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차는 결국 도로를 벗어나 도랑에 처박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앞유리에 실금이 갔다. 에어백은 터지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정도로 낡은 렌터카였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안전벨트 덕분인지, 아니면 그냥 운이 좋았던 건지, 그건 지금도 잘 모르겠다.
"다인아, 괜찮아?"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경미한 충격이었습니다. 문제없습니다."
"경미한 게 아니라 그냥 사고야, 이거!"
옆자리에서 태연하게 안전벨트를 풀고 있는 다인을 보며 나는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방금 도랑에 처박힌 사람이 저렇게 담담할 수가 있나. 열다섯 살짜리 애가 나보다 침착한 것도 문제 아닌가, 싶었지만 그런 걸 따질 여유는 없었다.
뒤에서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풀숲을 헤치는 소리,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사람 발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명이었다. 나는 다인의 팔을 잡고 반대편 문을 열었다.
"내려. 지금."
결국 우리는 차를 버리고 도보로 산길을 벗어났다. 신발 밑창으로 젖은 흙과 자갈이 밀려들어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종아리가 타는 것처럼 아팠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인은 내 옆에서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걷고 있었다. 저 자세, 저 리듬. 이상하다는 걸 알아챈 건 이미 그때부터였는데, 나는 애써 못 본 척했다.
새벽이 오기 직전, 지나가던 트럭 한 대를 겨우 세워서 얻어 탔다. 트럭 기사는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새벽 산길에서 흙투성이 몰골로 손을 흔드는 어른과 애라니, 당연히 이상해 보일 만했다. 하지만 기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조수석 문을 턱으로 가리키며 타라는 시늉만 했다. 트럭 짐칸에서 나는 퇴비 냄새와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가 그렇게 반가울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다행이었다.
* * *
그렇게 서울로 돌아왔다. 향림그룹의 본가, 삼청동에 있는 낡은 한옥과 신식 건물이 뒤섞인 저택. 새벽빛 속에서 기와지붕의 검은 실루엣이 유난히 무겁게 보였다.
대문을 넘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살았다."
입 밖으로 그 말이 나온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조용했다.
이 시간이면 경비원이 순찰을 돌고 있어야 했다. 발소리든, 무전기 잡음이든, 뭐든 들려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마당을 채운 건 새벽 공기의 습기와, 어딘가 타는 듯한 쇠 냄새 비슷한 것뿐이었다.
저택을 지키는 경비원이 보이지 않았다.
현관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어둠이 평소보다 더 짙어 보였다.
"준혁 씨."
다인이 내 옷깃을 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안에 누군가 있습니다."
"…또?"
목소리가 저절로 기가 빠진 채로 나왔다. 오늘 하루에만 벌써 몇 번째인지 세는 것도 지쳤다. 도망치고, 쫓기고, 이제 집에 오니 또 누가 있다니. 이쯤이면 향림그룹 회장 자리보다 목숨 부지하는 게 더 어려운 직업인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신발을 벗지 않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불이 꺼져 있었다. 익숙한 소파와 자개장 실루엣이 어둠 속에서 낯설게 서 있었다. 서재 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나왔다.
할아버지의 서재.
그 방에 누군가 있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올라와서 뛰는 느낌이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다인, 뒤로 숨어."
작게 속삭였다. 나름 진심이었다. 이 애는 지켜야 하는 존재였고, 나는 아무리 못났어도 어른이었다. 그런데 다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위험합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뭐? 무슨 소리야, 애가 앞장을 서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인은 이미 서재 문 앞에 서 있었다. 저 걸음걸이, 저 속도. 사람이 저렇게 조용하게 움직일 수 있나. 나는 항의할 틈도 없이 그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
검은 옷의 남자 두 명이 서류함을 뒤지고 있다가 우리를 발견했다. 손전등 불빛이 우리 쪽으로 확 꺾였다.
"엇."
남자 하나가 반사적으로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려 했다. 그 손이 향하는 방향을 보고 나는 다리가 굳었다. 저거, 총 아닌가.
그 순간, 다인의 가슴께에서 은빛 쇠사슬이 짧게 진동했다.
찰그랑.
소리는 작았지만 그 여파는 거대했다.
서재 안의 책들이 갑자기 허공으로 떠올랐다. 책장 째로. 무게가 있는 물건들이 전부 중력을 무시하며 부유했다. 할아버지가 평생 모은 고서들이 종잇장처럼 흩날리고, 놋쇠 문진이 새처럼 둥둥 떠다녔다.
"뭐, 뭐야 이거!"
남자들이 소리쳤다. 나 역시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은 벌어졌는데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 그런 기분 알까. 딱 그거였다.
다인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빛나고 있었다. 평소의 무표정이 아니었다. 뭔가에 집중하는, 계산하는, 그러면서도 어딘가 즐거워하는 듯한 표정.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았다.
"침입자 두 명, 심박수 상승, 동공 확장, 도주 확률 팔십 퍼센트."
다인이 중얼거렸다. 마치 데이터를 읊는 것처럼. 억양도 없고 감정도 없는, 기계적인 낭독이었다.
"제압하겠습니다."
다인이 손을 뻗었다. 그 손짓 하나로 떠 있던 책장이 그대로 남자 하나를 향해 날아갔다.
퍽!
남자가 벽에 부딪혔다. 정신을 잃은 듯 그대로 쓰러졌다. 벽에 걸려 있던 할아버지의 서예 액자가 그 충격으로 함께 떨어져 바닥에 부서졌다. 액자 유리 깨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남은 남자가 도망치려 했지만, 서재 문이 저절로 닫혔다.
쾅.
"이, 이게 무슨—"
"움직이지 마십시오."
다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하지만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이건 화가 난 것도 아니고, 겁을 먹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공중에 뜬 책들, 부서진 액자, 쓰러진 남자, 그리고 그 한가운데 서 있는 열다섯 살짜리 애.
…이게 열다섯 살짜리 애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아니, 애초에 저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지금까지 다인을 보면서 좀 이상하다, 조숙하다, 애답지 않다, 그렇게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런 수준의 이상함이 아니었다. 이건 그냥,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다인이 마지막 남자의 목덜미를 손끝으로 살짝 짚었다. 남자는 그대로 스르륵 쓰러져 잠들었다. 마치 스위치를 끄듯이, 아무 저항도 없이.
정적이 흘렀다.
떠 있던 책들이 하나둘 바닥으로 툭, 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중력을 무시하던 것들이 다시 얌전하게 무게를 되찾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다인이 나를 향해 돌아섰다. 표정이 다시 평소의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방금까지 그 즐거워하는 듯한 눈빛은 흔적도 없었다.
"놀라셨습니까."
"놀랐냐고? 지금 이걸 놀랐다는 말로 설명이 돼?"
목소리가 떨렸다. 화가 난 건지, 무서운 건지, 나도 잘 몰랐다. 그냥 온갖 감정이 한꺼번에 목구멍으로 올라와서 뭐부터 뱉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설명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지금은 이 사람들을 처리하는 게 우선입니다."
"처리? 어떻게 처리할 건데? 경찰 부를 거야?"
"경찰은 부르지 않는 게 좋습니다."
"왜?"
다인은 대답 대신 서재 창밖을 흘끗 봤다. 그 시선을 따라간 나도 함께 굳었다.
창밖에는 어느새 검은 세단 몇 대가 저택 앞에 정차하고 있었다. 번쩍이는 헤드라이트, 그리고 그 안에서 내리는 정장 차림의 사람들. 언뜻 셌을 때 최소 여섯이었다.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다인이 낮게 말했다.
초인종이 울렸다.
딩동.
그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린 적은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