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쫓겨났더니 미소녀 유튜버라니

4화

빛이 걷히자 상태창이 새로 떠올랐다. [클래스 해금: 저주받은 병약자 → 심연의 대체자] [체력 낮을수록 마력 출력 상승] [체력 10% 이하 구간에서 전 스킬 위력 300% 적용] 도현은 그 문구를 두 번 읽었다. 세 번째로 다시 읽었다.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이거 완전 사기잖아. 도현이 낮게 웃었다. 체력이 낮을수록 강해지는 클래스. 체력이 바닥일 때 위력이 세 배로 뛴다는 조건. 보통 배포자라면 이런 클래스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봤을 거다. 체력을 항상 낮게 유지해야 하니까. 자칫하면 진짜로 죽을 수도 있는 조건이니까. 하지만 도현에게는 그 조건이 조건이 아니었다. 원래 몸이 튼튼했다. 남들보다 체력이 두 배는 많았다. 체력을 10% 이하로 유지하는 것쯤도 도현에게는 여유 있는 숫자였다. 다치는 척, 힘든 척만 하면 됐다. 실제로 안 다쳐도 됐다. 연기는 원래 자신 있는 분야였다. 블랙폭스일 때도 그랬다. 사람들 앞에서 지친 척, 아픈 척 하는 건 숨 쉬듯 쉬운 일이었다. 이번엔 그 연기가 진짜 스킬 위력으로 이어진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슬라임이 마지막 돌진을 마쳤다. 바닥을 밀어내며 튀어 오르는 몸짓. 느릿하지만 확실한 궤적으로 도현을 향해 날아들었다. 도현은 손끝에 마력을 모았다. 작은 몸짓,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위력은 전혀 작지 않았다. 체력 게이지가 눈금 하나만 남은 상태였다. 퍼억. 슬라임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파편. 1계위 최약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퀘스트 클리어] [신규 배포자 첫 클리어 보상 지급] 댓글창이 잠깐 조용했다가 다시 움직였다. 뭐야 방금 그거. 슬라임이 왜 저렇게 죽어. 연출인가? 저거 리얼임? 도현은 카메라 앞에서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살짝 벌린 채, 손을 떨듯 흔들었다. 윤하은의 목소리로 떨리듯 말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무서워서 눈 감고 손 흔들었는데. 연기가 아주 자연스러웠다. 도현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댓글 몇 개가 더 붙었다. 병약 컨셉인데 은근 세네. 반전 있는 듯 병약 캐릭터 좋아함. 계속 볼게요. 저 목소리 뭔가 계속 듣고 싶음. 시청자 수가 4명에서 11명으로 늘었다. 작은 변화였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도현은 그 숫자를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병약한 척하는 게 오히려 먹히네. 카메라 각도를 살짝 조정하는 척하며 남은 시간을 채웠다. 슬라임 두 마리를 더 잡았다. 매번 체력을 극한까지 낮춘 척 연출한 뒤 한 방에 터뜨렸다. 댓글창의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고 있었다. 방송을 끝낸 뒤 도현은 지하철 폐역 근처 벤치에 앉았다. 차가운 벤치 표면이 등을 타고 스며들었다. 스마트폰으로 채널 통계를 확인했다. 구독자 37명. 어제까지 0명이었던 걸 생각하면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백만까지는 한참 멀었다. 숫자만 놓고 보면 여전히 초라했다. 도현이 한숨을 쉬며 화면을 내렸다. 댓글 몇 개를 더 읽었다. 저 캐릭터 뭔가 신비로움. 말투랑 표정이 안 어울리는 느낌이 매력적. 조용한데 셀 것 같은 느낌 좋다. 목소리 좋아요. 도현의 눈이 그 댓글에서 멈췄다. 안 어울리는 느낌이 매력이라니. 같은 줄을 두 번 더 읽었다. 이거 완전 콘셉트로 밀어볼 만한데. 청순하고 병약해 보이는 겉모습과 실제로 압도적인 전투력. 그 간극 자체가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원래 블랙폭스일 때는 그 간극이 오히려 욕을 먹는 이유였다. 무능한 것처럼 보이는데 세다고 우기면 이상하게 보였다. 설정충이란 말도 몇 번 들었다. 컨셉이 억지스럽다는 댓글도 많았다. 하지만 윤하은은 다르다. 연약해 보이는 소녀가 갑자기 강해지는 그림. 그건 이야기가 되는 반전이었다. 같은 간극인데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도현이 벤치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컨셉을 바꾼 게 아니라 이제야 컨셉이 맞은 거네. 다음 방송 기획을 머릿속으로 굴렸다. 일부러 위태롭게 버티다가 극적으로 뒤집는 구성. 체력을 낮게 유지하며 싸우는 연출. 숨을 헐떡이는 척하다가 한순간에 몰아치는 타이밍. 계획이 잡히자 걸음이 가벼워졌다. 머릿속으로 대본까지 그리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화장을 지우며 스마트폰을 다시 확인했다. 면봉으로 눈가를 닦아내면서 화면을 흘겨봤다. 구독자 수가 어느새 52명으로 늘어 있었다. 삐리릭. [뒷세계 커뮤니티 인기글] [제목: 어제 처음 본 배포자인데 뭔가 있음 (윤하은)] 도현의 눈이 그 게시글 제목에서 멈췄다. 벌써 커뮤니티에 올라갔어? 손이 멈춘 채로 화면을 다시 봤다. 클릭해서 내용을 확인했다. 짧은 영상 클립과 함께 몇 줄의 글이 있었다. 체력 10퍼센트에서 한 방에 슬라임 터짐. 연출이라 해도 타이밍이 소름. 다음 방송 기대됨. 저 클래스 뭔지 아는 사람? 조회수는 이미 800을 넘어가고 있었다. 숫자가 도현이 보는 사이에도 조금씩 올라갔다. 도현은 화면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거 생각보다 빠르게 갈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동시에 다른 걱정이 스쳤다. 너무 빨리 눈에 띄면 안 되는 것도 있었다. 클래스 이름이 저렇게 공개된 채로 돌아다니는 게 마음에 걸렸다. 혹시 누가 알아채면 어쩌지. 도현이 잠깐 표정을 굳혔다가 곧 풀었다. 설마. 목소리도 다르고 얼굴도 다른데.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완전히 안심되지는 않았다. 화면을 몇 번 더 내리다가 결국 껐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웠다. 창밖으로 늦은 밤 사이렌 소리가 다시 울렸다. 멀리서 시작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다시 멀어졌다. 뒷세계 이상현상 관련 뉴스가 계속 뜨고 있었다. 등급전 확대, 신규 배포자 급증, 규제 완화 논의. 자막이 스쳐 지나가듯 흘러갔다. 세상이 빠르게 바뀌는 중이었다. 도현은 그 흐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 두 달. 백만. 도현은 눈을 감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번엔 진짜 시작이다. 암막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 천장에 흐릿한 줄을 그렸다. 도현은 그 줄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내일 방송에서 어디까지 밀어붙일지, 머릿속에서 계속 대본이 돌아가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