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각성했는데 왜 저만 모릅니까

4화

붉은 눈동자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했다. 넷. 정확히 넷이었다. 셀 필요도 없었다, 그냥 눈에 보이는 족족 다 붉었으니까. 뎅- 뎅- 뎅-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통로를 울렸다. 무슨 절에서 치는 종소리도 아니고, 걸을 때마다 온몸에서 저런 소리가 난다는 게 벌써부터 심상치 않았다. 하나씩, 하나씩 어둠 밖으로 걸어 나왔다. 키는 다들 이 미터는 훌쩍 넘어 보였고, 갑옷은 무슨 오래된 관 뚜껑을 뜯어다 붙인 것처럼 시커멨다. [경고: 미확인 개체 감지 - 심연기사(추정)] '추정?' 이 상황에 추정이라는 단어가 붙는 게 더 무섭다는 걸, 시스템은 알고 있는 걸까. 심연기사. 협회 교본에서 딱 한 줄 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그것도 신입 교육 때 대충 훑고 지나간 페이지, 다들 "이건 우리랑 상관없는 얘기죠" 하고 웃으면서 넘긴 그 페이지에 적혀 있던 이름이었다. 50층 이상 구역에만 출현. A랭크 길드도 전멸시킬 수 있는 개체. 그런 게 30층대 신규 구역에 왜 있는지는 몰랐다. 정말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그게 지금 우리 앞에 넷이나 서 있다는 거였다. 그것도 짐꾼 하나, 신입 딜러 하나, 그리고 방송용 길드장 하나 앞에. "이건... 등급 초과입니다." 서하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떨리는 목소리로도 정확하게 상황 분석은 하는구나,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철수합니다! 지금 당장!" 이강준이 소리쳤다. 그 말은 맞는 판단이었다. 교본대로다, 매뉴얼대로다, 백 점 만점에 백 점짜리 판단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 행동이었다. "박도현 씨! 뒤를 맡아요!" 이강준이 나를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아니, 앞으로 나선 게 아니라, 나를 뒤에 세우고 자기가 먼저 도망칠 자리를 만든 거였다. 정확히는 내 어깨를 짚고 방향을 튼 것뿐이었다. '뭐라고?' 내 몸이 순식간에 회전당했다. 무슨 놀이공원 회전문도 아니고, 사람을 이렇게 확 돌려놓다니.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심연기사 하나가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콰앙! 돌바닥이 움푹 파였다.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등에서 식은땀이 확 솟았다. '와, 방금 저거 맞았으면 나 여기서 그냥 즉사네.' 머리가 그렇게 계산하는 동안 몸은 이미 반대쪽으로 굴러가 있었다. 이런 순발력이 있었으면 십 년 전에 진작 승진했을 텐데, 하필 이런 데서 쓰이는 게 억울했다. "길드장님, 저는...!" 나는 소리쳤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짐꾼이 시간 좀 벌어줘요! 방송 각도 잡아야 하니까!" 이강준이 뛰면서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방송. 지금 이 순간에도 방송 얘기가 나왔다. 어이가 없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한 번 더 확인했다. 아니, 정확히 들었다. 카메라, 각도, 방송. 내가 죽어가는 배경으로 저 인간 얼굴이 예쁘게 나오길 바라는 거였다. 서하린이 그 뒤를 따라 도망쳤다. "박도현 씨, 미안해요." 그녀가 잠깐 뒤를 돌아봤다. 눈이 마주쳤다. 정말로 미안한 표정이었다, 그건 인정한다. 그러고는 정말로 그냥 도망갔다. 미안하다는 말은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였다. 미안하면 손이라도 한 번 잡아주든가, 아니면 화살 한 대라도 쏴주고 가든가. '와, 진짜.' 나는 홀로 남았다. 네 마리의 심연기사와, 무겁기만 한 배낭 하나와, 십 년 넘게 쓸모없다고 취급받은 F랭크 스킬 하나. 배낭 안에는 물병 두 개, 로프 한 뭉치, 그리고 아무도 안 가져가는 잡템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이걸로 심연기사 넷을 막으라니, 이건 무슨 젓가락으로 탱크를 막으라는 소리와 다를 게 없었다. 죽었구나,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다음은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예전에 좋아했던 만화 주인공들은 이런 순간에 늘 멋진 대사를 남겼다.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같은, 그런 대사.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그 순간에 떠오른 건 오늘 아침에 먹은 편의점 삼각김밥이 유통기한이 얼마 안 남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딴 걸 마지막 생각으로 남기고 죽는 건가. "저기요, 잠깐만요!" 나는 그냥 소리를 질렀다. 먹히지 않았다. 당연했다, 심연기사한테 협상이 될 리가 없었다. 심연기사 하나가 창을 세웠다. 콰악! 창끝이 어깨를 스쳤다. 뜨거운 통증이 온몸을 관통했다. "으아악!" 나는 뒤로 굴렀다. 피가 옷을 적셨다. 숨이 가빠졌다. 시야가 흔들리고 통로의 불빛이 두 개, 세 개로 겹쳐 보였다. '이대로 죽으면... 아니, 뭐 이대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지.' 십 년 넘게 이런 삶을 살아왔다. 남는 게 없는 삶이었다. 짐꾼으로 시작해서 짐꾼으로 끝나는, 그런 인생. 누구도 내 이름을 기억하지 않을 거고, 협회 기록에는 "짐꾼 1명 사망"이라고만 적힐 거였다. 두 번째 창이 날아왔다. 나는 배낭을 앞으로 들었다. [경고: 신체 손상 위험] '그래, 알려줘서 고맙다.' 이 와중에도 시스템은 꼬박꼬박 경고를 날려줬다. 친절하다면 친절한 거고, 쓸데없다면 쓸데없는 거였다. 다급하게 몸을 굴렸지만, 다 피하진 못했다. 허벅지에 창이 스쳤다. "윽...!"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살이 타는 듯한 통증이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이대로면 몇 초 안에 정말로 끝날 것 같았다. 세 번째, 네 번째 기사가 동시에 다가왔다. 포위되고 있었다. 사방이 붉은 눈으로 가득 찼다. 도망칠 구멍이 없었다, 뒤도 앞도 옆도 다 저것들이었다. '죽는구나.' 이상하게도 무섭다는 감정보다 억울함이 먼저 올라왔다. 십 년을 그렇게 굴렀는데, 이런 데서 이렇게 끝나는 게 억울했다. 방송용 각도 잡느라 도망친 놈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던지고 간 여자 때문에, 내가 여기서 이렇게 끝난다는 게. 이럴 거면 처음부터 짐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배달이나 계속했어야 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순간, 손끝이 저절로 움직였다. 의지와는 상관없었다. 마치 몸속에 다른 뭔가가 깨어난 것처럼. [알림: 수납 - 조건 충족 감지] '뭐, 뭐라고?' 처음 보는 메시지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뜬 적 없는 문구였다. 십 년 넘게 [수납]이라는 스킬을 써오면서, 이런 문구는 단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다. 늘 똑같았다, "수납 완료", "수납 실패", 그게 다였다. 그런데 지금, "조건 충족 감지"라니. 무슨 조건인지, 뭘 충족했다는 건지, 아무 설명도 없이 그냥 그 한 줄만 눈앞에 떠 있었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 귓속에서 이명이 울렸다. 찌잉-! 온몸의 감각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마치 몸이 아니라 정신이 통째로 뒤집히는 것 같았다. 배낭 속에 들어 있던 물건들이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아니, 느껴진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건 감각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뭔가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울림이었다. 나는 그 순간,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좋은 쪽인지 나쁜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이제 되돌릴 수 없다는 거였다. [경고: 수납 - 강제 각성 개시] 각성이라는 글자가 눈앞에 떠 있었다. 십이 년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단어였다. 각성. 협회에서 그렇게 흔하게 쓰는 그 단어를, 나는 십이 년째 남의 일로만 봐왔다. 동료들이 각성하는 걸 지켜봤고, 후배들이 각성하는 걸 지켜봤고, 심지어 나보다 늦게 시작한 사람들이 각성해서 앞서가는 것도 지켜봤다. 나한테는 절대 뜨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단어가, 지금, 심연기사 넷에게 포위된 이 순간에, 하필 이런 순간에 눈앞에 떠 있었다. '설마... 지금?' 창끝이 이미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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