정상. 특이 반응 없음." "넌 왜 그걸 세고 있냐." "데이터 수집입니다." 나는 파이프를 늪 물에 대충 씻으며 말했다. "내가 10년 동안 슬라임을 몇 마리나 잡았는지 알아?" "기록에 접근 가능합니다." 설아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손끝에서 다시 얇은 창이 펼쳐졌다. 파란빛이 옅게 번지다가 숫자로 정리됐다. "강도현, 30대 초중반. 10년간 시스템 보조 없이 완전 수동 조작으로 슬라임 사냥 30만 2천 마리 이상. 이는 협회 통계 기준으로도 독보적인 수치입니다." 숫자로 들으니까 좀 새삼스러웠다. 30만 마리. 매일 100마리씩 잡아도 8년 넘게 걸리는 숫자다. 나는 그걸 실제로 채웠다. 30만 번을 파이프로 내리쳤다는 소리다. 손목이 아직 붙어 있는 게 용하다. "그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설아가 말했다. 처음으로 목소리에 확신이 실렸다. "자율진화 프로토콜은 시스템 경험치를 자원으로 쓰지 않습니다. '완전 수동 전투 데이터의 축적량'을 자원으로 씁니다. 마스터께서는 이미 10년 치의 자원을 보유하고 계셨습니다. 프로토콜이 활성화되던 순간, 그 축적된 데이터가 일괄 전환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뭔 소린지 반쯤 알 것 같았다. 나는 손을 내려다봤다. 겉보기엔 똑같은 손이었다. 물집 자리, 파이프 손잡이에 눌린 굳은살. 남들이 보면 그냥 막노동으로 다져진 손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놈들은 시스템 보조로 편하게 강해지고, 나는 손으로 노가다 뛴 게 오히려 더 좋은 재료였다는 거네." "정확합니다. 다만 자원이 많다고 진화가 저절로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설아가 손가락을 세웠다. "프로토콜은 조건부 발동입니다. 관측된 첫 번째 사례를 기준으로 추정하면, '완전한 집중 상태에서의 정타'가 조건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제 그 청록색 핵 나온 슬라임 때처럼." "예. 마스터께서는 그때 사고에 잠겨 있었고, 동시에 손은 완전히 정확하게 핵을 타격했습니다. 몸과 정신이 완전히 분리된 채로도 완벽한 타격이 나온 순간, 그것이 조건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말은 어려운데 결론은 간단했다. 잡생각 하면서 손이 알아서 움직여야 한다는 소리다. 10년 동안 그렇게 안 산 적이 없어서, 오히려 이게 조건이라는 게 웃겼다. 나는 다음 슬라임을 향해 걸어가며 시험해보기로 했다. 일부러 머릿속을 다른 생각으로 채우고, 손은 그동안 익힌 대로 움직이게 뒀다. 3년 전 박승리 씨가 마지막으로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떠올랐다. 그 사람이 좋아하던 믹스커피 냄새까지 같이 떠올랐다. 별 상관도 없는 기억인데 왜 하필 지금. 퍽. 핵이 갈라졌다. 평범한 회백색이었다. "실패입니다." 설아가 바로 알렸다. "알아. 안 보여도 소리로 알아." 퍽. 퍽. 퍼억. 몇 번을 더 해봤다. 대부분 실패였다. 파이프 끝에 슬라임 점액이 눌어붙어서 한 번은 손이 미끄러지기까지 했다.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넘어졌으면 설아가 또 뭐라고 데이터를 기록했을 거다. '마스터, 균형 상실. 원인 불명.' 같은 식으로. 그러다 열여덯, 아니 열아홉 번째쯤, 스무 번째 정도 되었을 때, 파이프가 슬라임을 때리는 순간 손목에 익숙한 진동이 왔다. 그 진동은 다른 타격들과 조금 달랐다. 손끝에서부터 팔뚝까지 짧게 저리는 느낌. 청록빛이 슬라임 안쪽에서 번쩍였다. "조건 재확인." 설아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직전 3초간 마스터의 정신적 초점은 완전히 외부 사고에 있었습니다. 신체는 무의식 반사로 작동했습니다. 조건이 맞습니다. 이건 '무념의 정타'입니다." "이름 되게 대충 짓네." "임시 명명입니다." "임시라고 해놓고 계속 그렇게 부를 거잖아." 설아는 그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안 하는 것도 나름의 대답이라는 걸 요 며칠 사이 배웠다. 결정체를 주워 손바닥에 올렸다. 어제와 똑같이, 만지는 순간 창이 떠올랐다. [자율진화 소재 확보] [축적치 증가: 미세] "미세라고 뜨는데." "당연합니다. 10년 치 축적을 소모하고 프로토콜이 활성화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처음부터 다시 쌓는 단계입니다." 설아가 말했다. 그러고는 덧붙였다. "다만 마스터의 방식이 유효하다는 게 증명됐습니다. 완전 수동 전투를 계속하십시오. 성실함이 곧 자원입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듬직하게 들렸다. 10년 동안 무시받던 방식이, 이제는 유일한 무기라는 소리로 바뀐 것뿐인데도. 오전 내내 그런 식으로 슬라임을 잡았다. 잡생각을 채워 넣는 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박승리 씨 얼굴로는 오래 버티기 힘들어서, 중간중간 다른 잡생각들을 끌어다 썼다. 오늘 저녁엔 뭘 먹을지, 파이프 손잡이 테이프가 다 닳았는데 언제 새로 감을지, 그런 실없는 것들. 그런데도 설아는 그때마다 성공률을 재고 있었다. "흥미롭습니다." 설아가 창을 펼치며 말했다. "잡념의 종류와 성공률 사이엔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잡념의 '몰입도'가 중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몰입도 높은 잡생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박승리라는 이름을 떠올리셨을 때, 성공률이 유의미하게 상승했습니다." 그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파이프를 다시 늪 물에 씻고, 다음 슬라임을 향해 걸었다. 설아는 더 캐묻지 않았다. 캐묻지 않는 것도, 나름의 배려라는 걸 알 것 같았다. 정오쯤엔 백금급으로 보이는 파티 하나가 3층을 지나갔다. 다들 번쩍이는 장비를 걸치고 있었는데, 나를 힐끔 보고는 자기들끼리 뭐라고 소곤거렸다. 아마 또 그 소리겠지. 저 사람 아직도 여기서 노가다 뛴다고. 신경 쓰지 않기로 한 지 오래다. 신경 안 쓰는 게 아니라, 신경 쓸 힘을 아껴서 다른 데 쓰는 거다. --- 그날 저녁, 나는 소재 자루를 메고 협회 환전 창구로 갔다. 자루가 평소보다 조금 무거웠다. 조건을 맞춘다고 오전보다 더 오래 있었더니 그런 것 같았다. 창구 담당은 늘 그 사람, 윤아영이었다. 검은 머리를 뒤로 묶은 포니테일, 명확한 눈빛. 다른 창구 직원들은 슬라임 소재를 보면 대충 무게만 재고 넘기는데, 이 사람은 항상 하나씩 살펴본다. "오늘도 상급 등급이네요." 윤아영이 핵을 하나 들어 불빛에 비춰봤다. 형광등 아래서 청록빛이 살짝 번졌다가 사라졌다. "강도현 씨 소재는 늘 순도가 좋아요. 정타로만 잡으시니까 그런 거겠죠."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긴요." 윤아영이 웃었다. "이 정도 실력이면 4층, 5층도 충분히 도세요. 왜 자꾸 3층에만 계세요?" 같은 질문을 백금급 파티한테도 들었는데, 이 사람이 물으면 이상하게 짜증이 안 났다. 아마 걱정해서 묻는 거란 걸 알아서 그런 것 같았다. "익숙한 데가 편해서요." 대충 그렇게 답했다. "강도현 씨는 그 말 벌써 3년째 하시는 거 아세요?" 윤아영이 정산 창을 두드리며 말했다. 손가락이 키패드 위를 빠르게 오갔다. "저번 달에도 그러셨고, 그 전 달에도 그러셨어요." "사람이 안 변해서요." "그건 저도 알겠는데." 윤아영이 잠깐 손을 멈추고 나를 봤다. "가끔 그냥, 강도현 씨 실력이 여기서 썩는 게 아까워서요." 썩는다는 말이 좀 걸렸다. 10년을 여기서 보냈으니 썩고도 남았을 거다. 그런데 이젠 사정이 좀 달라졌다는 걸, 이 사람은 아직 모른다. 알려줄 수도 없다. 자율진화니 무념의 정타니 하는 소리를 여기서 하면, 아마 협회 상담실로 끌려갈 거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만 답했다. 윤아영은 더 캐묻지 않고 환전액을 정산해줬다. 화면에 뜬 숫자가 평소보다 조금 높았다. 청록빛 핵이 한 개 섞여 있었던 덕이다. "오늘은 좀 많네요?" 윤아영이 화면을 다시 확인하며 말했다. "운이 좋았나 봅니다." 옆에 서 있던 설아가 나만 들리게 조용히 말했다. "저 직원은 마스터에게 호의적입니다. 협력 관계로 활용도가 높습니다." "사람을 뭔 자원처럼 말하네."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사실이라도 좀 그렇게 말하지 마라." 설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뭔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는데, 그 표정이 하도 인형 같아서 나는 그냥 넘겼다. 이해 못 해도 상관없다. 어차피 시키는 대로 성실히만 하면 되는 거니까. 윤아영이 정산서를 내밀었다. 종이 끝이 살짝 접혀 있었는데, 늘 그렇듯 접힌 부분이 딱 내가 잡기 편한 방향으로 되어 있었다. 이 사람은 그런 작은 것도 신경 쓴다. "강도현 씨." 윤아영이 종이를 건네며 말했다. "혹시 요즘 뭐 좋은 일 있으세요? 표정이 좀 다르셔서요." 표정이 다르다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나는 원래 표정 변화가 별로 없는 편인데, 그런 나도 티가 날 정도면 뭔가 달라지긴 했나 보다. "글쎄요. 딱히요." 나는 어색하게 답했다. "그럼 다행이고요." 윤아영이 웃었다. "좋은 쪽으로 다른 거면 좋겠네요." 그 말이 끝으로, 나는 정산서를 챙기고 창구를 떠났다. 협회 로비를 지나며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을 잠깐 봤다. 딱히 특별해 보이진 않았다. 그냥 늘 보던 그 얼굴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손안의 결정체를 다시 만져봤다. 미세하게 쌓인 축적치. 별거 아니지만, 10년 만에 처음으로 뭔가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노선표를 보는 척하면서, 사실은 손바닥 안의 결정체를 계속 만지고 있었다. 만져도 아무 창은 안 뜬다. 창은 아까 늪에서 다 봤으니까. 그냥 만지는 감촉이 좋았다. 딱딱하고 서늘한, 딱히 특별할 것 없는 감촉인데도 그랬다. "마스터." 설아가 옆에 앉았다. 정류장 벤치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겐 텅 비어 있었을 거다. "내일 계획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똑같지. 3층 가서 잡생각하면서 슬라임 잡는 거." "효율적인 계획입니다." "효율적이라니 그게 뭔 소린지.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건데." "하던 대로 하는 것이 지금은 가장 효율적인 방법입니다." 설아가 담담하게 정정했다. 버스가 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에 올랐다. 설아는 늘 그렇듯 따라 탔다. 요금은 안 낸다. 눈에 안 보이니까 낼 필요도 없다. 창밖으로 협회 건물이 멀어지는 걸 보면서, 나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되짚었다. 청록빛 핵, 미세한 축적치, 윤아영의 웃음, 백금급 파티의 소곤거림. 별것 아닌 하루였는데, 별것 아닌 하루치고는 좀 길게 느껴졌다. 그 느낌이 오래갈 리 없다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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