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무릇 세상의 무리 짓는 법이란, 강한 자를 중심으로 뭉치고 약한 자를 자연스레 밀어내는 것이니, 본좌는 그날 그 이치를 뼈저리게 체득했었느니라. 약육강식*이라 하였던가, 그 옛말이 어찌 이리도 현세에 정확히 들어맞을꼬.
*약육강식(弱肉强食):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먹힌다는 뜻으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이치를 이르는 말.
사흘 뒤, 성진과 준혁 그리고 몇몇 낯익은 얼굴들이 학교 앞 카페에 모였다. 본좌도 초대를 받아 자리했으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그 자리의 공기는 심상치 않았다. 다들 이미 자리에 앉아 태블릿과 종이 뭉치를 펼쳐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논하고 있었는데, 본좌가 들어서자 잠시 대화가 끊겼다가 다시 이어지는 그 미묘한 박자, 이는 곧 환영받지 못하는 자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였다.
"어, 태민이도 왔네."
준혁이 짧게 인사를 건네고는 다시 태블릿을 들여다보았다. 본좌는 빈자리에 앉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것이 바로 문전박대*까지는 아니나, 그 전조라 할 수 있으리라.'
*문전박대(門前薄待): 문 앞에서 쫓아내듯 인정 없이 대함을 이르는 말.
"자, 그럼 공략팀 구성 얘기 좀 해보자."
성진이 태블릿을 꺼내 화면을 켰다. 화면에는 이미 팀원 배치도가 그려져 있었다. 탱커, 딜러, 힐러, 버퍼. 색깔별로 구분된 원과 화살표, 그리고 그 어디에도 본좌의 이름은 없었다.
본좌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도표를 살폈다. 흡사 진법도*와도 같은 형상이었으나, 그 진법 안에 본좌가 설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진법도(陣法圖): 병사나 무인들의 배치를 그린 그림으로, 여기서는 공략 팀의 역할 배치도를 이른다.
"준혁이 궁수, 나 검사, 지은이는 조리로 버프딜러, 그리고 민수는 방어형 스킬이니까 탱커..."
성진의 손가락이 도표 위를 짚어 내려갔다. 하나씩 이름이 불릴 때마다 본좌의 심장은 미묘하게 조여들었다. 마지막 이름이 불리고도 본좌의 순서는 오지 않았다.
본좌는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마치 서당에서 훈장 앞에 질문하는 학동*처럼.
*학동(學童): 글방에서 공부하는 어린아이.
"본좌는… 아니, 나는 어느 자리에 있느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카페 안의 잔잔한 음악 소리마저 유독 크게 들리는 듯했다. 성진이 미안한 듯 뒷머리를 긁었다.
"태민아, 그게… 캠프 설영이잖아. 던전 안에서는 딱히 쓸 데가 없어서."
"베이스캠프는 지상에서만 필요하고, 우리는 당일 클리어 목표라서."
준혁이 덧붙였다. 말투에 미안함은 담겨 있었으나 결론은 명확했다. 본좌는 이 자리에 필요하지 않다는 것.
"그래도 야영 스킬이면 뭔가 회복 버프 같은 건 있지 않아?"
민수가 슬쩍 물었다. 처음으로 본좌 편을 들어주는가 싶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으나, 곧이어 이어진 말이 그 기대를 무참히 꺾어버렸다.
"근데 그거 아무리 좋아도 지상에서만 쓸 수 있는 거잖아. 던전 안 클리어에는 의미가 없지."
지은이 작게 항의했다.
"그래도 태민이도 껴주면 안 돼? 나중에 도움 될 수도 있잖아."
"지은아, 이건 목숨 걸고 하는 거잖아. 감정으로 할 수 없어."
성진의 대답은 냉정했다. 그 짧은 한마디에 카페 안의 온도가 한층 더 낮아진 듯했다. 본좌는 속으로 이 상황을 곱씹었다.
'과연 이것이 토사구팽*이라는 것이던가.'
*토사구팽(兎死狗烹):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하던 개를 삶아 먹는다는 뜻으로, 쓸모가 없어지면 버림받음을 이르는 말.
'허나 본좌는 아직 토끼를 잡은 적조차 없거늘, 어찌 개조차 되지 못하고 이리 쫓겨나는가.'
본좌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으니라. 본좌는… 아니, 나는 먼저 가보겠다."
카페 문을 나서는 등 뒤로 지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본좌는 돌아보지 않았다.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느꼈으나 급히 말려버렸다. 이는 결코 눈물이 아니었다. 그저 바람이 매웠을 뿐이었다. 카페 문에 달린 종이 짤랑 울리며 본좌의 등 뒤에서 닫혔고, 그 소리마저 마치 세상이 본좌를 향해 문을 걸어 잠그는 듯한 소리로 들렸다.
거리를 걸으며 본좌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었으나, 본좌의 마음속에는 먹구름이 가득했다.
'천하제일이었던 본좌가, 어찌 이런 처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허나 이는 잠시의 굴욕일 뿐, 본좌는 반드시 다시 일어서리라.'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자취방으로 돌아온 본좌는 신발을 벗어 던지듯 벗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천장을 바라보며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창밖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만이 이 방의 침묵과 대비되어 더욱 서글프게 들렸다.
'참으로 굴욕적인 처지로다.'
'본좌가 한때 무림을 호령하던 시절에는, 그 누구도 감히 본좌를 무시하지 못했었느니라. 그런데 이제는 던전 클리어 팀에도 끼워주지 않는 신세라니.'
하지만 본좌는 천하제일이었던 자,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상태창을 열었다.
『캠프 설영: 야영지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본좌는 이 문구를 몇 번이고 되읽었다. 겉보기에는 참으로 하찮은 재주로 보였으나, 세상 만물에는 저마다의 이치가 숨어 있는 법. 본좌는 방 한복판에 이 스킬을 시전해보기로 결심했다. 손끝에서 다시 그 희미한 빛이 일었다.
"설영."
짧게 되뇌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방 한구석에서 빛이 응축되더니, 순식간에 작은 텐트 하나가 세워졌다. 아무런 재료도 없이, 그저 허공에서 물질이 짜여 나온 것이었다. 좁은 자취방의 절반가량을 차지할 정도의 크기였으나, 이상하게도 방이 좁아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인가.'
본좌는 조심스레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바깥보다 훨씬 널찍하게 느껴졌으며, 은은한 온기가 온몸을 감쌌다. 순간 온몸의 피로가 씻겨나가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캠프 효과: 체력 회복 속도 200% 증가.』
『캠프 효과: 정신력 안정 효과 발생.』
알림이 연달아 떠올랐다. 본좌는 눈을 크게 떴다. 이는 결코 하찮은 재주가 아니었다.
'…이는 어쩌면, 심상치 않은 힘이로다.'
텐트 안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지고, 방금 전까지의 굴욕과 서러움조차 서서히 가라앉았다. 카페에서 겪었던 그 냉대와 도표 위에 존재하지 않던 본좌의 이름마저, 이 텐트 안에서는 아득한 옛일처럼 멀게 느껴졌다. 심지어 조금 배가 고파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회복력이 극도로 활성화되고 있다는 증거였다.
'참으로 신묘한 재주로다. 이는 필시 은거기인*의 비전에 비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은거기인(隱居奇人): 세상을 피해 숨어 살며 남다른 재주를 지닌 사람.
본좌는 텐트에서 나와 다시 상태창을 확인했다.
『캠프 설영 Lv.1 → Lv.2』
『신규 효과 해금: 소규모 결계 형성.』
'결계라니?'
본좌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야영 재주가 아니라, 무언가 더 깊은 이치를 품은 힘일 가능성이 있었다. 어쩌면 지상에서만 쓸모없다 여겼던 이 재주가, 실은 세상이 아직 알지 못하는 절정의 무공*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무공(武功): 무술의 공적, 혹은 무술 그 자체를 이르는 말.
본좌는 다시 손을 들어 텐트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한 번 더 시전해보리라."
그 순간, 창밖에서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착각인가 싶었으나, 소리는 점점 커지며 거리 전체를 뒤흔들었다. 본좌는 텐트를 향해 뻗었던 손을 멈추고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려다보니, 거리의 사람들이 저마다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치고 있었다. 자동차들이 멈춰 서고, 사람들은 발걸음을 멈춘 채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저기 뭐야?! 균열이잖아!"
"미친, 도심에서 게이트가 왜 열려!"
누군가는 손바닥만 한 요망한 기계*를 꺼내 하늘을 향해 겨누고 있었고, 또 누군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손바닥만 한 요망한 기계: 스마트폰을 이르는 본좌 나름의 명칭.
하늘 한복판에 검은 균열이 서서히 벌어지고 있었다. 마치 하늘의 살가죽이 갈라지듯, 그 틈으로 검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본좌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손끝이 저리는 것을 느꼈다.
'…이는 심상치 않은 조짐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