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전 인류가 동시에 그 목소리를 들었던 그날, 본좌는 마침내 두 번째 업(業)의 서막이 열렸음을 직감했었느니라. 하늘이 갈라지고 낯선 세계로 떨어진 지 이미 스무 해가 훌쩍 넘었건만, 그날 밤에야 비로소 본좌는 이 세계가 본좌를 완전히 놓아주지 않았음을 깨달았도다.
삑- 삑- 삐빅-
라면 냄비가 넘치는 소리와 함께, 세상 모든 것이 얼어붙은 듯 멈춰섰다.
『들으라, 그대들.』
허공에서 울려 퍼진 그 음성은 마치 하늘 어딘가에 앉아있는 존재가 인세를 굽어보며 내리는 칙명 같았다. 본좌는 순간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런 하늘의 격(格)을 지닌 음성은 본좌가 전생, 아니 전겁(前劫)에서 익히 들어보았던 것과 흡사했던 것이다.
'또다시 하늘이 본좌를 부르는가.'
가슴 한복판이 서늘해졌다. 이십여 년을 자물쇠처럼 걸어 잠갔던 옛 기억의 문짝이 삐걱, 소리를 내며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모든 인류에게 고유한 권능을 하사하노라.』
『각성이 시작됩니다.』
짧은 알림이 두 줄 붙어 떠올랐다. 존댓말인데도 명령이었다. 참으로 무엄한 어투로다.
'하늘의 뜻을 전하는 자가 어찌 저리 방자하게 존대와 하명을 섞어 쓰는고. 예법을 모르는 요물이로다.'
방 안 곳곳에서 비명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옆방의 룸메이트가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는 소리,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 "이거 뭐야 미친"을 반복하는 소리가 뒤섞였다. 아래층에서는 접시가 깨지는 소리, 어느 노인이 "아이고 하늘님이시여" 외치는 소리까지 뒤섞여 흡사 아수라장이었다. 본좌는 홀로 냄비 불을 끄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전겁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천하를 오시하며 검 끝으로 산을 가르던 그 시절, 본좌는 강호에서 '천하제일'이라 불렸었느니라. 만인이 본좌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었고, 구름을 밟듯 경공을 펼치며 천지를 활보하였다. 헌데 어느 날 하늘이 무너지는 재앙 속에서 본좌는 이 낯선 땅,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강태민'이라는 아이의 몸으로 떨어졌었다. 스무 해가 넘도록 그 기억을 억눌러가며 평범한 학생으로 살아왔거늘, 오늘 이 음성이 그 봉인을 완전히 풀어젖힌 것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로다.'
본좌는 낮게 침음했다.
'혹여 이는 본좌를 다시 강호로 돌려보내려는 하늘의 안배가 아니겠는가. 검을 다시 쥐게 될 날이 머지않았음이니라.'
가슴 한구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잃어버린 위세를 되찾을 기회라 여겼던 것이다.
『스킬 확인이 가능합니다.』
『[상태창]을 열어보세요.』
손끝에서 희미한 빛이 일었다. 본좌는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요망한 술수로다.
***
[강태민]
[레벨: 1]
[고유 스킬: 캠프 설영(Camp 設營)]
본좌는 눈을 세 번 깜빡였다.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검술도, 궁술도, 심지어 하잘것없는 화염 방출조차 아니었다. 캠프. 설영. 이 두 글자를 아무리 곱씹어도 무림의 그 어떤 무공서에도 없던 단어였다. 본좌는 재차 손을 저어 창을 흔들어보았지만 글자는 바뀌지 않았다.
혹여 오독(誤讀)이 아닐까 하여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다. 그러나 상태창은 냉정하게도 같은 글자를 그대로 띄우고 있었다. 참으로 요지부동한 놈이로다.
『캠프 설영: 야영지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효과는 사용 환경에 따라 달라집니다.』
짤막한 설명 두 줄이 전부였다. 본좌는 미간을 좁혔다.
'천하를 오시하던 본좌에게 텐트를 치는 재주를 내리다니, 하늘도 참으로 짓궂도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전생에서 본좌는 하룻밤 사이 산문(山門) 하나를 통째로 무너뜨렸던 몸이었다. 그런 본좌에게 야영지 설치라는 재주를 내리다니, 이는 마치 용에게 지렁이의 재주를 준 것과 같은 격이 아니겠는가.
'혹 이 스킬 뒤에 숨은 심오한 뜻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본좌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늘의 안배란 늘 처음에는 하잘것없어 보이는 법이라 배웠던 것을 상기하였다. 그리 여기니 조금은 위안이 되는 듯하였다.
전서구가 울렸다. 요망한 손바닥만 한 기계, 스마트폰이라 불리는 그것이 진동하며 단체 대화방에 메시지가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박성진]: 야 나 검술 마스터리 떴다 ㅋㅋㅋㅋ 개사기임
[최준혁]: 나는 궁술!!! 스킬 이름부터 쩐다 '천리안궁'
[박성진]: 태민이 너는 뭐 떴냐
본좌는 잠시 손가락을 멈췄다. 뭐라고 답해야 할꼬. '본좌는 캠프 설영이라는 요상한 것을 얻었느니라' 라고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손끝이 화면 위에서 갈 곳을 잃고 배회하였다. 검술 마스터리, 천리안궁이라는 위풍당당한 이름들 옆에 캠프 설영이라는 넉 자를 나란히 두는 것은 참으로 격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강태민]: ㅁㄱ 나중에 얘기할게
짧게 얼버무렸다. 두통이 뒤통수 쪽에서 슬며시 올라왔다. 이것이 굴욕이라는 것인가.
[최준혁]: 뭐야 궁금하게 왜 말 안 해
[박성진]: 설마 폐급 뜬 거 아니냐 ㅋㅋㅋㅋㅋㅋ
웃음 표시가 세 줄이나 붙었다. 본좌는 그 문장을 한참 노려보았다.
'폐급이라, 참으로 방자한 언사로다.'
하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캠프 설영이라는 말은 아무리 곱씹어도 위풍당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검을 뽑아 산을 베던 본좌가 이제는 텐트나 치는 재주로 세상에 나서야 한다니. 이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운명의 장난이었다.
[최준혁]: ㄹㅇ 궁금한데 왜캐 숨겨 ㅋㅋ
[박성진]: 야 우리끼린데 뭘 그래 말해봐
본좌는 휴대폰을 슬며시 뒤집어 놓았다. 요물의 화면이 계속 밝아지며 진동하는 것이 눈에 밟혔으나, 애써 못 본 척하였다. 이는 회피가 아니라 전략적 후퇴라 스스로를 다독였다.
'무릇 대장부는 때를 기다리는 법이니라. 지금은 은인자중(隱忍自重)*할 때로다.'
*은인자중: 마음속에 감추어 참고 몸가짐을 조심함.
창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뉴스 속보를 알리는 소리였다. 본좌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거리를 지나던 이들이 저마다 손바닥의 요망한 기계를 들고 하늘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어느 이는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고, 또 어느 이는 환호성을 지르며 팔을 휘저었다. 참으로 각양각색의 인세로다.
멀리서는 자동차 경적이 연쇄적으로 울려댔다. 가마들이 서로 뒤엉켜 오도 가도 못하는 모양이었다. 도로 위에 늘어선 가마들의 행렬을 보며 본좌는 문득 이 혼란이 비단 이 동네만의 일이 아니라 온 천하를 뒤흔든 사건임을 실감하였다.
'이 세계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도다.'
본좌는 창틀에 손을 얹은 채 한참을 그리 서 있었다. 밤바람이 차게 스쳐 지나갔으나 그 서늘함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머릿속은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검술도 아니요, 권법도 아니요, 오직 텐트를 치는 재주라니.'
아무리 곱씹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 화두였다. 본좌는 다시 상태창을 열어 그 넉 자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혹여 감춰진 문장이라도 있을까 하여 손끝으로 글자를 쓸어보기도 하였으나, 야속한 상태창은 묵묵부답이었다.
본좌는 그 순간 알지 못했다. 이 사소한 스킬 하나가, 앞으로 본좌를 어떤 심연으로 몰아넣을지를. 다만 뒤통수의 열기와 함께, 어렴풋한 불길함만이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본좌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방식으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