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야근이었다.
또.
이번 달만 벌써 열흘째였다. 형광등 불빛 아래 모니터만 여섯 시간째 노려보고 있었다. 눈이 시렸다. 어깨는 벌써 굳어서 감각이 없었다. 목뒤로 손을 갖다 대니 돌덩이가 들어앉은 것 같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로봇으로 태어나는 게 나았을까.
그런 생각도 잠깐 들었다. 로봇은 야근수당도 없겠지만, 최소한 근육통은 없을 테니까.
"정민호 씨."
박태준 부장의 목소리가 파티션 너머로 넘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등을 세웠다. 등이 저절로 펴지는 이 반응, 이거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도대체 몇 년 차인지.
"네, 부장님."
"이거 내일 아침까지 되지?"
서류철 하나가 책상 위로 툭 던져졌다. 두께가 만만치 않았다. 협력사 계약 검토 자료였다. 대충 눈으로 훑어봐도 원래 세 명이 붙어도 이틀은 걸리는 분량이었다.
"저기, 이건 분량이 좀..."
"되냐고, 안 되냐고."
말을 끊는 저 타이밍. 늘 저렇다. 내 말이 세 글자를 넘기기 전에 잘라먹는다. 마치 내 문장을 다 듣는 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되게 해보겠습니다."
입에서 나온 말이 내 것 같지 않았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거절이란 단어는 내 사전에 없는 것처럼 굴었다. 사전을 새로 편찬해야 할 판이었다. 정민호 사전, 개정판, '거절' 항목 신설 예정.
박태준은 씩 웃었다. 그 웃음이 소름 끼치게 편안해 보였다.
"역시 정민호 씨는 믿을 만해."
믿을 만한 게 아니라 만만한 거겠지.
속으로만 대답했다. 겉으로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미소도 몇 년째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안면 근육이 자동으로 움직이는 수준이었다.
부장은 자리로 돌아가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여유가, 그 태연함이 얄미웠다. 자기가 뭘 던졌는지도 모르는 사람처럼, 어깨를 흔들며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잠깐 노려보다가 다시 모니터를 켰다. 커서가 깜빡였다. 깜빡, 깜빡. 마치 내 정신줄처럼.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그 얇은 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사무실엔 나 혼자였다. 다들 퇴근한 지 오래였다. 창밖은 이미 새카맸다. 시계를 보니 밤 열한 시가 넘어 있었다.
커피를 세 잔째 마셨다. 손이 떨렸다. 카페인 때문인지 피로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됐다. 아니, 그냥 둘 다인 것 같았다. 카페인과 피로가 손을 잡고 내 신경계를 흔들고 있는 느낌.
서류 위의 글자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조항, 조항, 또 조항. 을과 갑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눈앞이 흐려졌다.
그냥 좀 쉬자.
의자에 등을 기댔다. 눈을 감았다. 잠깐이면 됐다. 삼 분, 아니 오 분만.
그런데 그 오 분이 문제였다.
눈을 감은 순간, 세상이 통째로 뒤집혔다.
쿵!
뭔가 거대한 것이 내 몸을 잡아채는 느낌이었다. 위인지 아래인지도 구분이 안 됐다. 사무실 형광등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아니, 내가 멀어지고 있었다.
뭐야, 이거.
숨이 안 쉬어졌다. 몸이 붕 떴다. 중력이 사라진 듯한 감각. 눈을 뜨려 해도 눈꺼풀이 말을 안 들었다. 마치 누군가 내 몸의 리모컨을 뺏어간 것 같았다.
어디로 가는 거야?
대답은 없었다. 그저 회전하는 빛의 잔상만 눈앞에서 소용돌이쳤다. 흰색, 금색, 다시 흰색. 마치 은하수 한가운데 던져진 것 같았다. 아니, 은하수를 본 적은 없으니 정확한 비유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텔레비전에서 본 우주의 이미지들이 죄다 머릿속에서 뒤섞이며 재생되고 있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야근하다 죽는 직장인. 뉴스 헤드라인으로 딱 좋을 것 같았다. '과로사, 또 하나의 청춘.' 씁쓸한 유머가 머릿속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정신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모든 것이 멈췄다.
발이 바닥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딱딱한 대리석 같았다. 눈을 떠 보니 순백의 공간이었다. 사방이 온통 하얗고, 끝이 어디인지 짐작도 안 됐다. 벽도 없고, 천장도 없고, 그냥 무한한 하양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뭐야, 여기.
죽은 건가?
드라마에서 보던 저승 대기실 같은 걸 상상했다. 저승사자가 명부를 들고 나타나서 "정민호 씨, 여기 사인 좀." 이럴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눈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저승사자는 아니었다.
금발의 여성이었다. 백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옷자락이 발밑에서 안개처럼 흩어졌다. 마치 드레스 끝단이 실체가 없는 것처럼 바닥과 뒤섞였다. 그녀는 표정 없이 나를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는 놀란 얼굴이었다.
"어... 어라?"
그녀의 첫 마디가 그거였다. 어라.
신비로운 존재의 첫 대사가 저건가. 나는 뭐라 대답도 못 했다. 목소리가 안 나왔다. 아니, 정확히는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이게 아닌데."
그녀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뭐가 아니라는 건지, 뭘 잘못했다는 건지 나는 알 도리가 없었다. 나는 이 순간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오히려 침착해졌다. 아니, 침착한 게 아니라 그냥 뇌가 정지한 거였다. 과부하가 걸린 컴퓨터처럼, 화면만 하얗게 뜨고 아무 프로그램도 돌아가지 않는 상태.
"저기요."
겨우 입을 뗐다.
"여기가 어딘가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뻗어 내 이마를 가볍게 짚었다. 차가웠다. 얼음보다 더. 손가락이 이마에 닿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미안해요."
그녀가 말했다.
"뭐가요?"
"제가 실수를 좀... 했어요."
실수.
그 단어가 유독 크게 들렸다. 이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실수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단어가 튀어나오니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대체 뭘 실수했다는 건지, 나한테 뭘 어쨌다는 건지 하나도 감이 안 왔다.
몸속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혈관을 타고 도는 듯한 낯선 감각. 손끝부터 시작해서 팔뚝을 지나 가슴까지, 뜨거운 액체가 흘러드는 것 같았다. 뜨거운데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마치 몸속 어딘가 비어 있던 자리가 채워지는 기분.
"저기, 이게 무슨..."
"돌려보낼게요. 원래 있던 곳으로."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어딘가 죄책감을 감춘 것처럼 보였다. 웃고 있는데 눈은 웃지 않는, 그런 미소.
"조금... 달라져 있을 거예요."
달라진다니.
뭐가 달라진다는 거야. 몸이? 인생이? 아니면 그냥 기분 탓이라고 둘러대려는 건가. 무슨 소리냐고 물어볼 새도 없었다. 다시 세상이 소용돌이쳤다. 빛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저기요! 잠깐만요!"
외쳤지만 목소리는 흩어졌다. 마치 물속에서 외치는 것처럼, 소리가 나오는 순간 사방으로 부서져 사라졌다.
쿵!
다시 충격이 왔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목이 뒤로 젖혀진 채, 침을 흘리며.
뭐야.
꿈이었나?
시계를 봤다. 밤 열한 시 이십삼 분. 잠들었던 시간은 채 오 분도 되지 않았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졌다. 여전히 뜨거웠다. 몸속에서 아까 그 이물감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치 뭔가가 몸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느낌. 이물감인데도 불쾌하지 않다는 게 더 이상했다.
꿈이 아니었어.
확신이 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확실했다. 오 분짜리 낮잠에서 저렇게 생생한 감각이 남을 수 있나? 손끝의 저릿함이, 이마에 닿았던 그 차가운 손가락의 촉감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서류철을 다시 내려다봤다. 검토해야 할 계약서 뭉치는 그대로였다. 여전히 산더미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알 수 없는 언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영어도 아니고, 한자도 아니고, 처음 보는 낯선 문자였다. 마치 꿈에서 봤던 문양들이 그대로 종이 위에 옮겨진 것 같은, 구불구불하고 낯선 획들.
이게 뭐야. 부장이 다른 서류를 준 건가.
그런데.
읽혔다.
마치 한국어처럼, 자연스럽게, 술술.
말도 안 돼.
심장이 벌렁거렸다. 손끝이 저릿했다. 이게 대체 뭔 일인지,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을 몇 번이나 비비고 다시 봤다. 여전히 그 낯선 문자들이었다. 그런데 여전히, 그 뜻이 머릿속으로 술술 들어왔다. 마치 내가 원래부터 알고 있던 언어였던 것처럼.
이거 진짜 뭐야.
손이 떨렸다. 이번엔 카페인 때문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