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목검이 슬라임의 표면에 닿는 순간, 나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감각을 느꼈다. 물컹하게 튕겨 나갈 줄 알았던 칼끝이 마치 젤리 속에 박히듯 깊게 파고들었는데, 그 순간 슬라임의 몸 전체가 부르르 떨리며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끼이이익...!
그 소리가 어찌나 날카로웠던지, 나는 순간적으로 이게 몬스터인지 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게임에서 보던 슬라임은 그냥 '푹' 하고 터지거나 '찰박' 하고 흩어지는 존재였는데, 이건 마치 살아있는 생물이 고통을 호소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나는 순간 놀라서 목검을 놓칠 뻔했지만, 반사적으로 손아귀에 힘을 줘 버텼다. 슬라임이 몸을 부풀리며 나를 향해 튀어올랐고,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렸다. 퍼억! 슬라임이 있던 자리에서 바닥이 움푹 꺼지는 소리가 났는데, 그 위력에 나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게 초보자용 몬스터라고?' 하는 의심이 들었다. 던전 초입에서 튀어나오는 잡몹이 바닥을 저 정도로 함몰시킬 위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 던전 자체가 초심자용이라는 설명부터 의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아리아가 곧바로 정정해줬다.
"정상적인 D등급 개체입니다. 마스터의 반응 속도가 예상보다 빠를 뿐입니다."
...내 반응속도가? 나는 잠깐 그 말을 곱씹었다. 회사 다닐 때 회식 자리에서 술잔 나르다가 넘어진 게 마지막 신체 활동이었던 나에게 '빠른 반응속도'라는 수식어가 붙는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애초에 나는 학창 시절 체육 시간마다 구석에서 눈치나 보던 부류였고, 성인이 되어서는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는 것조차 숨이 차서 포기했던 인간이었다. 그런 내가 지금 몬스터의 돌진을 몸으로 피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치 다른 사람의 몸에 내 정신만 들어와 있는 듯한 위화감을 안겨줬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걸 의심할 여유는 없었다.
슬라임이 다시 몸을 응축시키며 돌진해왔고, 나는 이번엔 정면에서 목검을 내지르며 맞섰다. 파그작!!
슬라임의 몸통이 반쪼가리로 갈라지며 바닥에 흩어졌는데, 그 순간 눈앞에 새로운 문구가 떠올랐다.
[전투 데이터 수집 중...]
[임계치 도달 - 시공전함 1단계 임시 발동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뭐? 임시 발동?' 하고 내가 되묻기도 전에, 몸이 갑자기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마치 온몸을 짓누르던 모래주머니가 한순간에 사라진 듯한 감각이었는데, 그 감각과 동시에 눈앞의 시야에 낯선 조준선 같은 것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게임 속 조준경을 실제로 눈에 이식한 것 같은 그 이질감에, 나는 잠깐 눈을 깜빡이며 시야를 확인했다.
"마스터, 시공전함의 1단계 무장 - 함포 보조 조준 시스템이 임시 개방되었습니다. 현재는 극소형 함포 한 정만 사용 가능합니다" 하고 아리아가 설명했다. "발사하시겠습니까?"
나는 반쪼가리가 된 슬라임의 잔해가 다시 뭉치며 재생하려는 걸 보고,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쏴요!"
파앙-!
허공에서 갑자기 손톱만 한 광탄 하나가 튀어나와 슬라임의 잔해를 향해 날아갔다. 콰크작!
그 작은 탄환 하나에 슬라임의 재생하던 몸통이 완전히 소멸해버렸다. 잔해가 있던 자리에는 옅은 연기 같은 것만 피어오르다가 그마저도 이내 흩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게, 되네...?'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고, 곧이어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한 같은 흥분이 느껴졌다. 이건 목검으로 슬라임을 잡는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손톱만 한 탄환 하나가 D등급 몬스터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는 사실이, 도무지 초심자용 던전에서 벌어질 법한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곱씹어볼수록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분명 시공전함이라는 스킬이 발동됐다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이건 또 무슨 헛소리 스킬인가' 싶어서 반쪼가리 정도의 기대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나온 결과물은 기대치를 완전히 초월했다. 마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자리인 줄 알고 지원했더니 대기업 정규직 채용 통지서가 날아온 느낌이랄까.
"...더럽게 쓸모없는 스킬인 줄 알았는데" 하고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이거 완전히 다른 얘기잖아."
아리아가 곧바로 대답했다. "현재는 극소형 함포 1정, 게다가 재장전에 상당한 쿨다운이 필요한 임시 상태입니다. 본체 함선의 완전 소환까지는 아직 매우 먼 단계입니다." 그 말에 나는 살짝 김이 빠졌지만, 그럼에도 방금 목격한 광경의 충격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함선이라니. 함포라니. 이건 마치 동네 편의점 알바생이 갑자기 항공모함 조종실 열쇠를 손에 쥐게 된 느낌이었는데, 그 열쇠로 당장 할 수 있는 게 총알 한 발 발사가 전부라는 게 또 묘하게 웃겼다.
그때 통로 안쪽에서 또 다른 물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한 마리가 아니었다. 세 마리, 아니 네 마리의 슬라임이 나란히 이동하며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형태들이 좌우로 흔들리며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모습이, 마치 젤리로 만든 볼링공들이 레인 위를 굴러오는 것처럼 보였다. '떼로 오는 건 예상 못 했는데' 싶어서 나는 잠깐 긴장했지만, 방금 전의 그 감각이 아직 몸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기대감이 앞섰다.
"아리아, 함포 재장전은요?" 하고 물었더니, "쿨다운 종료까지 약 47초 남았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47초라니. 그 시간 동안 나는 순수하게 목검과 몸으로 저 네 마리를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목검을 고쳐 쥐고 슬라임 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첫 번째 슬라임을 향해 목검을 내지르는 동시에 두 번째 슬라임을 향해서는 발로 걷어차며, 세 번째는 몸을 낮춰 피하고 그 반동을 이용해 다시 목검을 휘두르는 식으로, 나는 여러 동작을 거의 동시에 처리해나갔다. 파그작, 퍼억, 파그작! 소리가 연속으로 울려 퍼졌고, 나는 그 리듬 속에서 이상하게도 편안함을 느꼈다. 마치 예전부터 이렇게 싸워왔던 것처럼,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팔다리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머릿속으로 계산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는데, 그 낯선 익숙함이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아리아가 "함포 재장전 완료" 하고 알려왔고, 나는 지체 없이 소리쳤다. "쏴요, 아무 데나!" 파앙-! 콰크작! 세 번째 슬라임이 그대로 소멸했다.
마지막 남은 네 번째 슬라임이 겁을 먹었는지 뒤로 물러났지만,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목검을 내던지듯 찔러넣었다. 부우욱-! 슬라임의 몸통이 완전히 관통되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전투 종료.]
[슬라임 무리 소탕 완료 - 총 5개체.]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은 최고였다. 지난 반년 동안 방구석에서 이력서만 넣다가 서류 탈락 통보만 받아왔던 나에게, 이건 처음으로 뭔가를 '해냈다'는 감각을 안겨줬다. 면접관 앞에서 "저는 성실합니다"라고 백 번을 말해도 안 통했던 그 시간들이, 지금 이 순간의 성취감 앞에서는 다 부질없게 느껴질 정도였다. 몸은 땀범벅이고 숨은 턱까지 차올랐지만, 이상하게도 웃음이 새어나왔다.
"마스터, 첫 전투 결과가 산출되었습니다" 하고 아리아가 말했는데, 그 목소리에서 뭔가 미묘한 떨림이 느껴졌다. "...보고드리기에 앞서, 확인을 한 번 더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왜 저래' 싶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와 다르게 뭔가 조심스러운 태도였는데, 그 어색한 정적이 오히려 나를 더 긴장시켰다. 아리아는 지금까지 나에게 어떤 정보를 전달할 때 단 한 번도 이렇게 뜸을 들인 적이 없었다. 시스템 자체가 감정이 있는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 목소리에 담긴 머뭇거림은 진짜처럼 느껴졌다.
"확인 완료했습니다" 하고 아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스터의 첫 관문 통과 결과가... 시스템 역사상 최고 등급으로 산정되었습니다."
나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최고 등급이요? 저 방금 D등급 슬라임 몇 마리 잡은 게 전분데요?" 하고 되물었지만, 아리아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정확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스터. 지금 이 결과는 전례가 없는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