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마지막 결계, 첫 수확

3화

다음 날 아침,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밭에 나가자마자 승용차 한 대가 밭머리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 흰색 준중형차였다. 번호판 위쪽에 붙은 스티커에 '홍천농협'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차 옆에 선 남자는 50대 초반쯤 되어 보였다. 다린 지 얼마 안 된 듯 각이 살아 있는 셔츠에, 그 위로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조끼 가슴께에 걸린 명찰에는 '홍천농협 직매소 소장 문덕수'라고 적혀 있었다. 아침 공기가 차가운데, 저 남자만 유독 서늘한 기운을 두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강태준 씨 맞으시죠?" 목소리는 딱딱했다. 마치 서류를 읽듯 사무적인 어조였다. "네, 맞습니다." 나는 흙 묻은 손을 슬쩍 바지에 닦으며 대답했다. "어제 이 밭에서 이상 현상이 있었다는 신고가 들어와서요." [문덕수 소장은 이미 밭의 상태를 사진으로 세 장이나 찍어놨습니다.] 신고라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박원식 어르신이 설마. "신고요? 무슨 신고요?" "하룻밤 사이 폐경지가 최상급 토질로 바뀌는 게 정상적인 일이 아니잖습니까." 문덕수 소장은 품에서 태블릿을 꺼내 화면을 켰다. 손가락이 화면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더니, 색이 확연히 다른 두 장의 사진이 나란히 떠올랐다. 하나는 잿빛에 가까운 흙, 다른 하나는 짙은 갈색에 윤기가 도는 흙. "이게 정상적으로 가능한 일인가요?" 목소리에서 이미 대답을 정해놓은 듣기 나쁜 확신이 느껴졌다. "요즘 나온 신제품 토양개량제가···." "제품명이 뭡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질문이 날아왔다. 총알같이 빠른 반응이었다.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솔직히 지어낸 말이라 기억날 리가 없었다. 문덕수 소장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눈썹 사이 주름이 한 겹 더 깊어졌다. "강태준 씨, 저는 이 지역 농협 직매소를 15년째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별의별 토양개량제며 비료며 다 봤습니다. 이런 식의 급격한 토질 변화는 처음 봅니다. 만약 규정에 없는 방식을 쓰신 거라면, 향후 출하할 작물에 대해서도 정밀 검사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존댓말이었지만 그 밑에 깔린 경계심은 숨길 수가 없는 종류였다. "정밀 검사요?" "토양 성분, 잔류 물질, 생장 촉진제 사용 여부 전부 확인할 겁니다. 규격 밖의 작물은 유통 자체가 안 되거든요." [문덕수 소장은 조직의 규정과 선례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그건 그냥 답답한 원칙주의자란 소리잖아. 안 봐도 알겠다. "소장님, 그냥 밭 상태가 좋아진 걸 왜 문제 삼으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문제가 아니라 확인이 필요한 겁니다." 문덕수 소장은 태블릿을 다시 품에 넣으며 말을 이었다. "특히 신원이 확실치 않으신 분이 갑자기 이런 결과를 내면, 저희 입장에서는 규정상 조사를 진행할 의무가 있습니다." 신원이 확실치 않다는 말에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다. 5년 동안 다른 세계에서 마물 잡으며 죽다 살아난 사람한테 신원 확인을 하겠다니. 여기서 내 이력서를 쓴다면 '몬스터 웨이브 3회 생존, 던전 클리어 12회' 같은 걸 적어야 하나. "제가 여기 이순자 여사 손자인 건 확인하시면 될 거고요." "가족 관계는 확인 가능하죠. 문제는 재배 방식입니다." 문덕수 소장은 수첩을 꺼내 뭔가를 적었다. 글씨체가 얼마나 각진지, 여기서도 보일 정도로 획이 딱딱 끊어졌다. "일단 앞으로 이 밭에서 나오는 작물은 저희 직매소로 가져오시기 전에 사전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규격 위반으로 반품 처리될 수 있습니다." "사전 검사는 어디서 받는 겁니까? 시간은 얼마나 걸리고요?" "농업기술센터에서 진행합니다. 접수부터 결과까지 보통 일주일에서 열흘." 일주일에서 열흘. 그 사이 토마토가 다 익어서 물러 터지겠다. "그렇게 오래 걸린다고요?" "규정입니다." 문덕수 소장은 규정이라는 단어를 마치 무슨 신앙처럼 발음했다. 그러고는 인사도 없이 차에 올라 사라졌다. 배기구에서 나온 매연이 잠시 밭머리를 덮더니, 아침 바람에 흩어졌다. * * * 나는 밭 가운데 서서 문덕수 소장이 남기고 간 명함을 노려봤다. 명함은 얇았고, 종이 재질도 평범했는데,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규격 위반이라니, 참." 한숨이 나왔다. 이세계에서는 마력 등급이나 던전 위험도를 걱정했는데, 한국에 돌아와서는 유통 규격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게 급이 낮아진 건가, 높아진 건가. [감정【鑑定】: 문덕수 소장의 우려는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급격한 토질 변화는 일반적으로 인위적 화학처리를 의미합니다.] "내가 마법 썼다고 하면 더 의심하겠지." [그럴 확률 100%입니다.] 시스템 목소리가 이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는 건 처음 들어본 것 같다. 하긴, 갑자기 마법을 썼다고 하면 조사가 아니라 정신병원행이 될 게 뻔했다. 문덕수 소장이 태블릿 대신 구급차를 부르는 그림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때 멀리서 트럭 엔진 소리가 들렸다. 박원식 어르신이 트럭을 몰고 지나가다 나를 발견하고 멈춰섰다. 창문을 내리는 소리가 삐걱, 오래된 경첩 소리를 냈다. "태준이, 아침부터 얼굴이 왜 그래?" "농협 소장님이 다녀갔어요. 밭이 이상하다고 조사한다고 하시더라고요." 박원식 어르신은 혀를 찼다. 쯔, 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그 사람 원래 그래. 규정 이거저거 따지느라 정작 사람을 못 보는 양반이여. 20년 전에도 그 양반 때문에 애 먹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여." "20년 전에도요?" "그때는 무공해 인증 서류 하나로 반년을 끌더라니까. 그 서류 없으면 아예 접수도 안 받아줘. 걱정 말어. 밭 좋아진 게 무슨 죄여." [박원식 어르신은 문덕수 소장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말이 조금은 위안이 됐다. 적어도 나 혼자만 저 사람한테 시달리는 건 아니라는 뜻이니까. "어르신, 그런데 이 밭에 뭘 심어야 할지 아직 못 정했는데, 조언 좀 주실 수 있으세요?" 박원식 어르신은 트럭 시동을 끄지 않은 채 팔을 창밖으로 걸치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지었다. "토마토가 어때. 이 동네는 예전부터 토마토가 잘돼. 물 빠짐이 좋아서 그런가. 이 여사도 토마토 농사로 이름 좀 날렸었지." "할머니가요?" "몰랐어? 예전에 이 여사 토마토는 읍내 장에 나오면 반나절도 안 돼서 다 팔렸어. 맛이 아주 진했거든." 토마토라는 말에 뭔가 떠올랐다. 이세계에서 마지막으로 키웠던 작물도 토마토 비슷한 열매였다. 붉고 단단한 껍질에 과육은 진한 단맛이 나는 열매. 【품종개량】으로 개량한 그 열매는 마을 사람들이 서로 사겠다고 줄을 섰을 정도였다. 심지어 영주가 개인적으로 사람을 보내 매년 계약 재배를 요청했던 것도 기억났다. "토마토, 좋네요. 그렇게 해볼게요." "씨앗은 우리 집에 남는 거 있으니까 나중에 가져다줄게. 대신 나중에 잘 익으면 나도 몇 개 줘야 혀." "그럼요, 당연하죠." 박원식 어르신은 웃으며 트럭을 몰고 떠났다. 흙길 위로 먼지가 살짝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나는 밭 앞에 서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토마토를 키운다면, 【품종개량】을 어떻게 써야 할지. 어제처럼 밭 전체를 갈아엎듯 힘을 쏟았다가는 또 무슨 소란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리고 【토양개선】으로 밭 상태를 유지하는 게 규정상 얼마나 위험한지도 걱정이었다. 정밀 검사에서 잔류 물질이 뭐라고 나올지, 마력 성분을 검출하는 시약 같은 게 이 세계에 있을 리는 없겠지만. 문덕수 소장이 남기고 간 걱정이 마음 한켠에 계속 걸렸지만, 지금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할머니를 위해서라도 이 밭을 살려야지." 나는 소매를 걷고 밭에 다시 손을 댔다. 흙은 어제와 똑같이 서늘했고, 손끝에 닿는 감촉도 부드러웠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감각이 느껴졌다. 손끝에서 흘러나가는 힘이 이전보다 훨씬 미약했다. 마치 콘센트에 꽂았는데 전압이 절반도 안 나오는 느낌이었다. [경고: 마력 잔량이 부족합니다. 무리한 사용 시 신체에 부담이 갈 수 있습니다.] 순간 머리가 핑 돌았다. 눈앞이 잠깐 흐려지더니, 다시 밭이 초점을 잡았다. ···이건 또 뭔 소리야.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경고는 뜬 적이 없었다. 밭 전체를 뒤엎을 때도, 최상급 토질로 바꿀 때도 아무 문제 없었는데. 설마 어제 그 한 번으로 마력을 다 써버린 건가. 이세계에서는 마력이 부족하면 죽었다. 여기서는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등에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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