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월하검, 던전밥상

2화

동네 어귀 공터에 균열이 생긴 건 일주일 전이었다. 원래 폐업한 편의점 자리였다. 한때는 삼각김밥이랑 컵라면을 팔던 곳인데, 사장님이 임대료를 못 견디고 나간 뒤로 몇 달째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거기가 흉물이라고 뒷담화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바닥에 손바닥만 한 검은 틈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았다. 처음엔 다들 장난인 줄 알았다. 싱크홀이겠지, 하수구 공사하다 뭐 터진 거겠지, 하고 넘겼는데 며칠 만에 그 틈이 사람 하나 들어갈 크기로 자랐다는 뉴스가 떴다. 지역 커뮤니티 앱에는 "우리 동네에 던전 생겼어요 ㅋㅋㅋ" 라는 제목의 글이 조회수 만 회를 넘겼다. 나는 그 글에 댓글로 "장사 잘되나요?" 라고 달았다가 지웠다. 관리공단 직원들이 노란 펜스를 치고 안내판을 세워놓은 건 그 다음 날이었다. [본 지점은 국가지정 3급 던전입니다. 무자격자 출입 시 벌금 500만원.] [탐사 희망자는 공단 앱 사전신고 후 입장 가능.] 행정 절차는 던전 안까지도 따라오는구나. 이세계 게이트가 열려도 대한민국은 결국 신고제로 굴러가는 나라였다. 나는 앱을 켜서 신고서를 작성했다. 앱 이름부터 「던전안전관리종합포털」이었는데, 폰트가 딱 관공서 특유의 그 맑은고딕이라 신뢰도가 급상승했다. 항목이 생각보다 많았다. 장비 목록, 예상 체류 시간, 비상 연락처, 동반자 여부, 보험 가입 여부, 그리고 「탐사 목적」란까지. 칸을 채우려다 잠깐 멈췄다. 채집(요리 재료)이라고 쓰자니 좀 이상했고, 그냥 「몬스터 채집」이라고 적었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니까. 「예상 체류 시간」에는 2시간이라고 적었다가 지우고 3시간으로 고쳤다. 손질까지 하면 시간이 좀 걸리니까. 전송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승인 알림이 왔다. [신청이 승인되었습니다. 안전한 탐사 되시길 바랍니다.] 친절한 척하는 문장이었지만 왠지 뒤에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펜스 앞에 있던 공단 직원이 내 신고서를 확인하며 물었다. "1등급이시네요. 3급 던전은 좀 위험할 수도 있는데, 처음이세요?" "거의 처음이요." "거의, 라는 건 뭐예요?" "동네 뒷산 던전 몇 번 가봤어요. 거기는 1급이라 슬라임 정도만 나오더라고요."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블릿에 뭔가를 체크했다. "장비는요?" 나는 가방을 열어 보였다. 웍, 칼 세트, 아이스박스, 그리고 예전 검도장에서 쓰던 죽도 대신 급하게 산 등산용 마체테 하나. 직원이 잠깐 말을 잃었다. "...요리하러 오셨어요?" "네." "이거 무기 등록은 하셨어요? 마체테는 3급 이상 위험 장비로 분류돼서..." "어제 등록했습니다. 캡처해놨어요." 나는 휴대폰을 꺼내 등록증 화면을 보여줬다. 직원은 뭐라 더 말하려다가 그냥 고개를 저으며 통과시켰다. "요즘 던전 요리 유튜버가 많다더니, 진짜였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딱히 부정할 말도 없어서 그냥 웃었다. 촤르르르륵! 펜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균열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몇 걸음 걸어 들어가니 예상외로 밝은 공간이 펼쳐졌다. 습기 찬 동굴 같은데 이끼가 형광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인테리어 조명을 잘못 설치한 힙한 카페 같은 느낌이었다. 바닥엔 물기가 살짜기 배어 있어서 발을 디딜 때마다 촵, 촵 소리가 났다. 공기는 서늘했지만 습했고, 어딘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톡. 톡. 톡.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무섭지 않고 오히려 백색소음처럼 편안했다. "오." 나도 모르게 소리가 나왔다. 생각보다 예뻤다. 인스타 감성 던전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벽면에는 이끼 말고도 작은 버섯 같은 것들이 자라 있었는데, 그것들도 은은하게 파란빛을 냈다. 혹시 저것도 먹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일단은 지나쳤다. 첫날부터 너무 욕심부리면 안 된다. * 첫 몬스터를 만난 건 안으로 오 분쯤 걸었을 때였다. 초록색에 사람 몸통만 한 덩어리가 바위 뒤에서 튀어나왔다. 다리는 없고 촉수 같은 게 여러 개 달려 있었다. 생김새가 딱 마트에서 파는 해파리냉채용 해파리를 확대해놓은 것 같았다. 키에에엑! 괴상한 울음소리를 내며 촉수를 휘둘렀다. 그럴 리가. 지금 저게 나를 공격하는 건가. 뭐지? 생각은 짧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촉수가 날아오는 각도, 속도, 그 사이의 빈틈이 눈에 다 보였다. 어릴 때 도장에서 배운 감각이 갑자기 되살아난 것처럼, 발이 자연스럽게 반보 물러나고 손목이 돌았다. 촥! 마체테가 촉수 하나를 잘랐다. 괴물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키에에엑! 키에엑! 두 번째, 세 번째 촉수가 연달아 날아왔다. 나는 그것도 하나씩 처리했다. 몸을 낮추고, 반보 이동하고, 손목을 돌리고. 마치 도장에서 품새 연습을 하는 기분이었다. 다른 점은 상대가 실제로 나를 죽이려 든다는 것 정도였다. 나는 그 상황에서 이상하게 흥분되지도, 무섭지도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에 스쳐간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거 손질하면 육질 어떨까.' 요리사 10년 짜리 본능이 위기 상황에서도 재료를 감정하고 있었다. 이게 정상인 반응인지 스스로도 의심스러웠지만, 몸은 이미 답을 내린 상태였다. 괴물은 몇 번 더 촉수를 휘두르다가 결국 힘이 빠져 쓰러졌다. 털썩. 의외로 조용한 최후였다. 나는 그제야 다가가서 살펴봤다. [슬라임 젤리 몬스터 - 초급 등급, 식용 가능, 담백한 육질로 알려져 있음] 스마트폰 도감 앱에 그렇게 떴다. 담백하다는 정보에 왠지 신뢰가 갔다. 앱에는 손질 방법이랑 추천 요리법까지 나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냉채 추천"이었다. 이미 답이 정해져 있는데 굳이 창작할 필요는 없었다. 칼로 배를 갈랐다. 촤르르르륵! 안에서 투명한 젤리 같은 게 흘러나왔다. 비린내는 없었고, 오히려 은은하게 시원한 오이 향이 났다. 손끝에 닿는 촉감도 신기했다. 흐물흐물한데 탄력이 있었다. 마치 최고급 도토리묵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이거 냉채로 하면 되겠는데." 혼잣말이었지만 왠지 확신이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서 젤리 부분을 발라내고 아이스박스에 담았다. 괴물을 잡은 지 5분도 안 돼서 다음 관심사는 이미 손질법으로 넘어가 있었다. [욥기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겠느냐] 리워야단은 아니지만, 뭐 낚긴 낚았다. 젤리로. * 그날 나는 슬라임 젤리 몬스터를 세 마리 더 잡았다. 같은 방식이었다. 촉수가 날아오면 반보 물러나서 자르고, 쓰러지면 감정하고, 손질했다. 두 번째 놈은 조금 더 컸는데, 젤리 양도 그만큼 많이 나왔다. 세 번째 놈은 도망을 치려고 했는데, 도망치는 몬스터를 놓치면 재료를 놓치는 것과 같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쫓아가서 잡았다. 돌이켜보면 그게 제일 위험한 순간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그런 생각도 없었다. 네 번째 놈은 크기가 작아서 잡을까 말까 고민했지만, 그냥 재료 양을 채우자는 생각으로 처리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내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원래 나는 겁이 많은 편이었다. 벌레 한 마리 나와도 화들짝 놀라는 타입이었는데, 촉수 달린 괴물 앞에서는 그런 반응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재료 앞에서는 두려움이 마비되는 특이한 체질인지도 모른다. 돌아오는 길에 공단 직원이 다시 나를 세웠다. "채집물 검사 좀 할게요." 아이스박스를 열어 보였다. 직원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거... 다 젤리 부위만 골라내신 거예요? 몬스터 사체는 어디 있고요?" "놔두고 왔어요. 안 필요해서." "보통 사체도 부산물로 신고를 하셔야 하는데... 이걸 이렇게 깔끔하게 손질하시려면 보통..." 직원은 말을 하다 말고 그냥 고개를 갸웃하며 도장을 찍어줬다. "혹시 요식업 하세요?" "네, 뭐 비슷한 거." "그럴 것 같았어요. 손질 상태가 무슨 정육점 사장님 같아서."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이었지만 규정 위반은 아니었으니 넘어가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온 나는 젤리를 씻고 얇게 썰어 냉채 소스에 무쳤다. 소스는 간단했다. 식초, 설탕, 간장, 참기름, 그리고 다진 마늘 조금. 그릇에 담아 오이랑 당근 채를 곁들이니 그럴싸한 요리가 완성됐다. 한 입 먹었다. [전도서 3:1,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지금은 확실히 이걸 방송할 때였다. 맛이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식감은 도토리묵과 오이를 섞은 느낌이었고, 향은 여전히 시원했다. 씹을 때마다 은근한 탄력이 있어서 계속 젓가락이 갔다. 이건 진짜다. 이건 방송에 올려도 될 물건이다.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SOOP 방송 개설 화면을 켰다. 닉네임을 뭐로 할까 잠깐 고민했다. [닉네임을 입력하세요] 본명으로 하기엔 부담스러웠고, 그냥 '요리사123' 같은 걸로 하기엔 너무 없어 보였다. 예전 도장에서 쓰던 죽도 이름이 '월하'였던 게 기억났다. 달빛 아래서 휘두른다는 뜻으로 사범님이 지어준 이름이었다. 그땐 그 이름이 좀 오글거린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나쁘지 않았다. 나는 그 뒤에 검을 붙였다. 월하검. 던전에서 마체테로 몬스터를 썰고, 부엌에서 그걸 요리하는 채널 이름으로는 딱이었다. 방송 시작 버튼을 눌렀다. 첫 시청자는 3명이었다. 화면 구석에 뜬 채팅창에 누군가 짧게 남긴 글자가 보였다. "뭐하는 방송이에요?" 나는 카메라 앞에 젤리 냉채가 담긴 그릇을 들이밀며 웃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대답할지, 그리고 이 채널이 어디까지 커질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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