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능 0, 노비가 된 정혼자

4화

저녁 무렵, 하린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저택 깊숙한 곳에 있는 작은 응접실이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방 안의 공기가 다른 곳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촛불 몇 개만 밝혀둔 어두운 실내, 벽면 가득히 금원가와 설산가 두 문양이 나란히 새겨진 오래된 족자가 걸려 있었고, 그 족자 아래 놓인 낡은 목제 탁자 위에는 이미 무언가가 준비되어 있는 듯한 침묵이 감돌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이 자리가 단순히 새로운 노비를 소개받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오히려 이건 무언가를 통보받는 자리, 혹은 판결을 듣는 자리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방 안에는 하린과 나, 그리고 조금 전 신원 검증을 담당했던 진서라까지 셋뿐이었다. 진서라는 문가에 등을 기대고 서서 팔짱을 낀 채 나를 힐끗거리고 있었는데, 그 시선이 딱히 적대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호의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보는 듯한, 딱 그 정도의 눈빛이었다. "당주님께서는 오늘 몸이 좋지 않으셔서 서신으로 대신 뜻을 전하셨다." 하린이 그렇게 말하며 탁자 위에 봉인된 서신 한 장을 올려놓았다. 붉은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그 서신은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오래된 것처럼 종이의 질감이 누르스름했고, 봉인을 뜯는 그녀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는 걸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건 단순한 긴장이 아니라, 이미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던 내용을 다시 확인해야 하는 사람이 느끼는 종류의 떨림처럼 보였다. 서신을 읽어 내리는 하린의 목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갈랐다. "금원가와 설산가 사이의 약속은, 십 년 전 두 당주의 서명으로 이미 성립되었다." 십 년 전이라니. 나는 그 숫자를 듣는 순간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해보았다. 십 년 전이면 나는 아직 명문가에서 축출되기도 전이었고, 결함체 판정을 받기도 전이었다. 그러니까 이 약속이라는 건, 내가 아무런 결함도 없던 시절부터 이미 정해져 있던 것이라는 뜻이었다. 금원가와 설산가를 비롯한 명문가들은 대대로 가문 간의 혼약을 문서화된 계약으로 성립시키는 관례가 있으며, 이렇게 성립된 계약은 당사자의 개인적 의사와 무관하게 절대적 효력을 가진다. 이를 파기할 경우 성립시킨 두 가문 모두에게 중대한 사회적, 실질적 손해가 발생하는 것으로 간주되며, 명문가 사회 안에서 파기 가문은 신뢰를 완전히 상실한다. 파기 가문에게는 이후 모든 거래와 혼사, 심지어 정치적 동맹에서도 배제되는 실질적 제재가 뒤따르며, 그 때문에 혼약 파기는 실질적으로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명문가의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 정도로만 존재했던 파기 사례들은 모두 가문 하나가 완전히 몰락하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걸 알고 있으니까 하린의 손끝이 떨렸던 거겠지. 이건 그냥 종이 한 장이 아니라, 두 가문의 명운이 걸린 사슬이었다. "강인우와 금원하린은, 각 가문의 사정과 무관하게 성년이 되는 시점에 혼인을 성립시킨다." 하린이 서신의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방 안의 공기가 완전히 멈춰버린 것 같은 감각에 사로잡혔다. 촛불의 그림자가 벽에서 흔들리는 것마저 느려진 것처럼 느껴졌고, 내 심장 소리만이 유독 크게 귀에 울렸다. "...뭐라고요?" 내가 어이없는 목소리로 되묻자, 진서라가 옆에서 팔짱을 낀 채 낮게 혀를 찼다. "들었잖아. 결혼한다는 거지." "아니, 저는 그냥 계약 노비로 팔려온 거 아닙니까." "매입 계약과 혼약 계약, 둘 다 유효하니까." 진서라는 마치 오늘 날씨 이야기를 하듯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뱉었고, 나는 그 태연함에 오히려 더 어이가 없어졌다. 이 여자는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미친 소리처럼 들리는지 전혀 모르는 건가, 아니면 알면서도 신경 쓰지 않는 건가. 하린이 서신을 접으며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에는 놀라움도 당황도 없었다.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을 그저 확인시켜주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너를 매입한 건 노비로 부리려는 게 아니라, 이 혼약을 성립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그동안 품고 있던 의문들이 하나씩 맞춰지는 걸 느꼈다. 왜 굳이 결함체인 나를, 명문가에서 축출된 사람을 매입까지 해가면서 데려왔는지, 왜 하린이 처음부터 내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왜 신원 검증 과정에서 진서라가 나를 유독 꼼꼼하게 살펴봤는지, 그 모든 게 이 서신 한 장으로 설명이 되고 있었다. "저는... 동의한 적이 없는데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하린의 표정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건 냉랭함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받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짧은 순간의 균열을 보면서, 나는 이 여자도 이 상황이 결코 유쾌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문의 약속은 개인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다시 표정을 정리했다. 마치 방금 전의 흔들림 같은 건 없었다는 듯, 순식간에 다시 서늘한 얼굴로 돌아갔다. "이건 우리 두 가문 모두에게 지켜야 할 절대적인 법도야." 하-. 씨발, 이게 뭔 개소리인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욕을 뱉었다. 명문가 놈들이란 게 원래 이런 식이었나. 사람 하나를 계약서 한 장으로 매입해다가, 이제는 계약서 한 장으로 결혼까지 시키겠다는 건가. 이게 사람인지 물건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런데 하린의 표정 속에 담긴 흔들림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그녀 역시 이 상황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조금은, 아주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당신도 원한 게 아니잖아요." 내가 조심스럽게 그렇게 말하자, 하린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 안에 여러 감정이 섞여 있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결국 그 감정들을 전부 삼키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나는 이 약속을 지킬 거다. 그게 금원가의 적녀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그 말이 어딘가 슬프게 들렸다. 마치 그녀 역시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눌러 온 사람처럼.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다시 들여다보았는데, 거기에는 분명 어떤 오래된 피로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약속을 짊어지고 살아온 사람의 눈빛이었다. 진서라가 그 사이 짧게 웃음을 흘리며 팔짱을 풀었다. "뭐, 나야 상관없지. 결함체든 뭐든, 당주님 명령이니까." 그녀의 그 무심한 태도가 오히려 이 상황의 무게를 덜어주는 것 같았지만, 나는 이 모든 게 결국 내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애초에 이 저택에 팔려올 때부터 내 인생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노비 신분이 아니라 혼인이라는 형태로 나타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럼 이제부터 저는 뭘 해야 하는 겁니까." 내가 힘없이 묻자, 하린은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짧게 답했다. "오늘은 그냥 쉬면 된다. 앞으로의 일들은 차차 알게 될 거야." 앞으로의 일들이라니. 그 말이 유독 불안하게 들렸다. 그 무렵, 설산가에서는 전혀 다른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은소민은 대전에서 나온 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인우가 이미 마차에 태워져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그녀는 다른 신관이나 가솔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매입처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택의 마부들을 붙잡고 마차가 향한 방향을 캐물었고, 관문을 지키던 병사들에게까지 다가가 통행 기록을 확인하려 들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집요했던지, 처음에는 그녀를 말리려던 가솔들조차 나중에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 그녀가 하는 대로 지켜보기만 했다. 이는 단순한 걱정을 넘어선 행동이었으며, 설현암이 은밀히 진행하려던 계획의 흔적을 그녀가 직접 파헤치기 시작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설현암의 측근들 중 하나는 은소민의 이 움직임을 보고서로 올렸고, 그 보고서를 받아본 설현암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나는 이 저택 안에서 벌어지는 나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 정작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은소민의 발걸음이 설현암에게 얼마나 위협적인 일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하린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렇게 말했다. "네 방은 서라가 안내해줄 거다." 그녀가 방을 나서기 직전, 문 앞에서 잠깐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촛불의 불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반사되어 잠깐 흔들렸는데, 그 표정이 방금 전까지의 담담함과는 조금 다른, 훨씬 더 사적인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강인우." "...예." "어릴 때 네가 나한테 했던 약속, 기억하고 있어?" 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어릴 때의 약속이라니, 나는 그런 걸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이 여자를 어릴 때 만난 기억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당연히 내가 기억하고 있을 거라 확신하는 듯한 얼굴로 그 질문을 던졌고, 그녀의 눈동자 안에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간 그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냉랭함 하나만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닫고 나갔고, 나는 그 자리에 홀로 남아 방금 들은 말의 무게를 가늠하며, 이 저택 안에서 시작될 앞으로의 시간이 결코 단순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약속, 그리고 기억해야만 할 것 같은 이 이상한 압박감. 도대체 어릴 때의 나는 저 여자와 무슨 관계였던 걸까. 그 답을 찾기도 전에, 나는 이미 이 저택 깊은 곳으로 한 발 더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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