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슬라임 30만 마리 사냥꾼

1화

던전 3층 습지 구역에는 슬라임만 나온다. 그래서 나는 3층만 판다. 다른 탐색자들은 여길 쳐다도 안 본다. 경험치도 낮고, 드롭도 시원찮고,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나도 안다. 알고 있다. 하지만 10년째 이러고 산 사람한테 재미 타령은 사치다. 철파이프를 고쳐 잡았다. 손잡이 부분 테이프가 또 풀려서 아침에 새로 감았는데 벌써 끈적함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것도 조만간 새로 사야 한다. 다이소에서 파는 3천 원짜리로는 이제 한 달도 못 버틴다. 원래 5천 원짜리를 썼는데 최근에 재고가 없다는 걸 지난주에야 알았다. 이런 것도 하나하나 신경 쓸 일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슬라임 한 마리가 늪 표면 위로 몸을 부풀리며 다가왔다. 나는 무릎을 살짝 굽히고 파이프를 수평으로 당겼다. 퍽. 한 번에 핵을 정확히 때리면 슬라임은 갈라지듯 터진다. 시스템 보조를 켠 놈들은 조준선이 자동으로 잡아주니까 대충 후려쳐도 맞는다. 나는 그런 거 없다. 10년 동안 눈으로 보고, 손목으로 느껴서, 몸으로 외웠다. 슬라임이 부풀어 오르는 속도, 핵이 흔들리는 미세한 진폭, 늪물이 튀는 방향까지도 이제는 소리만 듣고 안다. 손끝이 오차를 줄이는 것도 습관이다. 슬라임이 남긴 핵을 주머니에 담았다. 오늘 아홉 번째였다. 목표는 열다섯. 해가 지기 전까지는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계를 봤다. 오후 세 시. 습지 구역은 해가 지면 시야가 나빠져서 위험 등급이 한 단계 올라간다. 정확히는 조명 시스템도 시스템 보조에 연동돼 있어서, 나 같은 무보조 탐색자한테는 해 진 뒤가 그냥 암전이다. 어두워지기 전에 목표치를 채우고 나가는 게 원칙이었다. "어이, 강도현 씨."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니 3층 입구 쪽에서 낯익은 얼굴 몇이 서 있었다. 백금급 파티였다. 방금 게이트를 열고 들어온 모양인데, 장비가 번쩍번쩍했다. 갑옷에 새겨진 문양만 봐도 어느 길드 소속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팀이었다. 다들 시스템 보조창을 눈앞에 띄운 채였다. 파란 홀로그램이 눈동자 위로 겹쳐 보이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아직도 여기서 슬라임 잡으세요?" 파티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비웃음은 아니었다. 그냥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얼굴이었다. 그게 더 별로였다. "소재가 좋아서요." 나는 짧게 답했다. 속으로는 다른 말이 먼저 나왔다. 소재가 좋은 게 아니라 여기밖에 갈 데가 없는 거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낼 필요는 없었다. "10년 하셨다고 들었는데, 그 정도면 던전 심층 가셔도 되잖아요. 왜 안 가세요?" 파티원 중 한 명이 옆에서 거들었다. "그러니까요, 형님. 요즘 4층 밑으로 내려가면 드롭률 진짜 미쳤는데." 대답 안 했다. 이럴 때는 대답을 안 하는 게 제일 빠르다. 굳이 설명해봤자 저들은 이해 못 한다. 시스템 보조 없이 4층 밑으로 내려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저들은 상상도 안 해봤을 거다. 남자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파티를 이끌고 더 깊은 층으로 내려갔다. 다들 웃으면서 걸어가는 뒷모습이 정말 산책 나온 사람들 같았다. 시스템 보조 없이 저기까지 가면 3분 안에 뼈도 못 추릴 곳인데, 저들한테는 그냥 산책로다. 격차라는 게 그렇다. 노력으로 좁혀지지 않는 구간이 분명히 있다. 3년 전까지는 나도 저 정도는 우습게 여겼다. 아니, 정확히는 저 정도를 우습게 여기던 사람 옆에 붙어 있었다. 박승리 씨. 이름을 속으로 부르는 것만으로도 명치가 뻣뻣해졌다. 다이아급이었다. 아무 시스템 창도 없이도 다이아급 몬스터를 손으로 상대하던 사람이었다. 나한테 파이프 쥐는 법을 알려준 것도 그였다. 처음 던전에 들어갔을 때 나는 손목이 후들거려서 파이프도 제대로 못 들었다. 그때 그가 뒤에서 손을 잡고 자세를 고쳐줬다. 어깨는 낮추고, 팔은 곧게, 무릎은 살짝. 그 순서를 지금도 몸이 기억한다. "시스템은 도구야. 도구에 목숨을 걸면 도구가 없어지는 순간 니 목숨도 끝나는 거다." 그 말을 하던 표정까지 아직 기억한다. 무심한 얼굴로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도, 눈빛만은 진지했었다. 3년 전, 그 말을 한 사람이 정작 자기 시스템이 무력화된 순간에 죽었다.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지, 그냥 운이 없었다고 해야 할지 아직도 결론을 못 냈다. 결론을 내야 할 필요도 없다는 걸 3년째 배우고 있다.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생각을 접고 다시 늪을 훑었다. 슬라임 두 마리가 더 눈에 들어왔다. 나는 파이프를 고쳐 잡고 걸음을 옮겼다. 늪물이 발목까지 차올라서 걸을 때마다 질퍽하는 소리가 났다. 방수 장화도 3년째 같은 걸 신고 있는데, 밑창이 슬슬 닳아서 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것도 사야 하는데. 사야 할 게 너무 많다. 열 번째, 열한 번째. 몸이 기억하는 동작이라 머리는 다른 데 가 있어도 손은 정확했다. 퍽, 퍽. 소리마저 익숙해서 이제는 리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슬라임이 터질 때 나는 물비린내도, 핵이 손바닥에 닿는 서늘한 감촉도 다 몸에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열두 번째 슬라임을 때린 순간, 뭔가 달랐다. 핵이 갈라지는 소리 대신, 낮게 웅웅거리는 진동이 파이프를 타고 손목까지 올라왔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마치 파이프 안에 작은 벌이 갇혀서 날개를 떠는 것 같은, 미세하고 불쾌한 떨림. 슬라임 몸속에서 뭔가 반짝였다. 보통 슬라임 핵은 회백색인데, 이건 옅은 청록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색이었다. 10년 동안 별별 슬라임을 다 봤다. 색깔이 조금씩 다른 놈들도 있었고, 크기가 유난히 큰 놈도 있었다. 하지만 저런 청록색은 한 번도 없었다. 도감에서도 본 적 없는 색이었다. 나는 파이프 끝으로 슬라임 잔해를 조심스럽게 뒤졌다. 손끝으로 직접 만지기 전에 먼저 눈으로 확인하는 습관은 3년 전부터 생겼다. 뭐든 확인 안 하고 손 넣으면 큰일 난다는 걸, 그때 배웠다. 핵 대신, 손톱만 한 결정체가 굴러 나왔다. 표면에 미세한 균열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만지자 손끝이 저릿했다. 전기가 통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순간 손을 뗄까 했는데, 이미 손끝은 결정체 표면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 순간 눈앞에 낯선 창이 떠올랐다. [미확인 개체 반응 감지] [자율진화 프로토콜 — 접근 가능] 글자가 파란빛으로 눈앞에 둥둥 떴다. 시스템 보조를 쓰는 놈들이 늘 보던 그 홀로그램이었다. 10년 동안 시스템 창 한 번 안 띄우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 원한 적도 없는 창이 눈앞에 떠 있었다. 손이 멈췄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다. 좋은 신호인지 나쁜 신호인지도 모르겠는데, 몸은 벌써 알고 있다는 듯 굳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늪은 여전히 조용했다. 다른 슬라임들이 저 멀리서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고, 백금급 파티가 내려간 통로 쪽에서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 나 혼자였다. 이거, 건드리면 안 될 것 같다. 박승리 씨가 살아 있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아마 파이프로 내 손등을 후려치면서 "그거 당장 버려"라고 했을 거다. 그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손가락을 뻗고 있었다. [자율진화 프로토콜 — 접근 가능] 글자가 다시 한 번 깜빡였다. 마치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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