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20미터 백룡이 된 사원

3화

그날 밤은 사당 뒷마당에서 보냈다. 박도현이 편의점에서 사온 삼각김밥 열 몇 개와 컵라면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태워버릴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원망과 걱정과 계산이 삼분의 일씩 섞여 있었다. 문제는 내 위장이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삼각김밥 열 개를 통째로 삼켜도 배가 부른 느낌이 없었다. 삼각김밥을 씹는다는 표현도 사실 정확하지 않았다. 그냥 목구멍으로 들어가는 순간 존재가 사라졌다. 마치 우주의 블랙홀에 던진 것처럼, 삼각김밥은 흔적도 없이 소멸했다. 박도현은 그 광경을 보며 뒷걸음질쳤다. "이거 뭐야, 이거 뭐야. 위가 아니라 무슨 소각장이야?" "저도 몰라요. 배가 안 차요." "열 개째인데?" "열한 개째예요." 박도현이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가 편의점을 세 번쯤 왕복하고 나서야 겨우 배가 찼다. 정확히는 배가 찼다고 느껴지는 어떤 감각의 임계점에 도달했다. 그의 카드값이 얼마나 나왔을지, 나는 굳이 묻지 않았다. 대신 그가 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긁을 때마다 점원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을 거라는 상상만 조용히 했다. "당주 어른, 이거 다 사비로 사시는 겁니까?" 내가 마침내 사람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을 때 던진 첫 질문이었다. 정확히는 몸이 조금씩 줄어들면서, 짐승의 울음소리 사이에 사람 말이 섞여 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처음엔 으어어, 하는 소리 뒤에 어… 이거… 하는 단어가 붙었고, 그다음엔 문장 절반이 짐승 소리였다가 절반이 사람 말이었다. 박도현은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몇 번이나 소름이 돋은 팔을 문질렀다고 나중에 고백했다. 설연은 그것을 두고 "용맥이 안정을 찾아가는 증거"라고 짧게 설명했다. "안정을 찾는 건 좋은데, 왜 하필 제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거죠?" "몸의 주인이 너니까." "저 아직 용인데요." "용도 목소리는 있다." 설연의 대답은 늘 그런 식이었다. 짧고, 단정하고, 반박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박도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 사당, 지금 신도가 몇 명인지 아나? 없어. 하나도 없어. 조부 때는 인근 마을 사람들이 다 여기 와서 치성을 드렸는데, 지금은 다들 아파트로 이사가고 절이며 교회로 옮겨갔지. 그런데도 이 사당을 못 버리는 이유가 있어." "그 이유가……" "설연님이시지." 박도현은 그 말을 하며 사당 쪽을 흘긋 바라보았다. 목소리에 두려움과 존경이 반쯤씩 섞여 있었다. 자신의 조부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이 있었다고 했다. "이 사당을 지켜라. 여우신께서 언젠가 이곳으로 돌아올 이를 기다리신다." 박도현은 그 말을 삼십 년 넘게 지켜왔다. 신도가 없어도, 지원금이 끊겨도, 자기 벌이로 사당 지붕을 고치면서. 그는 대학도 안 가고 이 산 아래 눌러앉았다. 친구들은 도시로 나가 회사를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박도현은 매달 첫날 사당 마당을 쓸고, 매달 열닷새 사당 지붕 기와를 살피고, 매년 겨울 눈이 오면 새벽에 나와 마당을 치웠다. 조부의 유언 한 줄이 그의 인생 전체를 붙잡아 놓은 셈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두고 "사당집 도현이, 아직도 거기 있대"라며 안부 대신 안타까움을 전했다. 세상이 알아보지 못한 헌신의 정체가, 하필이면 백룡을 기다리는 일이었을 줄이야. 설연은 그 대화를 멀찍이서 듣고 있었다. 마당 한쪽 돌 위에 앉아 꼬리 아홉 갈래를 부채처럼 펼친 채였다. 달빛이 그 꼬리 끝마다 은은하게 반사되어, 마당 전체가 희미한 은빛으로 물들어 보였다. 나는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이내 내가 지금 감탄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다가가 물었다. "저를 기다렸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설연은 잠시 침묵했다. 붉은 눈이 달빛을 받아 더 짙어 보였다. "오래전, 이 사당에는 백룡이 살았다." 그 말이 시작이었다. "백룡은 이 산의 수맥을 지키던 존재였고, 나는 산 아래 마을을 떠돌던 어린 여우였지. 사냥꾼의 화살에 맞아 죽어가던 나를 백룡이 구했다. 자신의 기운을 나눠주면서. 그 대가로 백룡은 힘을 크게 잃었고, 결국 오랜 세월 뒤 스스로 사라졌다. 나는 그 은혜를 갚지 못한 채 이곳에 좌정했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네 몸이 백룡의 그릇을 물려받았으니까." "그릇이요? 그럼 저는 그냥… 그릇이었던 겁니까?" "그릇도 중요하다. 술도 그릇이 없으면 담을 수 없지." "위로가 안 되는데요." 설연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짐승의 감각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더 있었다. 다만 지금 말하지 않기로 정한 뭔가가. 설연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는데, 그 흔들림이 무엇을 감추기 위한 것인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박도현 역시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는 사당 경영 문제를 웃으며 넘겼지만, 편의점 알바 시급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부채가 있다는 걸 나는 나중에야 알게 됐다. 사당 명의로 대출을 받은 게 이미 몇 년 전이었고, 이번 겨울이 지나면 담보로 잡힌 사당 부지가 넘어갈 위기였다. 그가 굳이 나를 쫓아내지 않고 삼각김밥을 사다 먹인 이유에는, 어쩌면 이 기묘한 사건이 사당을 살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조금은 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날 밤 그는 삼각김밥 봉지를 정리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백룡의 그릇이라니, 이거 잘만 풀리면 사당 복원 사업이라도 받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는 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도 내가 들었다는 걸 알면서 못 들은 척했다. 인간이 그럴 때가 있다. 선의와 계산이 한 몸에서 자란다. 나는 그 밤, 사당 마당에 누워 하늘을 보며 내 이야기를 조금 꺼냈다. 합기유술을 배운 이유, 물류회사에서 일하며 새벽마다 도장에 다닌 이유, 여동생 강하나와 단둘이 살아온 사정.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남매끼리 서로를 의지하며 컸다는 이야기까지. 강하나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내가 야근과 도장을 오가며 생활비를 벌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별거 아닌 얘기였는데도 입 밖으로 꺼내니 생각보다 길었다. 설연은 무심하게 듣는 척했지만, 꼬리 끝이 살짝 흔들리는 걸 보면 완전히 무관심한 것도 아니었다. "강하나라는 그 여동생은, 지금 오라비가 용이 됐다는 걸 알면 뭐라 하겠느냐." "기절할걸요." "기절하고 나서는?" "택배로 뭐 보내달라고 할 것 같은데요. 용 비늘 같은 거." 박도현이 옆에서 픽 웃었다. 설연은 웃지 않았지만, 그 붉은 눈이 살짝 가늘어진 걸 보면 재미있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흐름을 다루는 재주가 있었다더니, 그게 정말이었군." 설연이 처음으로 나를 인정하는 듯한 말을 했다. "용의 몸을 하고도 공중에서 균형을 잡은 건, 짐승의 본능이 아니라 인간의 수련 덕분이었다. 아까 그 짧은 시간에 몸의 중심축을 찾다니, 재능이 없다곤 못하겠구나." "그게, 도장에서 사범님이 늘 그렇게 가르쳐서요. 무게중심 낮추고, 시선 고정하고, 호흡 맞추고." "몸에 새겨진 습관이 짐승의 육체까지 지배한다는 거지. 흥미롭군." "흥미롭다는 게, 좋은 뜻입니까?" "관찰할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칭찬 같기도 하고 관찰 같기도 한 그 말에, 나는 왠지 조금 뿌듯해졌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괴물이 됐다는 사실보다 그 사실이 더 크게 느껴졌다. 스스로도 어이없었다. 몸은 여전히 짐승의 형태에서 절반쯤 벗어나지 못했는데, 마음은 도장에서 초록띠를 딸 때처럼 들썩거리고 있었으니까. "그럼 저는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겁니까?" "방법은 있다." 설연이 짧게 답했다. "인간화 술법이라는 게 있다. 다만 백룡의 그릇을 인간의 그릇으로 되돌리는 일이니, 하루아침에 되진 않아. 최소 몇 주는 걸릴 것이고, 그동안 너는 이 사당에 머물러야 한다." "몇 주요……. 회사는 어떡하고요." "회사 걱정을 하는 게 지금 상황에 맞는지는 모르겠구나." "그래도 저 이번 달 대리 승진 심사 있어요." "용이 승진 심사를 신경 쓰는 것도 처음 본다." 설연이 신기하다는 듯 나를 훑어봤다. 나는 억울했다. 인간이었을 땐 승진 심사가 인생의 절반이었는데, 용이 된 지금도 그게 마음에 걸리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박도현이 옆에서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그, 대신에 조건이 하나 있네. 인간으로 돌아온 뒤에는, 당분간 이 사당 일을 좀 도와주게. 사당 관리며 잡일이며." "봉사요?" "봉사라고 하기엔 좀 험한 일들이 있지. 지붕 수리, 마당 정리, 겨울엔 눈 치우기, 여름엔 잡초 뽑기……" "그게 조건입니까?" "공짜로 인간이 되는 게 세상에 어디 있나." 박도현이 진지하게 말했다. 그 말투가 어찌나 근엄했는지, 나는 잠깐 그가 무슨 도사님처럼 보였다. 그 다음 이어진 말이 분위기를 확 깨뜨렸다. "참고로 식비는 자네 몫으로 정산할 거야. 아까 그 삼각김밥값만 벌써 오만 원 넘었어." "오만 원이요?" "영수증 보여줄까?" 박도현이 정말로 주머니에서 영수증을 꺼내 흔들었다. 편의점 로고가 선명하게 박힌 영수증에는 삼각김밥과 컵라면, 생수, 심지어 핫바까지 빽빽하게 찍혀 있었다. 그 밑으로 합계 오만 삼천이백 원이라는 숫자가 선명했다. 순간 나는 웃음이 터졌다. 세상이 무너진 하루였는데, 결국은 편의점 영수증 얘기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용이 된 첫날, 인류 역사에 없던 사건의 주인공이 됐는데, 그 결말은 삼각김밥 값 정산이라니. 설연이 그런 나를 흘기며 짧게 한마디 던졌다. "인간이란 참, 어이없는 순간에 웃는 재주가 있구나." "안 웃으면 울어야 하는데, 울긴 싫어서요." "그것도 재주다." 박도현은 영수증을 소중하게 접어 지갑에 넣으며 중얼거렸다. "나중에 진짜로 청구할 거야. 잊지 마." "당주님, 그 와중에 정산은 확실하시네요." "사람이 아무리 신기한 일을 겪어도, 통장은 신기한 일을 안 봐줘." 그 말에는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설연은 그 대화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지켜봤다. 아마 수백 년을 산 여우신의 눈에는, 인간이 삼각김밥 값 오만 원을 두고 저렇게 진지하게 실랑이하는 모습이 신기한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그 밤, 나는 처음으로 이 상황이 재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당 마당에 누워 별을 보고, 옆에서 여우신이 꼬리를 살랑이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당주가 영수증을 세고 있는 이 풍경이, 이상하게도 나쁘지 않았다. 몸은 짐승이었지만 마음은 오랜만에 편했다. 어쩌면 나는 이 기묘한 사건을 통해 뭔가 새로운 걸 얻을 수도 있겠다는, 아주 조심스러운 기대까지 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얼마나 짧게 끝날지는,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내 휴대폰이 아직 살아있다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간밤에 벗어놓은 셔츠 주머니 속에서, 액정이 산산조각 난 채로도 진동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 스물세 통, 문자 메시지 마흔일곱 개가 쌓여 있었다. 발신자는 전부 하나였다. 강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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