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각성했는데 왜 저만 모릅니까

1화

새벽 다섯 시, 협회 주차장. 형광등 하나가 깜빡거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깜빡, 깜빡, 지지직. 나는 그 밑에서 짐을 쌓고 있었다. 포션 상자, 마나석 배터리, 비상용 로프, 그리고 누군가의 여벌 갑옷까지. 짐이 아니라 이삿짐이었다. 박스 모서리에 손등을 긁혀서 피가 살짝 났는데, 그것조차 익숙했다. '열두 해째 이러고 있으니 이젠 아프지도 않네.' 옆에 세워둔 트럭에는 이미 절반쯤 짐이 쌓여 있었고, 나는 그걸 다시 재배치했다. 무게중심, 부피, 파손 위험도. 이건 거의 테트리스였다. 다만 여기서 지면 죽는 테트리스였다. [상태창] 이름: 박도현 나이: 32 랭크: F 직업: 포터(짐꾼) 스킬: 수납(F) 이걸 처음 봤을 때가 스무 살이었다. 그때는 이게 인생을 바꿔줄 거라고 생각했다. '수납이라니, 이거 완전 인벤토리 아니냐?' 두근거렸다. 그날 밤 잠도 못 자고 방 안 물건을 하나씩 다 넣어봤다. 컵, 리모컨, 심지어 냄비까지. 부모님이 냄비 어디 갔냐고 물었을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웃었다. 그때는 그게 재능인 줄 알았다. 십이 년이 지난 지금은 그냥 짐꾼용 스킬이었다. 용량은 딱 배낭 하나 반 정도. 그 이상 넣으면 코피가 났다. 실제로 났다. 지금도 콧속이 살짝 찡했다. 한 번은 욕심을 부려서 포션 한 병을 더 넣었다가, 코피가 삼십 분간 멈추지 않아서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었다. 의사가 물었다. "헌터세요?" "아뇨, 짐꾼입니다." "그런 스킬로도 코피가 나요?" 그때 그 표정을 잊지 못한다. 동정과 신기함이 반씩 섞인 얼굴이었다. "박도현 씨! 뭐해요, 빨리!" 홍염 길드 부관리자가 소리쳤다. "넵! 갑니다!" 나는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십 년째 이 대답만 하네.' 생각해보면 내 인생 최고의 스킬은 수납이 아니라 이 즉답 반사신경일지도 몰랐다. 부르면 대답하고, 대답하면 뛴다. 이게 짐꾼의 생존법이었다. 홍염은 A랭크 길드였다. 서울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곳. 건물 로비에만 들어가도 대리석 냄새가 났다. 물론 나는 로비로 안 들어가고 항상 주차장 쪽문으로 다녔다. 나는 거기 속한 게 아니라, 거기 딸린 짐꾼이었다. 소속과 부속은 한 글자 차이지만 삶은 완전히 다르다. 소속이면 명함이 나오고, 부속이면 출입증 대신 목에 거는 임시 카드가 나온다. 그 카드에는 내 이름 대신 '외부인력'이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엔 서운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책임질 일이 적으니까. 길드장 이강준이 걸어 나왔다. 마법검사, 잘생겼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웬만한 아이돌보다 나았다. 문제는 그게 본인도 안다는 거였다. 걸음걸이마저 카메라 앵글을 계산한 듯 부드러웠고, 아침 바람에 흩날리는 앞머리조차 연출 같았다. '저건 그냥 재능이 아니라 재난이다.' "오늘 촬영 팀 붙는 거 알지?" 그가 카메라 드론을 손짓하며 말했다. "압니다." 나는 짐을 정리하며 답했다. '또 방송이구나.' 이강준은 헌터 방송계의 스타였다. 던전 클리어 영상 하나에 조회수가 수백만. 그가 검을 한 번 휘두르면 실시간 채팅창에 별풍선이 폭죽처럼 터졌다. 나야 뭐, 화면에 잡히면 편집으로 잘려나가는 배경 소품이었다. 가끔 유튜브 댓글에 "저 뒤에 짐 들고 있는 사람 누구예요?"라는 질문이 달리면, 대답은 항상 "몰라요, 스태프인가"였다. 스태프. 정확히는 아니지만, 뭐 비슷하니까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서하린이 그 뒤를 따라 나왔다. 힐러, 아니 성녀라는 별명이 더 유명했다. 하얀 로브에 은빛 지팡이, 딱 그런 그림이었다. 걸을 때마다 로브 자락이 팔랑거렸는데, 그 모습이 무슨 광고 컷처럼 보였다. "짐 다 챙겼어요?" 그녀가 나를 보지도 않고 물었다. "네, 다 됐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저 목소리는 진짜 성우 같단 말이지.' 예전에 좋아했던 애니 여주인공 목소리랑 비슷했다. 근데 그 애니 여주는 짐꾼을 저렇게 안 봤는데. 그 애니 여주는 짐꾼한테도 이름을 불러줬다. 서하린은 십 년 넘게 나를 "짐꾼님" 아니면 "저기요"로 불렀다. 한 번은 실수로 "도현 씨"라고 불렀다가, 스스로도 놀란 표정을 지은 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속으로 조금 웃었다. '거참, 이름 하나 부르는 게 그렇게 어려운가.' 협회장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배 나온 오십대 아저씨였다. 숨이 턱까지 차서 말도 제대로 못 이었다. "이강준 길드장! 큰일 났어, 큰일!" 그가 소리쳤다. 목소리가 주차장 전체를 울렸다. "뭔데요, 아침부터." 이강준이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마저도 화보 같았다. "성수 게이트! 새 구역이 열렸어!" 협회장이 말했다. "그래! 그래! 이번 기회 놓치면 안 돼!" 협회장은 손을 마구 휘저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성수 게이트는 서울 도심에 뚫린 게이트 중 하나였다. 보통 40층까지만 개방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새 구역이 열렸다는 거였다. 40층이라니, 이건 웬만한 오락실 게임 최종보스보다 더 높은 층수였다. 문제는 이게 오락실 게임이 아니라 진짜라는 것. "신규 구역이면 등급 미확인 아닙니까." 서하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지! 그래서 홍염한테 부탁하는 거야!" 협회장이 손을 비볐다. 두 손을 비비는 그 동작이 어찌나 절실해 보이던지. '미확인이라는 말은 위험하다는 뜻이지.' 나는 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포션 개수, 로프 길이, 배터리 잔량. 괜히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십이 년을 하다 보면 이런 감이 생긴다. 정확한 이유는 못 대지만, 뒷목이 서늘해지는 느낌. 이게 틀린 적은 별로 없었다. "보상은?" 이강준이 물었다. 돈 얘기가 나오자 눈빛이 반짝였다. 그럼 그렇지, 결국 돈이었다. 세상 어떤 마법검사도 결국 통장 잔고 앞에서는 다 똑같았다. "국가 공로 훈장에... 방송 독점 계약도 붙여준다니까!" 협회장이 힘주어 말했다. 이강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방금까지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이, 마치 세일 기간 백화점을 발견한 사람처럼 바뀌었다. "좋습니다. 갑시다." 그가 웃었다. 서하린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방송 독점 계약이라는 말에 그녀의 눈빛도 미묘하게 달라졌다. 성녀도 결국 계약서 앞에서는 사람이었다. 나는 짐을 다시 짊어졌다. 십오 킬로짜리 배낭 두 개, 로프, 텐트, 그리고 수납 안에 채워 넣은 여분의 포션들. 어깨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오늘도 그냥 짐 옮기다 오는 날이겠지.' 십 년 넘게 그래왔다. 죽을 뻔한 날도 몇 번 있었지만, 결국은 살아서 돌아왔다. 그게 내 유일한 성과였다. 이력서에 적을 건 없어도,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스펙이라면 나는 만렙이었다. "박도현 씨도 같이 가는 거죠?" 협회장이 물었다. "네, 짐꾼이 안 가면 짐을 누가 옮깁니까." 나는 웃으며 답했다.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협회장은 그 말에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두드림이 생각보다 세서 배낭끈이 흔들렸다. 버스에 짐을 다 싣고 나자, 이강준이 카메라를 보며 웃었다. "자, 여러분! 오늘은 특별한 방송이 될 겁니다!" 그가 외쳤다. 채팅창 숫자가 벌써 만 단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숫자가 올라가는 속도가 무슨 주식 그래프 같았다. '나는 저기 안 나오겠지.' 안심 반, 서운함 반이었다. 십이 년째 이런 감정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적응이 안 됐다. 버스가 출발했다. 엔진 소리가 낮게 울리고, 창밖으로 서울 도심이 스쳐 지나갔다. 편의점 불빛, 문 닫힌 카페, 신문 배달원의 자전거. 평범한 아침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목덜미가 서늘했을까. 나는 그냥 배낭끈을 다시 고쳐 맸다. 버스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이 조금 굳어 있는 게 보였다. 오늘도 별일 없을 거라고, 그렇게 믿기로 했다. 버스 뒷자리, 짐칸 옆에 앉은 나는 눈을 감았다. 성수 게이트, 미확인 구역, 40층 이상. 머릿속으로 숫자들이 계속 맴돌았다. '설마 별일 있겠어.'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면서도, 손끝은 계속 로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버스가 도심을 빠져나가고, 저 멀리 성수 게이트의 거대한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그 검은 틈은, 마치 세상이 조금 찢어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틈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물론 그 바람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나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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