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그 소리는 벽 안쪽에서 나는 게 아니었다.
앞쪽, 어둠 속에서 나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였다.
가방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명 켜." 이강준이 낮게 지시했다.
서하린이 지팡이 끝에 빛구슬을 띄웠다.
동그란 빛이 통로를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하얀 빛이 통로를 비추자, 바닥에 흩어진 뼛조각들이 드러났다.
크기가 이상했다.
인간 뼈가 아니었다.
'저게 사람 팔뼈면 저 인간은 문어인가.'
길이가 내 팔의 두 배는 됐다.
"이건... 몬스터 사체인가?" 이강준이 검으로 뼈를 뒤집었다.
카앙, 검끝이 뼈에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부식 흔적이 없어요." 서하린이 말했다.
그녀는 무릎을 굽히고 뼈 표면을 손끝으로 스윽 문질렀다.
"그냥 오래된 게 아니라, 뭔가에 의해 처리됐다는 뜻이죠."
'처리됐다는 게 무슨 뜻이야.'
설거지처럼 깨끗하게 발라 먹혔다는 소리인가.
나는 짐을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봤다.
돌벽에 긁힌 자국이 가득했다.
마치 거대한 손톱으로 긁어놓은 것 같았다.
한 줄, 한 줄이 내 몸통만큼 굵었다.
예전에 보던 호러 게임 생각이 났다.
그런 게임에서는 이쯤 되면 항상 세이브 포인트를 찾아야 했다.
저장하고, 죽고, 다시 로드하고.
그게 그 시절 게임의 미덕이었다.
여긴 세이브 포인트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죽으면 그냥 죽는 거였다.
로드 버튼이 어딨는지 아무리 벽을 더듬어봐도 나올 리 없었다.
"박도현 씨, 앞장서요." 이강준이 말했다.
"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저 갑옷 그림자 같은 뼈 무더기를 보고도 그 말이 나와?'
"짐꾼이 함정 탐지도 하는 거잖아요." 그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런 얘기는 계약서에 없었는데.'
계약서엔 짐 운반, 야영 준비, 잡무 지원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함정 탐지라는 항목은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십 년 넘게 그래왔다.
말로 안 해도 몸으로 배우는 게 이 판의 룰이었다.
짐꾼은 늘 제일 앞이나 제일 뒤였다.
둘 다 위험한 자리였다.
앞은 함정, 뒤는 기습.
가운데는 딜러랑 힐러들 몫이었다.
'나는 그 중간을 가져본 적이 없지.'
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려가며 걸었다.
돌바닥에 이상한 홈이 파여 있었다.
딱 봐도 함정 자리였다.
'저건 밟으면 안 되겠다.'
옆으로 살짝 돌아 지나가려는데, 뒤에서 이강준이 재촉했다.
"뭐 해요, 빨리 가요."
'아니 지금 함정 피하려는 거잖아요.'
속으로 대답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그 순간, 발밑에서 딸깍 소리가 났다.
아, 이미 밟은 뒤였다.
콰자자작!
바닥이 갈라지며 아래로 화살이 튀어나왔다.
[경고: 함정 발동]
뭐야, 이제 알려주면 어떡하냐.
시스템 창은 늘 한 발 늦었다.
경고가 아니라 부고 아닌가, 이 타이밍이면.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굴렸다.
등이 돌바닥에 쓸리며 화끈했다.
슈아앙! 화살 하나가 어깨를 스쳤다.
뜨끈한 통증이 확 퍼졌다.
"윽!" 나는 짧게 신음했다.
그런데 그때,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손이 화살을 향해 뻗었다.
그리고 그걸 그냥 수납해 버렸다.
촵-
화살 세 개가 통째로 사라졌다.
허공을 갈랐던 궤적이 뚝 끊겼다.
[알림: 수납 발동 - 무의식]
'뭐야 이건.'
나는 어리둥절했다.
분명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손이 먼저 반응했다.
마치 몸이 위험을 감지하면 자동으로 스킬이 튀어나오는 느낌이었다.
꼭 옛날 오락실에서 하던 격투게임 필살기 커맨드처럼, 몸이 먼저 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커맨드를 배운 적이 없는데.
주위를 둘러봤다.
바닥에 남은 건 화살 구멍 세 개뿐이었다.
화살은 어디 갔냐고 물으면, 내 손안 어딘가에 있다고 답해야 했다.
인벤토리라는 게 있다면 아마 거기.
"괜찮아요?" 서하린이 형식적으로 물었다.
목소리에 걱정보다는 확인의 느낌이 강했다.
"네, 괜찮습니다." 나는 어깨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피가 살짝 났지만 큰 상처는 아니었다.
'이 정도면 반창고 한 장이면 되겠네.'
'또 운이 좋았네.'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지난 십 년간 죽을 뻔한 순간마다 항상 이런 식으로 넘어갔다.
스킬이 알아서 뭔가를 막아준 것 같은 느낌이 여러 번 있었다.
돌이켜보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낙석이 떨어질 때 손이 먼저 뭔가를 잡아챈 적도 있었고,
독가스가 퍼질 때 코를 막기도 전에 숨이 저절로 얕아진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냥 '반사신경이 좋은가 보다' 하고 넘겼다.
하지만 나는 그걸 늘 우연으로 치부했다.
각성이라니, 그런 만화 같은 일이 나한테 일어날 리 없었다.
십 년째 무각성자로 살아온 인간한테 이제 와서 무슨 스킬이 생기겠나.
그런 건 어린 애들 각성할 때 한 번 반짝 오는 거지, 서른 넘은 짐꾼한테 올 리가 없었다.
'그냥 몸이 알아서 피한 거야. 그래, 그런 거야.'
"조심해서 걸어요, 짐꾼 잃으면 골치 아프니까." 이강준이 무심하게 말했다.
짐꾼이라는 말이 이름 대신 쓰였다.
십 년째 그랬다.
박도현이라는 이름보다 짐꾼이라는 직함이 나를 더 잘 설명했다.
'뭐, 명함 파도 짐꾼이라고 박아야 할 판이니.'
'뭐 어때, 살았으니 됐지.'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오늘의 목표는 딱 하나였다.
살아서 돌아가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남들은 명성이니 랭킹이니 하는 걸 목표로 삼았지만, 나는 그냥 하루하루 숨 쉬는 걸 목표로 삼았다.
소박하다면 소박한 인생관이었다.
다시 걸었다.
어깨의 통증은 걸을 때마다 은근하게 따라붙었지만, 참을 만했다.
통로는 점점 좁아졌다가 다시 넓어졌다.
공기가 조금씩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통로 끝에 거대한 철문이 보였다.
문 위에 새겨진 문양이 아까 벽에서 본 것과 똑같았다.
소용돌이 모양의 그 문양은, 자세히 보니 눈동자 같기도 했다.
"여기가 신규 구역 입구인가." 이강준이 문을 밀었다.
그의 어깨 근육이 팽창했다.
문은 무거운 듯 잘 움직이지 않았다.
끼이이이익-
문이 천천히 열렸다.
쇳소리가 통로 전체에 울렸다.
안쪽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확 밀려왔다.
그 바람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쇠 냄새와 흙냄새가 섞인, 오래된 지하실 같은 냄새.
그 바람 속에서, 나는 뭔가를 봤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 하나가 번쩍였다.
그다음 두 개, 세 개, 네 개.
꼭 극장에 앉아 스크린이 켜지길 기다리는 관객들처럼, 어둠 속 눈동자들이 하나씩 불을 켜듯 나타났다.
일렬로 서 있는 갑옷 그림자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쇠가 쇠에 갈리는 듣기 싫은 마찰음이 났다.
끼릭. 끼릭.
"...뭐야, 저게." 이강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십 년 넘게 이 판에서 구른 남자의 목소리가 떨리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서하린이 지팡이를 든 손을 멈췄다.
빛구슬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통로 전체를 불안하게 밝혔다.
나는 그 순간 알았다.
저건 20층짜리 해골병사 따위가 아니라는 걸.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리고 손끝이, 아까와는 다른 방식으로 저절로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냐.'
이번엔 화살 세 개가 아니었다.
저 앞에 늘어선 건, 최소한 넷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