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탄환은 무공을 모른다

5화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투두두둑. 땅을 울리는 진동이 발밑까지 전해졌다. 강도현은 총을 다시 뽑아 들었다. 노인과 여자를 뒤로 물러서게 하며 그 앞을 막아섰다. 또 온 거냐, 이 새끼들. 속으로 욕이 먼저 튀어나왔다. 산적 몇 명 처리했다고 끝날 판이 아니라는 건 이미 짐작했지만, 이렇게 빨리 반응이 올 줄은 몰랐다. 흙먼지 사이로 인영이 드러났다. 한 명뿐이었다. 백색 무복을 입은 여자가 검을 든 채 말에서 뛰어내렸다. 눈빛이 매서웠다. 발끝이 땅에 닿는 순간 흙먼지가 옷자락을 스치듯 흩어졌다. 여자가 아니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강도현은 총구를 살짝 내리며 상황을 살폈다. 여자의 눈이 쓰러진 산적들과 강도현을 번갈아 훑었다. 하나하나 세는 듯한 시선이었다. 네놈이 이 짓을 벌인 것이냐. 목소리가 냉랭했다. 칼끝 같은 어조였다. 강도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짓이라니, 사람 살린 걸 말하는 건가. 여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산적들에게 이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무공이 몇이나 되는지 아느냐. 검흔도 아니고, 도흔도 아니다. 이런 상처는 처음 본다. 검이 강도현을 향해 겨눠졌다. 검신이 햇빛을 받아 잠깐 번뜩였다. 요사한 술법을 쓴 것이냐, 아니면 사인마공 같은 마도의 술수를 쓴 것이냐. 강도현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마도는 무슨, 이거 그냥 총인데. 총. 여자의 눈에 의문이 스쳤다. 그러나 곧 다시 경계심이 되돌아왔다. 눈동자가 강도현의 허리춤에 꽂힌 물건을 재빨리 훑었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정체를 밝혀라. 노인이 다급히 손을 저으며 끼어들었다. 발걸음이 후들거렸지만 목소리만은 또렷했다. 협녀님, 오해입니다. 이 은공께서 저희를 구해주셨습니다. 여자의 시선이 노인 쪽으로 잠시 옮겨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여자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손녀였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였다. 맞습니다, 이분이 저희를 구해주신 은공이십니다. 강도현이 손녀를 힐끗 쳐다봤다. 이름도 모르는 사이인데 벌써 은공이라고 하는 게 웃겼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굳이 아니라고 할 필요도 없고. 백색 무복의 여자, 검을 쥔 손에 힘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산적들 스스로 이런 상처를 입었다는 말이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희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여자의 눈이 강도현을 다시 훑었다. 위아래로 몇 번을 오갔다. 신발부터 시작해서 총, 그리고 얼굴까지. 마치 값을 매기는 듯한 눈빛이었다. 강도현은 그 눈빛이 못마땅했다. 뭘 그렇게 뜯어보고 있어. 네놈의 무공 근본을 가늠하는 것이다. 가늠은 됐고, 됐으면 검이나 좀 치워줬으면 하는데. 여자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산채의 잔당들이 곧 본채에 이 소식을 알릴 것이다. 흑풍채가 움직이면 이 마을 전체가 위험해진다. 강도현은 여자의 말투에서 뭔가 짚이는 게 있었다. 그냥 지나가던 무인이라기엔 흑풍채 이름을 너무 익숙하게 불렀다. 너 이 흑풍채 놈들 잘 아는 것 같은데. 여자의 표정이 굳었다. 잠깐 눈동자가 흔들렸다. 안다면 안 되는 것이냐. 안 될 건 없는데, 그럼 이제부터 좀 도움이 되는 정보라도 좀 풀어봐. 여자는 대답 대신 검을 검집에 넣었다. 철컥, 소리가 짧게 울렸다. 하지만 강도현을 향한 경계는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네 이름부터 말해라. 강도현. 그쪽은. 유서연. 짧은 소개가 오갔다. 서로 이름 하나 던지고 끝이었다. 유서연은 노인과 손녀를 흘낏 보며 물었다. 다친 곳은 없느냐. 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없습니다. 이 은공께서 늦지 않게 와주셨습니다. 손녀 쪽은 두 손을 모으고 강도현을 향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강도현은 손을 휘휘 저었다. 인사는 나중에 하고, 일단 여기 부상자들 처리부터. 쓰러진 산적들이 여전히 신음하고 있었다. 몸을 뒤틀며 흙바닥을 긁는 놈도 있었고, 아예 정신을 놓은 놈도 있었다. 유서연이 그들을 향해 다가가더니 발끝으로 하나를 굴려 확인했다. 신음이 짧게 새어 나왔다. 죽지는 않았군. 죽일 필요까지는 없잖아. 정보 캐낼 놈도 필요하고. 유서연의 눈이 강도현을 향했다. 표정에 뜻밖의 감정이 스쳤다. 잔인하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신중한 판단이라니. 네놈, 생각보다 계산적이구나. 칭찬으로 듣지. 그때 산적 하나가 신음 속에서 힘겹게 말을 뱉었다. 입가에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두목님이... 곧 오실 겁니다... 그때는... 말이 끝나기 전에 유서연의 발끝이 그의 옆구리를 지그시 눌렀다. 뼈가 눌리는 소리가 났다. 그때는 뭐, 어쩐다는 거냐. 산적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눈이 뒤집히며 정신을 잃은 듯했다. 강도현은 마을 쪽을 살폈다. 무너진 지붕들 사이로 뭔가 타는 냄새가 은근히 배어 있었다. 매캐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마을에 뭐 있었던 거 아니야. 노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입술이 잠깐 떨렸다. 이미 사흘 전, 이곳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다른 곳으로 피신했습니다. 저희 부부만 남았다가... 제 아들과 며느리는 이미... 말을 잇지 못했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손녀가 노인의 손을 잡으며 눈을 감았다.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강도현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이거 그냥 산적 몇 명 잡는다고 끝날 일이 아니겠는데. 유서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흑풍채는 근방 백 리 최대의 산채다. 두목이라는 자는 오류 수준의 무공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다. 오류면 나 정도 되나. 유서연이 눈살을 찌푸렸다. 네놈이 무슨 무공인지 짐작도 안 가는데 어찌 비교하겠느냐. 비교 안 해도 상관없고. 어차피 부딪힐 거면 부딪혀야지. 유서연의 눈에 미묘한 감정이 스쳤다. 경계와 의심, 그리고 그 아래 깔린 작은 흥미. 검을 쥔 손이 살짝 느슨해졌다. 네놈, 정체가 뭐냐. 강도현은 총을 허리에 꽂으며 웃었다.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건 차차 알게 될 거고. 말을 마친 강도현은 다시 쓰러진 산적들을 훑어봤다. 몇 놈은 아직 숨이 붙어 있었고, 그중 한 놈은 눈동자가 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보를 캐낼 재료로는 충분해 보였다. 이놈들 데리고 마을 쪽으로 좀 이동시켜야겠는데. 유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이 이미 산길 저편을 향해 있었다. 산길 저편에서 다시 낮게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마리였다. 두두두두두. 땅울림이 아까보다 훨씬 크고 묵직했다. 유서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검을 쥔 손이 다시 팽팽해졌다. 본채에서 벌써 사람을 보냈다. 강도현의 눈이 산길 끝을 향했다. 흙먼지가 벌써부터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그 규모가 아까 유서연 혼자 왔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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