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부장님, 저 능력 생겼어요

2화

서류를 든 손이 떨렸다. 낯선 문자였다. 그런데 뜻이 그대로 들어왔다. 마치 원래 알고 있던 언어처럼. 이게 뭐지? 다시 눈을 비볐다. 여전히 똑같았다. 서류 첫 줄에는 '본 계약은 갑과 을 사이의 신뢰를 기초로...'라는 문장이 있었는데, 그건 분명 한글이 아니었다. 곡선과 점이 뒤섞인 낯선 기호였다. 그런데도 나는 그 뜻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미쳤다. 진짜로 미쳤다. 손목시계를 봤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 사무실엔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형광등 하나가 깜빡거리며 이명 같은 소리를 냈다. 그 소리마저 오늘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 휴대폰을 꺼내 사전 앱을 켰다. 그 문자를 카메라로 찍어봤다. 인식이 안 됐다. '지원하지 않는 문자입니다'라는 메시지만 떴다. 한 번 더 찍었다. 이번엔 각도를 바꿔서. 조명도 조절해서. 결과는 똑같았다. '지원하지 않는 문자입니다.' 그런데 내 눈에는 뻔히 뜻이 보였다. 뭐야, 이거 진짜. 손바닥으로 얼굴을 몇 번 문질렀다. 눈이 침침한 걸까, 아니면 정신이 나간 걸까. 둘 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야근이 잦았으니까. 사람이 잠을 못 자면 헛것도 보인다던데. 그런데 헛것치고는 너무 선명했다. 아까 그 백색 드레스의 여자가 떠올랐다. 실수라고 했다. 뭘 실수했다는 건지, 그때는 물어볼 새도 없었다. 그 여자의 눈빛이 이상하게 또렷하게 기억났다. 미안한 기색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설마, 그때 그거 때문에? "정민호 씨." 등 뒤에서 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류철을 반사적으로 덮었다. 마치 도둑질이라도 한 것처럼. "아직 퇴근 안 했어?" 박태준 부장이 재킷을 걸치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술 냄새가 진하게 났다. 회식 자리를 다녀온 모양이었다. 넥타이는 반쯤 풀려 있었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검토 중입니다." "어디까지 됐어?" "이제 시작이라..." "뭐?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목소리가 커졌다.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사무실 안에 그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내일 아침 아홉 시까지 가져오라니까. 지금 몇 신데." "열두 시 안 됐습니다." "그러니까 시간 없다는 거잖아, 지금." 박태준은 서류철을 낚아채듯 들췄다. 종이가 파르르 떨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 첫 장을 보고 멈췄다.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이거 뭔데." "네?" "이 계약서 원문, 이거 이상한 문자잖아. 이거 검토 어떻게 하려고?" 그의 말을 듣고 나는 다시 서류를 봤다. 순간 등골이 서늘했다. 그에게는 정말 이상한 문자로 보이는구나. 그런데 나한테는. 이건 뭐지, 나만 보이는 건가? "이거... 협력사 원본 언어랍니다. 원래 그렇게 옵니다." 일단 둘러댔다. 사실이 아니었다. 나조차 저 문자가 뭔지 몰랐다. 그런데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스스로도 놀랐다. "그럼 이거 번역해서 검토해야 하는 거 아냐?" 박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의심하는 눈빛이었다. "번역본도... 같이 있습니다." 또 거짓말이었다. 이상하게 입에서 술술 나왔다. 마치 누가 대본을 써준 것처럼. 이게 그 능력인가? 거짓말도 잘 하게 되는 능력? 아니, 그건 아니겠지. 원래 나 거짓말 잘했나? 아니었다. 나는 거짓말에 서툰 편이었다. 대학 시절 미팅 자리에서도 여자친구 있다는 말을 못 해서 세 시간 동안 억지로 앉아 있었던 인간이 바로 나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달랐다. 박태준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류철을 다시 던졌다. 종이 몇 장이 책상 밖으로 미끄러졌다. "제대로 해. 이거 실수 생기면 니가 책임지는 거야, 알지?" "네, 알겠습니다." "이런 것도 제대로 못하면 대리는 무슨. 계장급 일도 못하는 거야." 한마디 더 얹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뭔가 더 나올 것 같았다. 그는 몸을 돌려 사무실을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나는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어깨에서 힘이 풀렸다. 항상 이런 식이다. 책임은 나한테, 공은 저한테. 이번 협력사 계약, 사실 내가 다 뛰어다니면서 잡은 건데. 그 공은 결국 박태준 부장 입에서 나올 거다. "우리 팀이 열심히 해서" 라는 말로. 다시 서류를 들여다봤다. 낯선 문자들이 여전히 눈앞에서 춤을 췄다. 그런데 뜻은 명확했다. 신기하게도, 계약 조항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그대로 정리됐다. 손해배상 조항, 계약 해지 조건, 위약금 산정 방식까지. 마치 십 년 동안 이 계약서만 봐온 사람처럼 익숙했다. 이게 능력인가? 그 여자가 말한 '실수'라는 게 이거였나? 확인해보고 싶었다. 인터넷에서 아무 외국어 뉴스나 찾아봤다. 프랑스어 기사 하나를 열었다. 파리에서 일어난 시위에 관한 기사였다. 읽혔다. 완벽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이번엔 독일어 사이트를 열었다. 그것도 읽혔다. 스페인어도, 러시아어도, 심지어 태국어까지. 전부 다 읽혔다. 이거 로또보다 낫잖아? 농담처럼 생각했지만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게 정상적인 일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당장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아니, 이걸로 뭘 할 수 있는 거지? 동시통역사? 번역가? 그런데 이게 진짜 능력이라는 걸 누가 믿어줄까?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손끝이 저렸다. 아까 느꼈던 뜨거운 감각이 다시 스쳤다. 몸속 어딘가에서 뭔가 꿈틀거리는 느낌이었다. 마치 혈관 속에 작은 불씨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코피가 흘렀다. 뚝, 뚝. 책상 위로 붉은 방울이 떨어졌다. 서류 위에도 한 방울이 떨어져서 낯선 문자 위로 붉게 번졌다. 뭐야? 당황해서 휴지를 찾았다. 서랍을 뒤졌지만 없었다. 결국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코를 막았다. 코를 막고 하늘을 봤다. 사무실 형광등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히 금세 멈췄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방금까지 뭉쳐 있던 어깨 통증도 사라졌다. 목덜미를 만져봤다. 뻐근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뭔데. 피로가... 없어졌다. 분명 여섯 시간 넘게 야근을 한 몸인데, 지금은 방금 잠에서 깬 것처럼 상쾌했다. 눈이 뻑뻑하지도 않았다. 다리도 무겁지 않았다. 마치 몸 전체가 리셋된 것 같았다. 이상한 일들이 연쇄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손을 내려다봤다. 평범한 내 손이었다. 굳은살, 짧은 손톱, 다 그대로였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손을 펴보고, 다시 쥐어봤다. 손가락 끝에서 미세한 열기가 느껴졌다. 마치 조금 전까지 뭔가를 붙잡고 있었던 것처럼. 확실히, 뭔가 달라져 있었다. 거울을 봤다면 좋았을 텐데. 사무실엔 거울이 없었다. 화장실까지 가서 확인해볼까 생각했지만, 그럴 힘도 없었다. 아니, 힘은 넘치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확인하는 게 무서웠던 것 같다. 만약 눈동자 색이 변했다거나, 얼굴이 달라졌다거나 하면.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서연 씨한테 이걸 말해도 되나? 그럴까?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겠지? '서연 씨, 저 오늘부터 외계어 다 읽혀요.' 이렇게 말하면 뭐라고 할까. 정신병원 소개해줄까? 그래도 말해야 할까? 서연 씨는 믿어줄 사람 같기도 한데. 아니, 그건 내 착각인가. 3년 넘게 짝사랑하다 보면 뭐든 다 좋게 보이는 병이 생기는 거 아닐까. 결론이 나지 않은 채로 나는 서류철을 덮었다. 붉은 얼룩이 진 서류를 조심스럽게 정리했다. 시계는 벌써 새벽 한 시를 넘기고 있었다. 내일 아침 아홉 시. 박태준이 그렇게 말했었지. 그 전까지 이 서류를 어떻게든 완성해야 한다. 그런데 이 이상한 능력 때문에 완성이 문제가 아니게 됐다. 지금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그게 더 급한 문제였다. 창밖을 봤다. 도시의 불빛이 흐릿하게 번져 보였다. 평소라면 그냥 예쁘다고 생각했을 풍경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보고 있던 세상이 아닌 것처럼. 그때, 다시 손끝이 뜨거워졌다. 이번엔 코피가 아니었다. 뭔가 다른 신호였다. 몸 안쪽에서, 뭔가가 반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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