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그 서포터, 던전 캐리 중

5화

학교에서 30층 던전 프로젝트에 관한 공식 안내가 나온 건, 그다음 주 월요일이었다. 안내문에는 짧게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각 파티는 정해진 학기 내 30층까지 도달해야 하며, 실패 시 재수강 대상이 된다. 재수강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겁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원래 30층이라는 숫자는 신입생 파티에게 그렇게 낯선 목표가 아니었다. 문제는 기간이었다. 학기라는 한정된 틀 안에 그걸 다 밀어넣으라는 거였다. 누군가는 여유 있게 해낼 거고, 누군가는 죽을 듯이 매달려도 못 해낼 거였다. 그 경계가 어디쯔일지, 아직 아무도 몰랐다. "학기 내라니, 몇 주 안 남았잖아." 강수가 안내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다들 표정이 굳었다. "보름? 아니 잘 세보면 그것도 안 돼." 이든이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은호가 먼저 나섰다. "그럼 일정을 좀 당겨야겠다. 이번 주말에 시간 되는 사람?" 서아가 손을 들었다. "저는 돼요." 민재도 고개를 끄덕였다. 강수도, 이든도 마찬가지였다. 나만 잠깐 머뭇거렸다. "저도 될 것 같아요." 사실은 확신이 없었다. 집에서 주말에 뭘 하겠다고 하면 늘 눈치를 봐야 했으니까. 부모님은 내가 뭘 하든 일단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었고, 던전이라는 단어 자체를 못마땅해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냥 통과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파티가 재수강 대상이 되는 것보다, 그 순간의 눈치가 더 무섭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강수는 그날 헤어지면서 나한테 슬쩍 물었다. "너 진짜 되는 거지? 억지로 맞추는 거면 말해." "아니에요. 진짜 돼요." "그래, 그럼 됐고." 강수는 별 뜻 없이 물은 것 같았지만, 나는 그 짧은 질문이 고마웠다. ───── 그 주말, 은호가 제안한 건 예상 밖의 일정이었다. 던전 공략 전 팀워크 강화를 위해, 파티 전체가 하루 놀러 가자는 것. "어디로?" "내가 아는 곳 있어." 은호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그냥 근처 놀이공원 정도를 상상했다. 실제로 도착한 곳은 상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서울 외곽에 있는 프라이빗 리조트. 일반인은 예약조차 어려운 곳이라는 걸, 나중에 나은이 검색해보고 알려줬다. 은호가 그냥 전화 한 통으로 통째로 빌린 거였다. "...이런 데를 그냥 빌린다고?" 내가 놀라서 묻자, 은호는 별거 아니라는 듯 웃었다. "할아버지 명의로 되어 있는 곳이라. 전화 한 번이면 돼." 그 말이 얼마나 큰 격차를 담고 있는 말인지, 은호 본인은 딱히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는 전화 한 통으로 리조트를 빌리는 사람과, 주말 외출 하나에 부모 눈치를 보는 사람이 같은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경우가 있다. 그날 나는 그걸 몸으로 확인했다. 리조트 정문부터 남달랐다. 조경수 하나하나가 다듬어져 있었고, 안내 직원은 우리 이름을 미리 다 외우고 있었다. 은호 이름을 부를 때 직원의 허리가 유독 깊게 굽었다. 내부에는 이미 준비된 게 많았다. 수영장, 바비큐 시설, 심지어 개인 훈련장까지. 서아가 웃으며 말했다. "이런 거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벌써 익숙해졌어." 강수는 수영장에 뛰어들며 소리쳤다. "물 온도까지 딱 맞잖아!" "당연하지. 미리 맞춰놓으라고 했으니까." 은호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강수는 물속에서 그 말을 듣고 잠깐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그냥 웃어넘겼다. 민재는 늘 그렇듯 조용히 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봤지만, 표정만은 확실히 풀려 있었다. 이든도 마찬가지였다. 이든은 수건을 목에 걸치고 라운지 의자에 눕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런 데 오면 그냥 잠만 자도 본전 뽑는 느낌인데." "넌 그냥 잘 거면 뭐 하러 온 거야." 서아가 옆에서 툭 쏘아붙였다. 이든은 눈도 안 뜨고 대답했다. "팀워크. 같이 자는 것도 팀워크지." 나는 그 사이에서 조금 이질감을 느꼈다. 이 정도 규모의 사치를,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사람들과 내가 같은 파티라는 게 실감이 안 났다. 강수도, 서아도, 민재도, 이든도 부잣집 자식이라는 걸 다 알고 있었지만, 그 부유함이 실제로 이런 식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나는 그냥 웃으면서 그 풍경을 구경하는 쪽에 서 있었다. 그날 오후, 훈련장에서 각자 스킬을 점검하는 시간이 있었다. 훈련장은 실제 던전 지형을 어느 정도 재현할 수 있게 만들어진 특수 시설이었다. 이런 것까지 개인 리조트에 갖춰놓았다는 사실이,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은호는 검을 몇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 훈련용 표적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서아는 대규모 힐 스킬을 시전해 훈련장 전체를 은은한 빛으로 채웠다. 그 빛 속에서 잠깐, 다들 상처가 없는데도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강수는 방패로 낙석을 그대로 튕겨냈다. 돌이 부서지는 소리가 훈련장을 울렸다. 민재는 군도를 뽑아 순식간에 표적 열 개를 갈랐다. 눈을 몇 번 깜빡이는 사이 이미 끝나 있었다. 이든은 마법으로 훈련장 지형 자체를 잠깐 바꿔놓았다가 되돌렸다. 바닥이 솟아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 걸 보면서, 나는 잠깐 말을 잃었다. 각자의 스킬이 얼마나 큰지, 그날 처음으로 실감했다. 파티 안에서 나란히 싸우면서도, 이렇게 각자의 힘을 눈앞에서 직접 보는 건 또 다른 충격이었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조용히 포션 몇 개를 꺼내 배치만 하고 물러섰다. 화려한 스킬은 없었다. 그냥 준비된 도구를 정리하는 정도. "넌 뭐 안 해?" 강수가 물었다. "저는 이게 다예요." 그 대답에 강수는 잠깐 나를 바라봤다. 뭔가 더 물어볼 것 같은 표정이었다가, 그냥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그거면 됐어. 지난번에 나 살려준 것도 이거잖아." 그 말이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남았다. 화려한 스킬이 없어도, 누군가한테는 그게 전부였다는 걸 강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이 파티에서 내가 완전히 겉도는 존재는 아니라는 걸 조금 믿을 수 있었다. 서아도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난 포션 배치할 때마다 진짜 신기해.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렇게 딱딱 맞춰 놓는 거야?" "그냥... 감이에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 감이라는 게, 다른 사람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도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나는 말하지 않았다. ───── 저녁이 되자, 다들 테라스에 모여 바비큐를 했다. 웃고 떠드는 소리가 리조트 전체에 퍼졌다. 은호가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 "이번 학기 끝나기 전에 30층까지 뚫자. 다들 할 수 있지?" 다들 동시에 대답했다. "당연하지." "물론." "해야지." 나도 그 사이에 끼어 대답했다. "네." 그 순간만큼은, 나도 이 파티의 일부라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늘 어딘가 한 발 떨어져 서 있던 내가, 그날 저녁은 정말로 이 원 안에 있었다. 강수는 고기를 굽다가 몇 번이나 태웠고, 그럴 때마다 서아가 옆에서 잔소리를 했다. "이거 봐, 또 태웠잖아." "괜찮아, 태운 게 더 맛있어." "그게 무슨 논리야." 민재는 그 옆에서 조용히 자기 몫만 챙겨 먹었고, 이든은 어느새 세 접시째 비우고 있었다. 밤이 깊어질 무렵, 나는 잠깐 테라스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다들 실내로 들어가고, 밖에는 나 혼자였다. 별이 유난히 밝은 밤이었다. 도시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하늘이었다. 그때 민재가 조용히 다가와 옆에 앉았다. 인기척도 거의 없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너, 그 가방." 나는 순간 긴장했다. 민재가 뭘 봤는지 감이 안 왔다. "뭐가요?" "아까 포션 꺼낼 때, 가방 안이 이상했어. 겉보기보다 훨씬 많이 들어있던데." 민재는 늘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정찰 담당인 이유가 있었다. 남들이 대충 흘려보는 걸 민재는 꼭 붙잡아 기억했다. "...그냥 정리를 잘해서요." "정리를 잘한다고 부피가 줄지는 않는데." 민재가 짧게 되받았다. 나는 순간 뭐라고 더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별을 올려다보는 척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요령이 좀 있어서." 민재는 그 대답에 더 파고들지 않았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테라스를 스치고 지나갔다. "딱히 캐물으려는 건 아니야." 민재가 말을 이었다. "그냥, 뭔가 있는 거면 조심하라는 거지. 우리 파티엔 눈치 없는 애도 있고, 눈치 빠른 애도 있으니까." "누가 눈치 없는데요." "은호. 걘 정말 아무것도 몰라. 근데 이든은 눈치 빨라. 걘 이미 뭔가 이상하다는 거 느꼈을걸." 그 이름이 나오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이든은 오후에 훈련장에서 지형을 바꿔놓을 때도, 내가 포션을 꺼내는 손짓을 유심히 보던 게 떠올랐다. 그때는 그냥 스치듯 넘겼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니었다. "뭐가 됐든, 숨기는 거 있으면 조심해." 민재는 그 말을 남기고 조용히 테라스를 떠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작조차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나는 혼자 남아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방금 들은 경고를 몇 번이고 되새겼다. 별은 여전히 밝았고, 리조트 안쪽에서는 다들 웃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소리와 내 머릿속의 긴장이 묘하게 겹쳐졌다. 마법백의 진짜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 생각보다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그날 나는 확실히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찾아올 거라는 것도, 그때는 아직 몰랐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