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머리가 핑 돌면서 무릎이 꺾였다.
철퍽.
흙바닥에 손을 짚었다. 시야가 잠깐 흐려졌다가 서서히 돌아왔다. 손바닥에 닿은 흙의 축축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이상하게도 그 촉감만은 선명했다.
"···뭐야, 이거."
[마력 고갈 경고입니다. 신체 회복이 필요합니다.]
마력 고갈이라니. 이세계에서 몬스터한테 쫓길 때도 이런 경고는 받아본 적이 없는데. 그때는 하루 종일 화염구를 쏴대도 마력이 줄어드는 느낌조차 없었다. 우물에서 물 퍼내듯 아무리 퍼도 다시 차오르는 게 이세계의 마력이었는데.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끝이 저릿저릿하고, 뒷목으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위장이 텅 빈 것처럼 헛헛한 느낌도 들었다. 밥을 굶은 것도 아닌데.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이세계에서는 마력이 무한하다고 느낄 정도로 넉넉했는데, 여기 와서는 한 번 밭을 살렸을 뿐인데 이렇게 소진된다는 게. 갑자기 배터리 용량이 백분의 일로 줄어든 스마트폰이 된 기분이었다.
[분석: 지구는 마나 밀도가 이세계 대비 현저히 낮습니다. 스킬 사용 시 화자 본인의 생명력을 직접 소모하는 방식으로 전환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생명력을 쓴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 몸이 실제로 그렇게 반응하고 있었다. 심장이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뛰고 있었고, 눈앞이 아직도 살짝 흔들렸다.
"그럼 이거 계속 쓰다 보면 나 죽는 거 아니야?"
[극단적인 남용 시 사망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말할 일이야?"
[추정: 남은 스킬은 총 3종 — 【토양개선】, 【품종개량】, 【감정】. 전투 계열 스킬은 귀환 과정에서 소실되었습니다. 세 스킬 모두 사용 시 체력을 대가로 지불합니다.]
전투 계열이 없어졌다는 얘기에 잠깐 아쉬움이 밀려왔다. 이세계에서 그렇게 애써 익힌 검기, 화염구, 순간이동까지 전부 사라졌다는 건가. 남은 게 겨우 흙 살리는 스킬, 씨앗 개량하는 스킬, 그리고 상태 보는 스킬이라니. 몬스터 대신 상대할 게 잡초와 진딧물이라는 소리였다.
"···그럼 이 감정만 하는 것도 힘이 든다는 거야?"
[감정은 소모량이 가장 적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안심하라는 말이 이렇게 안 위안이 되긴 처음이었다. 가장 적다는 게 아예 안 든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일단 오늘은 더 이상 스킬을 쓰지 않기로 했다. 대신 몸으로 직접 밭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삽을 들고 무너진 비닐하우스 골조를 하나씩 세우는데, 5년 전과 몸이 완전히 다르다는 걸 느꼈다. 이세계에서 단련된 근력 덕분인지, 예전보다 훨씬 힘이 좋았다. 팔뚝에 힘줄이 불끈 솟았고, 무거운 철골도 한 손으로 번쩍 들 수 있었다.
"이건 다행이네."
삽질을 몇 번 하는 사이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흙냄새와 땀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태양이 뜨겁게 목덜미를 데웠다. 등에 붙은 셔츠가 축축했다. 어디선가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댔고, 발밑에서는 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개구리 한 마리가 폴짝 뛰어 잡초 사이로 사라졌다.
골조를 세우고 흙을 고르고, 무너진 담장 돌을 다시 쌓는 데만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났다. 손바닥에는 물집이 잡히려는지 화끈거렸다. 이세계에서 검을 잡던 손이었는데, 여기서는 삽자루를 잡느라 아프다니 좀 억울했다.
일하는 중간, 집에서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나왔다.
"밥 안 먹고 뭐 하냐."
"할머니, 좀 쉬시라니까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내가 이 밭에서 30년을 살았는데, 어떻게 그냥 앉아만 있냐."
할머니는 평상에 앉아 나를 지켜봤다. 그 시선이 왠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동시에 편안했다. 삽질 소리, 흙 냄새, 그리고 할머니의 시선까지, 다 합쳐서 하나의 익숙한 풍경 같았다.
"할머니, 병원에서는 뭐라고 했어요? 허리가 얼마나 안 좋으신 거예요?"
할머니는 잠시 말을 아꼈다. 부채를 부치던 손도 잠깐 멈췄다.
"디스크가 두 마디나 나갔대. 이제 밭일은 무리라더구나. 앉았다 일어서는 것도 힘들어서···."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사실은 태준아, 이 밭 팔려고 했었다."
순간 삽질을 멈췄다. 손에 쥔 삽이 그대로 흙 위에 떨어졌다.
"팔려고 하셨어요?"
"응. 서인호라는 젊은 애가 있는데, 홍천 아그리프론티어라는 회사를 크게 키우고 있어. 이 근방 폐경지들을 다 사들이고 있더라. 나도 더는 못 할 것 같아서 팔까 했는데···."
[서인호는 최근 홍천 지역에서 급격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신흥 스마트농업 그룹의 대표입니다.]
그 이름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어감부터가 뭔가 반짝반짝하고 매끈한, 딱 요즘 스타트업 대표 이름 같았다.
"그런데 왜 안 파셨어요?"
할머니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눈가에 잡힌 주름이 더 깊어 보였다.
"네가 온다는 연락은 없었지만, 이 밭은 언젠가 네가 물려받을 거라고 늘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못 팔았지."
순간 목이 메었다. 5년 동안 연락 한 통 없던 손자를 위해, 몸이 아파도 밭을 놓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동안 뭘 했나. 이세계에서 몬스터랑 싸우고, 던전 깨고, 그런 거창한 일들만 하느라 정작 여기, 할머니가 아픈 허리로 버티고 있던 이 작은 밭 하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할머니."
"됐고, 밥이나 먹어. 국 끓여놨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걸음이 느리고 불안정했다. 지팡이 끝이 마당 흙바닥에 닿을 때마다 조그맣게 톡, 톡 소리가 났다. 나는 그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봤다. 등이 예전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밥상에는 정말로 국이 끓고 있었다. 된장국이었다. 뜨거운 국물을 한 입 떠먹자 속이 확 풀렸다. 마력 고갈로 텅 비었던 위장이 그제야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할머니는 맞은편에 앉아서 내가 먹는 걸 물끄러미 지켜봤다.
"많이 먹어. 살이 너무 빠졌구나."
"이세계 가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어요."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할머니는 그냥 웃기만 했다. 이세계가 진짜 있는지 없는지, 손자가 5년 동안 어디서 뭘 했는지 따져 묻지 않는 그 무심함이 오히려 고마웠다.
* * *
그날 밤, 나는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낮에 삽질한 팔다리가 뻐근했다. 이세계에서 검을 휘두르던 근육통과는 종류가 다른 통증이었다. 훨씬 소박하고, 훨씬 인간적인 통증.
마력은 유한하다. 그리고 사용할 때마다 내 생명력을 갈아 쓴다. 이건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까딱하면 밭 하나 살리려다 내가 먼저 골로 갈 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세 가지 스킬만으로도 밭 하나는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문제는 얼마나 신중하게, 얼마나 효율적으로 쓰느냐였다.
[제안: 토양개선은 초기 1회로 최대 효과를 이미 달성했으므로 향후 사용을 최소화하십시오. 대신 품종개량으로 작물 자체의 품질을 높이는 것이 체력 소모 대비 효율적입니다.]
"그럼 토마토부터 시작해볼까."
[품종개량 대상으로는 토마토가 가장 적합합니다. 성장 주기가 짧고 시장성이 높습니다.]
"오, 이런 건 또 되게 똑똑하게 아네."
[본 시스템은 농업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상당량 보유하고 있습니다.]
"몬스터 잡을 땐 그렇게 도움 안 주더니."
[해당 발언에 대한 답변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 뭐."
창밖으로 밭이 보였다. 달빛 아래 밭이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낮에 세운 비닐하우스 골조가 어둠 속에서 앙상한 뼈대처럼 서 있었다. 저 밭에서 토마토가 자라면 어떤 맛이 날까 궁금해졌다. 이세계에서도 과일이며 채소를 먹어봤지만, 이쪽 세계 토마토의 새콤달콤한 그 맛만은 그리웠다.
그리고 동시에, 낮에 들은 이름 하나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서인호. 홍천 아그리프론티어.
[정보: 해당 그룹은 최근 지역 농협과 협력 관계를 강화하며 시장 점유율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문덕수 소장과도 긴밀한 관계로 추정됩니다.]
"문덕수 소장이라면, 그 농협 직매소 소장?"
[그렇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접촉 빈도가 최근 급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거 뭔가 판이 커지는 느낌인데."
아직은 그저 이름 하나일 뿐이었지만, 왠지 앞으로 이 이름을 다시 듣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폐경지를 사들이는 젊은 사업가와, 지역 농업의 실세라는 소장. 그 둘이 손을 잡고 있다면, 할머니 같은 힘없는 농부들의 땅은 순식간에 잡아먹히기 십상이었다.
나는 그 예감을 애써 밀어내고 눈을 감았다. 내일부터는 진짜 농사가 시작이었다.
몸은 무겁고 마력은 텅 비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은 오랜만에 뭔가로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이세계에서 세계를 구하겠다고 뛰어다닐 때보다, 지금 이 작은 밭뙈기 하나를 살리겠다고 결심한 지금이 오히려 더 또렷했다.
창밖으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비닐하우스 골조가 삐걱, 낮게 흔들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마치 뭔가를 예고하는 것처럼 들렸다.
내일, 서인호라는 이름을 실제로 마주하게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