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죽어도 괴물은 조종하겠습니다

5화

숫자가 정확히 찍혔다. [MP: 12/12] [신규 스킬 습득: 암흑마법(DARK MAGIC) - 봉인 해제] 선택할 겨를이 없었다. 창이 떠오르는 동시에, 뭔가 몸 안쪽 — 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있다면 — 에서부터 서늘한 게 차올랐다. 마치 냉장고 문을 연 순간의 냄새 없는 냉기 같은. 살갗이 없는데도 소름이 돋는 감각이었다. 이상했다. 죽은 몸에 감각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물어본 적 없는데."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억지로라도 웃으려는 습관이었다. 겁이 나면 농담을 하는 게, 살면서 유일하게 잘한 짓이었다. 대학 때도 그랬다. 조별 발표 직전에 손이 떨리면 꼭 헛소리를 한 마디 던졌다. 지금 와서 보면 그게 무슨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숨은 쉬어졌다. 빙의. 암흑마법. MP 12. HP는 여전히 0/10. 죽은 채로 표시된 숫자. 나는 그 숫자들을 다시 읽으면서, 이게 나한테 주어진 전부라는 걸 깨달았다. 선택지가 아니었다. 이미 결정된 카드였다. 마치 게임 시작 화면에서 캐릭터 창을 열었는데, 이미 스탯이 다 찍혀 있고 리롤 버튼만 없는 상황. 죽음이라는 초기 옵션을 고른 적도 없는데, 그게 기본값으로 박혀 있었다. 두 번째 흑수리는 이제 회사원과 노인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느릿느릿, 사냥하는 짐승의 걸음으로. 발톱이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 다각. 다각. 규칙적인 그 소리가 심장을 대신해서 뛰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그쪽으로 몸을 던졌다. 이번엔 튕기지 않았다. 대신 시야가 통째로 바뀌었다. 검은 세상. 붉게 물든 시야. 낮고 넓은 시선. 짐승의 눈으로 광장을 보고 있었다. 색이 이상했다. 사람의 눈으로 보던 광장이 아니었다. 온도의 차이가 색으로 번져 보였다. 뜨거운 것은 붉었고, 차가운 것은 푸른 기가 돌았다. 회사원과 노인은 붉은 얼룩처럼 웅크려 있었고, 죽은 흑수리의 사체는 이미 푸르게 식어가고 있었다. 순간 온몸이 굳었다. 눈앞에, 아까 그 장면이 그대로 있었다. 나 자신이, 소은을 감싼 채 서 있는 모습. 흑수리의 이빨이 목덜미로 향하던 그 순간. 나는 그 장면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짐승의 몸인데도, 마치 그때 그 순간에 갇힌 것처럼. 시간이 거기서 한 번 끊어졌다가, 지금 다시 이어붙은 느낌. 이빨이 파고들던 감각이 아직도 목덜미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 목을 움츠렸다. "움직여." 스스로에게 명령했다. 대답이 없었다. "움직이라고. 좀." 한 번 더 말해도 소용없었다. 몸이라는 게, 명령을 듣는 구조로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건 내 몸이 아니었다. 빌려 쓰는 몸. 세입자가 집주인한테 소리쳐봐야 벽이 대답할 리 없었다. 그 순간 시야 아래쪽 숫자가 줄어드는 게 보였다. MP 12에서 9로. 뭘 한 것도 없는데, 그냥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숫자가 갈려나가고 있었다. "이게 맞나." 짐승의 몸을 빌려서, 짐승의 시선으로 사람을 구한다는 것. 이게 맞는 방법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확신은 애초에 사치였다. 시간이 없었다. MP가 3씩 뭉텅뭉텅 사라지는 이 속도라면, 이대로 서 있기만 해도 4분이면 바닥이었다. 계산이 그렇게 나왔는데도 다리가 여전히 남의 것처럼 뻑뻑했다. 무릎 꿇은 회사원이 눈을 들었다. 그 시선이 짐승 — 지금은 나 — 을 정면으로 마주쳤다. 겁에 질린 눈. 하지만 도망치지 않고, 노인을 등 뒤로 감싸고 있었다. 넥타이가 반쯤 풀린 채 목에 걸려 있었고, 손등에는 긁힌 상처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손은 노인의 어깨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에 뭔가 걸렸다. 소은을 감쌌던 내 모습과 겹쳤다. 지키려는 사람은, 도망치는 게 아니라 자리를 지킨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짐승의 눈으로 보는데도 사람의 감정이 그대로 뚫고 들어왔다. 눈물이 나지도 않을 몸인데, 뭔가가 울컥 올라왔다가 그대로 명치쯤에 걸렸다. 나는 짐승의 다리를 움직였다. 조금씩, 뻑뻑하게. 마치 얼어붙은 관절을 억지로 펴는 것처럼.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발톱이 바닥에 닿는 감각이 처음엔 낯설었다가, 두 번째 걸음부터는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 신지 않던 신발에 발을 억지로 끼워 넣는 기분. MP 숫자가 9에서 7로 떨어졌다. 의지를 다잡았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었다. 짐승 몸 안에서 진짜 흑수리의 본능이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사냥하고 싶다는, 먹이를 물어뜯고 싶다는 충동이 내 것과 뒤섞였다. 회사원의 목덜미를 보는 순간, 침샘 같은 게 아니라 훨씬 더 깊은 곳에서 뭔가가 꿀렁, 반응했다. 저게 먹잇감이다. 저게 사냥감이다. 그런 신호가 뇌를 건너뛰고 몸에 바로 박혔다. '아니야.' 나는 그 신호를 억지로 밀어냈다. 사람이라고. 저건 먹잇감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도, 짐승의 본능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마치 둘이 같은 운전대를 붙잡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핸들을 꺾는 느낌이었다. 버텨야 했다. HP 10, MP 12. 이 숫자 안에서 뭔가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걸 몸으로 느꼈다. 숫자가 다 닳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건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이미 한 번 죽어봐서 알 것 같기도 했다. HP 0. 그 감각은 아직 몸 어딘가에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시야 한 귀퉁이에서 뭔가 움직였다. 광장 뒤편,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지하철 출구 계단 쪽. 검은 형체 하나가, 아주 천천히, 아주 조용히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처음엔 사람인가 싶었다. 어깨의 실루엣이 사람처럼 곧았다. 그러나 계단 위로 완전히 올라선 순간, 형체가 접혀 있던 날개를 살짝 펴는 게 보였다. 사람이 아니었다. 세 번째였다. 다른 두 마리와 달리, 이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발톱이 계단을 긁는 소리조차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숨어서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놈은 계단 그늘 속에서 이 모든 소란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목덜미의 털이 — 짐승의 것인지 내 것인지도 모를 감각이 — 곤두섰다. 뭔가 잘못됐다는 감이었다. 앞선 두 마리는 그저 사냥을 하러 나온 짐승처럼 보였다. 이건 달랐다. 걸음걸이에, 고개를 돌리는 방식에, 심지어 그 침묵에까지 뭔가 계산된 느낌이 배어 있었다. 나는 짐승의 눈으로 그걸 보면서도, MP가 얼마나 남았는지 계산할 여유조차 없었다. 하나를 붙잡고 있는 지금, 또 하나가 늘어난다는 뜻이었다. 새 흑수리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광장을 훑었다. 그 시선이 회사원과 노인을 지나쳤다. 나를, 아니 지금 내가 빌려 쓰고 있는 이 검은 짐승의 몸을 지나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은이 쓰러져 있는 자리에서 멈췄다. 숨이 — 짐승의 숨이라 해도 — 턱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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