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라면집 꿈꾸는 기억조작요원

2화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고 다시 돌아왔을 때, 남자는 사라져 있었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3층인데, 뛰어내렸는지 투과했는지 알 수 없었다. 바람이 커튼을 밀어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차가웠다. 그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는 순간에야, 내가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스마트폰만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화면에는 여전히 채팅창이 흐르고 있었다. '투과님 왜 갑자기 나감?' '렉인가?' 'ㄹㅇ 방송 중간에 튐 ㄷㄷ' 'ㅋㅋㅋㅋ 겁먹었나보다' 댓글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마치 방금 여기서 벌어진 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나는 그 화면을 멍하니 보다가, 은결을 돌아봤다. 마비가 풀린 듯 은결이 몸을 일으켰다. 숨을 몰아쉬면서. "괜, 괜찮으세요?" 내가 먼저 물었어야 할 말을 은결이 물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저요? 저는 괜찮은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이 떨리고 있었다. 손끝부터 팔꿈치까지, 미세하게. 마치 방금 무거운 걸 들었다가 놓은 것처럼. 방금 뭘 한 건지, 나도 정확히 몰랐다. 손목을 잡았던 감각만 남아 있었다. 그 남자의 팔목뼈가 손바닥에 닿았던 느낌. 그리고 그 다음, 시야가 하얗게 지워지던 순간. --- [대상자의 단기기억 22:47~23:02 구간이 삭제되었습니다.] [대상자의 공간 인지 능력이 일시적으로 저하됩니다.] 그런 알림이 손목을 잡은 순간 머릿속에 떴다. 십 년 만이었다. 부서를 나온 뒤로는 한 번도 쓴 적 없는 능력이었다. 쓰지 않으려고 애썼다. 쓰지 않는 게 유일한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방금, 아무 생각 없이 써버렸다. 그것도 그냥 쓴 게 아니었다. 십오 분짜리 기억을 통째로. 게다가 공간 인지까지 흔들어놓았다. 예전 같으면 상부에 보고서 세 장은 썼어야 할 일이었다. '대단하군.' 머릿속의 그 목소리가 다시 말을 걸었다. '십 년을 놀고도 실전에서 그 정도라니. 아주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비아냥이었다. 위엄 있는 척하는 말투로 사람 속을 긁는 재주가 있었다. "누구세요." 입 밖으로 물어봤다. 목소리가 나온다는 게 신기했다. 원래는 머릿속으로만 대화하던 놈이었다. '네 죄책감이다. 정확히는, 네가 그동안 눌러놓은 것들.' "그게 왜 말을 해요." '그건 나도 모르지. 그런데 방금 그건 좀 인상적이었다. 십 초 만에 대상자의 십오 분짜리 기억을 지우고, 공간 감각까지 흔들었지. 예전엔 그런 응용은 못 했잖느냐.' 생각해보니 그랬다. 예전엔 딱 지시받은 시간만큼, 지시받은 부위만 지웠다. 정밀했지만 딱 그만큼이었다. 손목을 잡고, 숫자를 세고, 딱 그 초만큼 지우고. 그게 다였다. 방금은 달랐다. 목숨이 걸린 순간, 몸이 먼저 반응했고, 능력이 그 반응을 따라갔다. 마치 절박함이 클수록 능력이 커지는 것처럼. 이상한 일이었다. 십 년을 안 썼는데, 손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는 게. '그거 좀 금쪽이 같지 않느냐?' 목소리가 또 끼어들었다. "금쪽이는 무슨." 중얼거리며 은결 쪽을 봤다. 은결이 무릎을 세우고 앉아,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담요를 끌어당겨 어깨에 두르는 손끝이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혼자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아,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좋은 첫인상은 이미 물 건너간 것 같았다. 이 집에 들어온 지 두 시간도 안 됐는데. 벌써 두 번째로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고 있었다. --- 경찰이 온 건 삼십 분 뒤였다. 순찰차 한 대, 경관 두 명. 나이 든 쪽이 대충 방을 훑어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능튜브 관련 신고, 최근에 진짜 많아요." 말투에 지친 기색이 그대로 묻어났다. 마치 이 대화를 오늘 벌써 세 번은 한 사람 같았다. "그럼 뭐, 잡을 수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초능력 범죄는 관할이 좀 애매해요. 지역서에서 못 잡으면 상급 기관 넘겨야 하는데, 그게 또 시간이 걸리고." "그럼 오늘 밤엔." "일단 진술서 쓰시고, 저희가 순찰 강화하겠습니다." 순찰 강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너무 잘 알았다. 아무것도 안 한다는 뜻이었다. 젊은 경관이 수첩을 꺼내 뭔가를 적었다. 형식적인 몇 줄. 이름, 시간, 대략적인 상황. 그게 다였다. "창문은 열려 있었고, 3층인데, CCTV는요?" "이 건물엔 없어요." "주변은요." "확인은 해보겠습니다." 확인은 해보겠습니다. 그 말도 순찰 강화와 똑같은 무게였다. 은결이 담요를 두르고 앉아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 얼굴이 하얬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대답 한 마디 없이. "저기." 경관이 나가려는데 내가 붙잡았다. "이능튜브 계정, 방금 방송했던 그 계정, 신고하면 바로 정지돼요?" "신고는 되는데, 플랫폼이 해외 서버라서 처리가 며칠 걸려요." 며칠. 그 며칠 동안 투과는 또 누군가의 방에 손을 넣을 수 있었다. 벽을 통과하고, 문을 통과하고, 사람 몸까지 통과할 수 있는 놈이 며칠을 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경관들이 나가고 나서도 그 숫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며칠. 그 사이에 몇 명이나 이런 일을 당할까. --- 경관들이 돌아가고, 방 안에는 은결과 나만 남았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시계 소리만 크게 들렸다. "라면 좀 드릴까요." 뜬금없이 그 말이 튀어나왔다. 냄비를 불에서 내리다가 뛰어나온 게 생각나서였다. 가스불은 껐던가. 순간 그것부터 걱정이 됐다. 은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픽 웃었다. "지금 이 상황에 라면이요?" "놀랐을 때는 뜨거운 거 먹는 게 좋대요." 대충 지어낸 말이었는데, 은결이 순순히 따라왔다. 부엌은 은결의 집이었지만 어쩐지 내가 냄비를 다시 올리고, 물을 받고, 면을 넣었다. 은결은 식탁에 앉아 그 모습을 멀거니 보고 있었다. 국물을 한술 뜨더니, 은결이 조용히 말했다. "그 사람, 오늘 처음 아니에요." "네?" "두 달 전부터, 뭔가 이상했어요. 벽에서 소리 나고, 물건이 없어지고. 근데 아무도 안 믿어줬어요." 두 달. 그 시간 동안 은결은 혼자 그걸 견디고 있었던 거다. 부모님한테 말해도 안 믿어줬을 거고, 친구한테 말해도 헛소리라고 했을 거다. 그런 얼굴이었다. 오래 참아온 사람의 얼굴. 뭔가 뜨거운 게 배 속에서 올라왔다. 화 같기도 하고, 죄책감 같기도 했다. "경찰에 신고는요." "했죠. 세 번이나. 근데 매번 증거가 없다고. 벽에 흠집만 남고, 그게 뭘로 그런 건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방송에 나온 거예요? 그 투과라는 사람." "제가 부른 게 아니에요. 이능튜브에서 저희 동네 얘기 듣고 자기가 찾아온 거예요. 재밌는 걸 준비하겠다고." 재밌는 걸 준비하겠다. 그 말이 소름 끼쳤다. 남의 불행을 콘텐츠로 쓰는 놈들이 쓰는 표현이었다. "이제 저도 알아요." 내가 말했다. "그리고 저는 이런 거 좀 압니다." "뭘요?" "쫓는 거요." 은결이 나를 빤히 봤다. 국물을 뜨던 숟가락이 그대로 공중에 멈췄다. "경찰이셨어요?" 대답 대신 나는 라면 그릇을 내려놓았다. '말해도 되는 것이냐.'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물었다. 됐거든요, 라고 이번엔 속으로 답했다. "비슷한 거였어요, 예전에." 애매하게 넘겼다. 은결이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국물을 마시며 살짝 웃었다. 그 웃음이 처음으로 편안해 보였다. "라면 진짜 맛있어요." "저 라면집 차릴 거예요." "진짜요?" "네. 여기서." "여기, 이 동네에서요?" "네. 방금 정했어요." 말하면서도 스스로 웃겼다. 방금까지 죽을 뻔한 사람이 라면집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근데 그게 이상하게 진심이었다. 그 대화가 그날 밤 유일하게 따뜻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걸로 끝날 사건이 아니라는 걸. 스마트폰에 남아 있던 채팅창의 마지막 줄이 자꾸 머릿속에 걸렸다. '담주에 진짜 재밌는 거 준비함ㅋㅋ 기대해라.' 투과가 방송이 끊기기 직전에 올린 말이었다.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재밌는 거. 그 표현 안에 뭐가 들어 있을지,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놈은, 다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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