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설산의 궁수, 목함을 깨우다

1화

태백산 자락, 새벽 눈이 처마 밑까지 쌓인 도장 마당에는 발자국 하나 없이 하얗기만 했다. 밤새 내린 눈이 지붕의 무게를 늘려 놓았는지, 서까래가 이따금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가 마치 늙은 짐승이 앓는 소리처럼 들려 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나는 언 손으로 부엌문을 밀고 들어가, 아궁이에 남은 잔불을 뒤적였다. 잿더미 속에서 발갛게 죽어가던 불씨가 마른 솔가지의 기름기를 만나 탁, 탁 소리를 내며 되살아났고, 매운 연기가 눈을 찔러오는 와중에도 나는 눈물을 훔치며 부지깽이를 놓지 않았다. 손끝이 갈라져 피가 배어 나온 자리가 화기에 닿을 때마다 따끔거렸지만, 이 정도 아픔은 이미 몸에 익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냄비 속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나는 쪽마루 쪽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약탕기 안에서 검게 우러난 탕약 냄새가 부엌 안을 채웠고, 그 씁쓸한 냄새와 매운 연기 냄새가 뒤섞여 목구멍을 긁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새벽부터 사부님의 기침이 잦았다.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가슴 밑바닥에서 긁어 올리는 듯한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손끝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고, 그 저림이 추위 때문인지 다른 무엇 때문인지 굳이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기침 사이사이로 낮게 이어지는 숨소리가 마치 실 끝에 겨우 매달린 촛불처럼 위태로워, 나는 몇 번이고 냄비를 들여다보며 물이 끓는 속도를 조바심 내며 재촉했다. "시우야, 안에 있느냐."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형형했으나, 그 안에 실린 가래 낀 떨림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예, 사부님. 약 다 끓었습니다." 나는 사기그릇에 검붉은 탕약을 담아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지난밤 태운 등잔의 그을음 냄새가 은은히 남아 있었고, 창호지 틈으로 새어 든 새벽빛이 방바닥에 얇게 깔려 있었다. 허청암 사부는 낡은 회색 도포를 겹겹이 두르고도 부족한 듯 어깨를 웅크린 채 앉아 있었는데, 백발이 성성한 머리와 나뭇가지처럼 마른 손목이 촛불 그림자 속에서 유난히 앙상해 보였다. 그 손이 그릇을 받아 드는 순간, 나는 그 떨림이 눈에 익어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언제부터였을까.' 사부의 손이 저렇게 떨리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는지, 나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어느 겨울부터, 활을 겨눌 때도 예전처럼 팽팽히 당기지 못하고 조금씩 흔들리던 그 모습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약값은 어찌 되었느냐." "곧 마련하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부엌 항아리 밑바닥에 남은 쌀이 며칠 치 남았는지, 마을 약방 노인이 다음에는 외상을 받아주지 않겠다고 한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는데도 나는 삼켰다. 이런 것들을 말한다 해서 사부의 병이 나아질 리도 없었고, 괜한 걱정만 하나 더 얹는 꼴이었다. 사부는 탕약을 한 모금 삼키고는 콜록거리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는데, 병색이 짙은 얼굴 위에서 그 눈만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아 이따금 나는 그 시선을 피하고 싶어졌다. "네 눈빛이 오늘따라 시퍼렇구나. 무슨 생각을 하는 게야." "아무 생각도 아닙니다." 나는 고개를 숙였고, 사부는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런 배려가, 열네 해를 살아오며 받아본 유일한 배려였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쌀은 아직 남았느냐." "예, 사부님. 넉넉합니다." 거짓말이었다. 항아리 밑을 긁어야 겨우 한 그릇이 나올 정도였으나, 그 말을 하면 사부가 또 자신의 몫을 나에게 밀어줄 것이 뻔했기에 나는 태연히 웃어 보였다. 사부는 그런 내 표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더 묻지 않고 그릇을 마저 비웠다. ••• 내가 처음 이 도장 마당에 던져진 것은 여덟 살 무렵, 청하현 저잣거리 뒷골목에서였다. 그날 나는 사흘을 굶어 눈앞이 노랗게 흔들리던 중이었고, 얼어붙은 개천 옆에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뻔했는데, 지나던 늙은 도인 하나가 나를 등에 업고 산을 올랐다. 등에 업힌 채로 흔들리던 그 감각을, 나는 지금도 이따금 떠올린다. 도인의 등에서는 젖은 흙냄새와 약초 냄새가 뒤섞여 났고, 그 냄새가 이상하게도 무섭지 않았다. 그것이 허청암 사부였다. 이유도 묻지 않았고,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밥을 먹였고, 옷을 입혔고, 활을 쥐어주며 산 짐승을 쫓는 법을 가르쳤다. 처음 활을 쥐던 날, 손아귀에 힘이 부족해 시위를 놓칠 때마다 사부는 화를 내는 대신 그저 다시 쥐어주며 "천천히 해도 된다"고만 했었다. 그 말이 얼마나 낯설게 들렸던지, 나는 그날 밤 이불 속에서 눈물을 삼켰던 기억이 있다. 무공이라 할 것도 없는 기초 호흡법과 몸을 단련하는 법뿐이었으나, 그것이 나에게는 살아갈 이유의 전부였다. 산 짐승의 발자국을 읽는 법, 바람의 방향으로 냄새를 가늠하는 법, 눈밭에서 소리 없이 움직이는 법을 하나씩 배워가며 나는 그저 이 산속의 삶이 계속되기만을 바랐다. 언젠가 사부가 늙어 쓰러지는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은, 그때는 감히 떠올리지도 못했다. ••• 방을 나서기 전, 나는 벽에 걸린 낡은 목재 상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손바닥 두 개를 겹친 정도의 크기에, 나뭇결이 유난히 검붉었고,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양이 얕게 새겨져 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도 닳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손으로 문양을 쓸어보면 미세한 온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았으나, 그것이 착각인지 아닌지는 나도 확신하지 못했다. 나는 그것을 늘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 사부조차 그 정체를 모른다 했고, 나 역시 열지 못했다. 손톱으로 이음새를 찾아보려 해도 어디 하나 벌어진 틈이 없었고, 두드려 보아도 안이 비었는지 찼는지 가늠할 수 없는 먹먹한 소리만 났다. 그저 삼 년 전, 산길에서 죽어가던 한 노검객을 우연히 구해준 것이 이 상자와의 인연이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산등성이, 반쯤 눈에 파묻힌 채 신음하던 노인의 몸에서는 붉은 피가 배어 눈을 적시고 있었고, 나는 겁도 없이 그를 등에 업어 근처 동굴로 옮겼다. 사흘 밤낮을 돌보는 동안 노인은 거의 말을 하지 않았으나, 떠나기 전 이 상자를 내밀며 딱 한마디를 남겼다. "3년 뒤에 다시 오겠다." 그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었다. 벌써 삼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으나, 나는 그 약속을 크게 믿지도, 아주 잊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이따금 상자를 품에 안고 잠들 때면, 그 안에서 아주 미약한 진동이 느껴지는 듯한 밤도 있었지만, 그것 역시 확신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상자를 품에 넣고 활과 화살통을 챙겨 문을 나서는데, 나는 화살촉이 무뎌진 것을 뒤늦게 발견하고 잠시 숫돌에 갈아야 하나 고민했으나, 시간이 늦어질까 그대로 챙겼다. 화살통 안에는 여덟 대의 화살이 있었는데, 그중 두 대는 깃이 낡아 다음번엔 새로 만들어야 할 듯했다. 사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어딜 가려는 게야." "사냥하러 갑니다. 설랑 가죽이라도 있으면 약값에 보탬이 될 겁니다." "산이 험하다. 청암사 쪽으로는 가지 마라." 사부의 음성에 순간적으로 서린 긴장을 나는 못 본 척했다. 청암사의 혜덕이라는 이름을 사부는 입에 담기조차 싫어했는데, 예전에 그 승려의 탐욕과 폭력을 사부가 힘으로 막아낸 일이 있었고, 그 일로 혜덕이 오랜 원한을 품었다는 것을 나는 마을 사람들의 수다를 통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언젠가 마을 아낙 하나가 우물가에서 "그 승려가 아직도 산 아랫마을을 어슬렁거린다더라"며 낮게 속삭이는 것을 들은 적도 있었다. "조심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만 답하고 마당으로 나섰다. 눈은 발목까지 쌓여 있었고,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산봉우리를 회색빛으로 지우고 있었다. 발을 뗄 때마다 뽀득, 뽀득 눈이 다져지는 소리가 났고, 그 소리 외에는 사방이 죽은 듯 조용했다. 새 한 마리도 울지 않는 이 아침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나는 그 속으로 걸음을 옮기며, 아직 열리지 않은 몸속 어딘가의 현관(玄窍)을 떠올렸다. 사부가 말하길 무인이 되려면 그 관문을 열어야 한다 했으나, 나는 몇 년째 그 문 앞에서 제자리를 맴돌고만 있었다. 밤마다 홀로 좌선을 하며 단전 아래를 더듬어 보아도 잡히는 것은 그저 뻑뻑한 침묵뿐이었고, 어떤 날은 그 침묵이 나를 비웃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활 솜씨는 누구보다 뛰어났으되, 무공의 진짜 경지에는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한 채였다. '오늘은 반드시.'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눈 덮인 능선을 향해 걸음을 서둘렀다. 눈 위에 찍히는 내 발자국이 뒤로 길게 이어지는 것을 흘긋 돌아보다가, 그마저도 눈발에 곧 지워지리라는 생각이 스쳤다. 등 뒤로 사부의 기침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고, 나는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돌아오겠다는 다짐 하나만을 품고, 산의 깊은 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능선을 오르는 동안 바람이 점점 거세어졌고,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이따금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에 나는 몇 번이나 몸을 움츠렸다. 그 소리가 짐승의 발소리인지 아닌지 구분하려 활을 고쳐 쥐는 순간, 저 멀리 나무 그늘 사이로 무언가 검은 그림자가 스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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