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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백년길드 로비 옆 카페테리아에서 나는 서준과 마주 앉았다. 테이블은 원목이었고, 표면에 작은 스크래치가 여러 개 나 있었다. 커피 한 잔이 4,500원짜리 아메리카노였고, 서준의 잔에는 아직 거의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았다. 카페테리아 안은 오후 세 시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창밖으로 로비를 지나가는 헌터들이 보였고, 다들 명찰을 목에 걸고 있었다. 서준은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다. "저기, 도련님." 서준이 입을 열었다. "뭔데." 내가 물었다. "제가 왜 이적된 건지, 진짜 이유를 알고 싶어서요." 서준이 말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나는 잠시 대답을 골랐다. 원작 지식을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F등급 각성자가 이적된 이유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머릿속으로 몇 가지 문장을 굴려보다가, 가장 무난한 쪽을 골랐다. "...그냥 아까웠어." 내가 대답했다. "아까워요?" 서준이 되물었다. 눈을 깜빡이며 나를 쳐다봤다. "F등급이라고 다 그렇게 대해도 된다는 법은 없잖아." 내가 말했다. 서준은 그 말을 듣고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컵을 테이블 위에 살짝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솔직히 말씀해주시면 안 돼요? 태성그룹 도련님이 저 같은 애 하나 신경 쓸 이유가 없잖아요." 서준이 물었다. 눈빛이 진지했다. 나는 컵을 내려놓았다. 어쩐지 이 아이 앞에서는 조금 솔직해지고 싶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사실 나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 내가 말했다. "조용히요?" 서준이 물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응. 큰 사건 안 터지고, 파멸 안 당하고, 그냥 이 자리 잘 지키다가 나중엔 불로소득으로 편하게 사는 거." 내가 대답했다. 서준은 눈을 크게 떴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뜯어보았다. "...그게 전부예요?" 서준이 물었다. "응, 전부야." 내가 대답했다. "진짜 딴 뜻 없어." 서준은 잠시 나를 뜯어보듯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갑자기 눈가가 붉어지는 게 보였다. "...알겠어요. 도련님 뜻, 이해했습니다." 서준이 말했다. 표정이 이상하게 감격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 표정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분위기가 내가 의도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뭘 이해했다는 거야." 내가 물었다. "세상이 조용해야, 도련님 같은 분이 편해질 수 있다는 거잖아요." 서준이 말했다. "...그런 거창한 얘기 아닌데." 내가 대답했다. 손을 내저으며 정정하려 했다. 서준은 내 말을 듣지 않는 것 같았다. 이미 자기 안에서 뭔가 정리를 끝낸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도련님은, 세상이 위험해지지 않게, 미리 다 손을 써두시는 거네요. 저 같은 애까지 챙기시면서." 서준이 혼자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니, 그런 뜻 아니라고.’ ‘나는 그냥 조용히 살고 싶다는 거였는데, 왜 그게 큰 그림이 되는 거야.’ 하지만 정정하려는 순간, 서준이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다리 부분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도련님, 저 진짜 열심히 할게요." 서준이 말했다. 목소리에 눈물이 살짝 섞여 있었다. "도련님이 그리는 큰 그림, 저도 도움이 될 수 있게요." "...큰 그림 같은 거 없는데." 내가 다시 정정하려 했다. 목소리를 조금 크게 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서준은 이미 내 말을 흘려듣고 있었다. "저 각성 등급 올려서, 나중에 도련님 곁에서 힘이 될 거예요." 서준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 눈빛이 예전 뺨을 맞으며 아무 말도 못 하던 소년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카페테리아 조명 아래서 그 눈이 유난히 반짝였다. 나는 그 장면을 지켜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거, 뭔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그냥 아까워서, 조용히 살고 싶어서 한 말인데.’ 원작에서 서준이 강태오를 원수로 지목하는 결말은 확실히 피했다. 하지만 지금 서준의 눈빛은 원수보다 더 무서운 무언가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더 하지 못했다. 일주일 후, 서만호가 나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집무실 책상 위에 서류 봉투를 내려놓으며 말을 꺼냈다. "한서준 각성자, D등급에서 C등급으로 재승급했습니다." "또?" 내가 물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예, 백년길드 사상 최단기 승급 기록입니다." 서만호가 말했다. "길드 내부에서도 화제입니다. 한서준 각성자가 인터뷰에서 도련님 얘기를 하더군요." 서만호가 덧붙였다. 서류 봉투에서 클리핑 기사를 꺼내 내 앞에 펼쳤다. "...무슨 인터뷰?" 내가 물었다. "'강태오 도련님의 큰 그림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서만호가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머리가 아파졌다.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눌렀다. ‘큰 그림이라니, 그런 거 없다고.’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이렇게 커지는 거야.’ 하지만 정정할 방법이 없었다. 이미 기사가 나갔고, 길드 내부에 소문이 돌았다. 서준은 이미 저 혼자 결론을 내리고 그 확신 위에서 폭주하고 있었다. "도련님,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서만호가 물었다. "...아니야. 됐어." 내가 대답했다. 더 설명할 기력이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서만호가 또 다른 소식을 가져왔다. 이번엔 서류 봉투가 아니라 태블릿을 들고 들어왔다. "도련님, 다음 주 재벌가·길드 연합 공개 행사에 국가헌터협회에서 참석 요청이 왔습니다." "누가 오는데." 내가 물었다. "SSS급 헌터, 유하늬입니다." 서만호가 대답했다. 나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기 시작했다. 원작에서 유하늬는 정히로인이었고, 강태오를 가장 혐오하는 캐릭터였다. 소설 속에서 유하늬가 강태오를 노려보며 내뱉던 대사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이제 저 사람까지 등장하는 거야.’ 나는 창밖을 보며 생각했다. 로비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조용히 살고 싶다는 내 소박한 목표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도련님, 참석 여부는 어떻게 답변드릴까요." 서만호가 물었다. 나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태블릿 화면에 떠 있는 유하늬의 프로필 사진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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