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세상이 잠깐 조용해졌다.
심연기사들의 창끝이 코앞까지 다가온 그 순간, 시간이 늘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꼭 게임에서 프레임이 뚝뚝 끊기는 것처럼.
'아, 이게 그 죽기 직전에 인생이 슬로우모션으로 보인다는 거구나.'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냥 뇌가 상황을 못 받아들여서 헛도는 것뿐이었다.
[알림: 수납 - 각성 완료]
[스킬 등급 변동: F → ???]
물음표라니, 이게 뭔 상태 메시지야.
평가서에 물음표 받아본 적은 살면서 딱 한 번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미술 숙제로 뭘 그렸는지 선생님도 몰라서 물음표를 받았던 그때.
지금 이 순간에 그 기억이 떠오르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 징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할 새도 없이,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손을 뻗었다.
그냥 뻗었을 뿐인데, 창끝이 통째로 사라졌다.
창을 쥔 심연기사의 팔까지 함께.
촤아앙-
"...뭐야." 나는 내 손을 내려다봤다.
분명 뭔가를 집어삼킨 감각이었다.
배가 부르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는데, 확실히 뭔가가 들어왔다.
손끝이 찌릿했다.
마치 정전기가 지나간 것 같은, 근데 훨씬 크고 훨씬 오래가는 느낌.
'설마 내가 방금 사람 팔을... 아니, 언데드 팔을 먹은 건가?'
소화가 안 될 것 같은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남은 세 마리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생각할 틈은 없었다.
십이 년 동안 F랭크로 살아오면서 배운 게 딱 하나 있다면,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순간에는 절대 몸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팔을 휘저었다.
촵! 촵! 촵-!
창이, 방패가, 갑옷의 파편들이 하나씩 허공에서 사라졌다.
마치 진공청소기가 지나간 자리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예전에 봤던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이 적을 손짓 한 번으로 지워버리는 장면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분명 우주 최강급 먼치킨이었고, 손짓 한 번에 함대를 지웠다.
딱 그런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건 만화였고, 지금은 현실이었다.
내 몸이, 내 손이 하고 있는 일이었다.
'나 지금 먼치킨 흉내 내는 거 아니지? 진짜 이거 실화지?'
현실감이 하나도 없었다.
꼭 남의 몸을 빌려서 조종하는 느낌이었다.
[알림: 개체 흡수 - 심연기사(1) 무력화]
[알림: 개체 흡수 - 심연기사(2) 무력화]
시스템 메시지는 계속 태연하게 떴다.
사람이 방금 뭘 했는지 알고나 저러는 건지.
'무력화라니, 표현 참 담백하네. 방금 나 사람 팔 뜯어서 먹은 거 같은데.'
남은 두 마리가 뒤로 물러섰다.
인간의 감정이 없다는 언데드가, 명백히 겁을 먹은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투구 안에 눈이 있는지도 모르겠는데, 그 안에서 뭔가 흔들리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너희들도 무섭구나. 나도 무서워. 우리 그냥 여기서 각자 갈 길 가면 어떨까.'
'와... 이게 뭐야.'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코피가 흘렀다.
예전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손등으로 훔쳐봤더니 손등이 그냥 새빨갛게 젖었다.
어지러웠다.
시야 끝이 하얗게 점멸했다.
하지만 몸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몸이 나한테 "너는 그냥 구경이나 해라"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 두 마리가 동시에 창을 던졌다.
나는 그걸 그냥 손으로 받아 넣었다.
마치 야구공을 캐치하듯이.
스트라이크 아웃.
심판이 있었다면 분명 삼진을 선언했을 거다.
촵! 촵-!
[알림: 개체 흡수 - 심연기사(3), (4) 무력화]
[전투 종료]
조용해졌다.
네 마리의 심연기사가 통째로 사라진 통로에는, 나 혼자 서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엉덩이에 닿는 바닥의 냉기가 그제야 느껴졌다.
'아, 나 아직 살아있구나.'
'살았다.'
그 생각밖에 안 들었다.
십이 년 만에 처음으로 게이트 안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몸을 관통하는 통증보다 컸다.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픈데, 마음은 이상하게 후련했다.
멀리서 카메라 드론 하나가 여전히 나를 비추고 있었다.
렌즈에 빨간 불이 켜져 있었다.
생방송 중이라는 뜻이었다.
이강준이 도망치면서도 카메라를 끄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 인간, 도망칠 정신은 있는데 카메라 끌 정신은 없었나 보네.'
하긴, 저 상황에서 카메라 생각하는 게 더 비정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 저거 아직 방송 켜져 있었네.'
나는 그냥 손을 흔들었다.
"어... 괜찮습니다, 살았어요." 나는 카메라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웃는다고 웃었는데 입가가 제대로 안 움직였다.
코피 때문에 입술도 벌겋게 젖어 있어서 아마 화면으로 보면 좀 무서운 그림이었을 거다.
채팅창이 있었다면 아마 난리가 났을 거다.
"저거 CG 아니냐", "몰카인가", "저 사람 랭크가 뭐임" 같은 댓글들이 미친 듯이 올라오고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채팅창을 볼 여유가 없었다.
온몸이 무너질 것처럼 아팠고, 그저 빨리 여길 빠져나가고 싶었다.
짐을 다시 챙겼다.
다행히 배낭은 그대로 있었다.
가방을 열어보니 통조림 몇 개가 찌그러져 있었다.
'저것들도 오늘 고생했다.'
허벅지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한 걸음 뗄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벽을 짚고서야 겨우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나는 그렇게 정리했다.
각성이라는 시스템 메시지도, 물음표로 뜬 등급도, 손짓 한 번에 사라진 심연기사 네 마리도.
전부 그냥 이번 한 번의 요행이라고 믿기로 했다.
십이 년 동안 F랭크였던 내가 갑자기 뭔가 대단해졌다는 걸 믿을 이유가 없었다.
로또도 십이 년 동안 한 번도 안 맞았는데, 갑자기 1등이 됐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딱 그런 심정이었다.
통로를 걸어 나가면서, 나는 이강준과 서하린을 다시 만났다.
둘은 안전한 곳에서 방송 장비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강준은 카메라 짐벌을 정리하다가 손을 멈췄고, 서하린은 물병을 든 채로 그대로 얼어붙었다.
나를 보자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살아있었네요." 이강준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미묘하게 어색했다.
사람이 살아 돌아온 걸 반가워하는 얼굴이 아니라, 뭔가 잘못 계산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뭐야, 방금 그 표정. 내가 죽었어야 그림이 됐다는 거야?'
"네, 운이 좋았습니다." 나는 그냥 웃어넘겼다.
'화나긴 하는데, 뭐라 할 힘도 없다.'
십이 년을 참아온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화를 내는 데도 에너지가 필요한데, 지금 내 에너지는 전부 다리에 몰려 있어서 여유가 없었다.
서하린이 힐끗 나를 보더니 시선을 돌렸다.
치료를 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손에 든 구급함을 열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방송 장비 케이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하다못해 붕대 하나 정도는... 아니, 됐다. 기대한 내가 바보다.'
나는 그냥 절뚝거리며 게이트 출구로 향했다.
등 뒤에서 두 사람이 뭐라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뭐라 하는지는 안 들렸지만,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다.
밖으로 나오자 저녁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게이트 특유의 축축한 공기 대신 저녁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 순간만큼은 살아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협회 직원들이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이거... 이거 실화입니까?" 누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누군가는 헤드셋을 붙잡고 어딘가에 급하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척, 그냥 지나쳤다.
오늘도 무사히 살아 돌아왔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집에 가서 라면이나 끓여 먹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계란도 하나 풀어서.
오늘 같은 날엔 그 정도 사치는 부려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휴대폰을 봤다.
화면에 금이 하나 더 늘어 있었다.
아마 아까 벽에 부딪혔을 때 생긴 것 같았다.
'수리비도 아까운데, 이것까지 각성했나?'
실시간 검색어 1위에 낯선 단어가 떠 있었다.
[정체불명의 초강자 등장?! 성수 게이트 생방송 사고]
'저게 뭔 소리야.'
클릭해서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이 잠깐 들었다.
하지만 손가락을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기사 속 인물이 나라는 걸 알게 되면 더 골치 아파질 것 같았다.
나는 그냥 화면을 끄고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그게 다였다.
버스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그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내일부터는 좀 다르려나.'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십이 년 동안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