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통장 잔액 47,200원. 그것이 서른다섯 해를 살아온 내 인생의 현재 스코어였다. 정확히는 스코어라기보다는 사형 집행일이 며칠 남았는지를 알려주는 카운트다운에 가까웠는데, 왜냐하면 월세가 이십일 후에 빠져나가고 그 액수가 45만 원이었으니까, 산수를 못해도 결과는 뻔했다. 47,200원에서 450,000원을 빼면 마이너스 402,800원. 그 숫자를 몇 번이나 계산기로 두들겨봤는지 모른다. 계산기가 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눌러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계산기는 죄가 없었다. 죄가 있다면 계산기를 두들기고 있는 내 손가락 쪽이었다.
다니던 무역회사가 작년 겨울에 도산했을 때만 해도 나는 '금방 다른 데 들어가겠지' 하고 낙관했었는데, 그로부터 여섯 달이 지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이력서를 넣은 곳 중 서류 통과된 곳이 단 한 곳도 없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 낙관이라는 게 얼마나 값싼 위로였는지 새삼 곱씹게 된다. 이력서를 몇 통이나 넣었는지도 이제는 세는 게 무의미해졌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지원한 회사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았고, 그냥 채용 사이트에 뜨는 '즉시 지원' 버튼을 누르는 게 하루의 유일한 생산 활동이 되어버렸다.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는 신입으로 받아주기엔 많고 경력으로 받아주기엔 애매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지대였다.
요컨대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죽는 건 아니었지만, 통장이 죽고, 신용카드 한도가 죽고, 자존감이 순차적으로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기분이었으니까 이것도 일종의 시한부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자조적인 생각을 하며 나는 편의점에서 사 온 삼각김밥의 유통기한을 확인했다. 유통기한이 오늘까지였다. '나랑 비슷한 처지구나' 싶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삼각김밥과 나 사이에 무슨 동질감이 있다고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날 저녁을 그 삼각김밥 하나로 때웠다. 참치마요였는데, 참치보다 마요네즈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 같다는 인상만 남았다.
그날 밤, 정확히는 새벽 두 시쯤이었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서 유튜브를 켰고, 알고리즘이 던져준 영상 하나가 재생목록에 걸려들었다. 제목은 「초보자도 할 수 있다! 던전 첫 탐사 완벽 가이드」였는데, 썸네일 속 여자가 헬멧을 쓴 채 카메라를 향해 브이 자를 그리고 있었다. 채널명은 '은채의 던전다이어리'였고, 구독자 수는 80만이 넘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던전이니 게이트니 하는 단어들은 뉴스에서나 접했지, 실제로 그게 뭔지 제대로 알아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그런 걸 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은 제가 던전 탐사를 처음 시작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진짜 밑바닥부터 알려드리는 영상을 준비했어요" 하고 그녀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는데, 그 목소리에서 이상하게도 억지스러운 텐션이 느껴지지 않아서, 나는 계속 영상을 보게 됐다. 이름은 서은채였고, 프로필을 보니 스물두 살이었다. 나보다 열세 살이나 어린 사람이었지만, 나는 그녀가 던전 입구 앞에서 슬라임 한 마리를 상대로 진땀을 빼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이 슬라임이요, 진짜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초보 탐사자한테는 첫 관문이나 마찬가지예요. 저도 처음엔 무서웠어요, 진짜로. 그런데 있잖아요" 하며 그녀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했고, "누구나 처음이 있어요. 지금 이 영상 보고 계신 분들 중에서도 분명 시작을 고민하고 계신 분이 있을 거예요. 저는 그분들한테 딱 한마디 하고 싶어요. 오늘, 지금, 그냥 나가보세요. 세상이 생각보다 넓어요"라고 말하며 그녀가 웃었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다. 모를 일이었다. 왜 서른다섯 먹은 백수가 스물두 살짜리 유튜버의 격려에 이렇게 흔들리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려웠으니까. 그런데 곱씹어보면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반년째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감각 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이 영상 속의 그녀는 나에게 직접 말을 건 것도 아니면서 딱 나한테 필요한 말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웃긴 건, 면접관들이 나한테 "귀사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식으로 우회적으로 돌려 말했던 그 반년 동안, 정작 나를 흔든 건 어떤 대기업 임원의 조언도 아니고 화면 속 스물두 살짜리 여자애의 반말 섞인 응원 한마디였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날 새벽 그대로 앉아 그녀의 영상을 세 개나 더 봤다. 슬라임 한 마리도 제대로 못 잡던 그녀가 몇 달 후 영상에서는 오크 무리를 상대로 여유롭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사람이 저렇게 클 수도 있구나' 싶은 묘한 감동이 있었다. 물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의 성장기였지만, 그날 밤의 나에게는 그 성장기가 이상하게도 위로처럼 다가왔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처음으로 던전 관리국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국내 등록 던전은 전국에 걸쳐 수백 개가 있었고, 우리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곳은 시내버스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3등급 게이트였다. 등급이라는 게 뭘 뜻하는지도 정확히 몰랐지만, 안내 문구에 '초보자 권장 던전'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보고 일단 안심이 됐다. 홈페이지 하단에는 등급별 위험도를 표시한 표가 있었는데, 1등급이 가장 안전하고 숫자가 올라갈수록 위험도가 커진다는 설명이었다. 3등급이면 그럭저럭 괜찮은 축이려나, 하고 나는 혼자 짐작했다.
입장 조건: 만 18세 이상, 신체 건강 확인서 제출, 초심자 안전 교육 이수. 이용료: 3만 원. 그 세 줄을 읽는 순간, 나는 잠깐 멍해졌다. 3만 원. 내 통장 잔액의 육십 분의 일이 넘는 돈이었으니까, 이걸 쓰는 게 맞나 하는 계산이 자동으로 튀어나왔다. 47,200원에서 30,000원을 빼면 17,200원. 그 돈으로 이십 일을 버텨야 한다는 계산까지 이어지자,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계산이 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이대로 있어도 죽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마치 누군가 뒤통수를 밀듯 나를 앞으로 밀었다. 굶어 죽는 것과 몰라서 죽는 것 중에 뭐가 더 나은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후자는 뭔가를 시도했다는 흔적은 남길 것 같았다.
신체 건강 확인서라는 게 뭔지 몰라서 검색해보니, 근처 지정 병원에서 간단한 혈압, 혈액, 신경 반응 검사만 받으면 발급해준다고 했다. 비용은 만 원. 초심자 안전 교육은 온라인으로 두 시간짜리 영상을 시청하고 퀴즈를 통과하면 되는 방식이었는데, 무료였다. 그것만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곧바로 온라인 교육 신청 버튼을 눌렀다.
나는 신청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입장 예약이 완료되었습니다'라는 문구가 떴고, 나는 그것을 캡처해서 저장했다. 뭐라도 증거를 남겨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왜였는지는 나도 몰랐다. 어쩌면 이렇게라도 해두지 않으면,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역시 그만두자'는 결론을 내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라는 인간은 결심을 오래 붙잡고 있는 데는 재능이 없었으니까.
그날 밤 나는 다시 서은채의 채널을 들어가 예전 영상들을 하나씩 정주행했다. 초보자용 장비 추천, 던전 내 위험 구간 피하는 법, 슬라임의 약점 부위, 도망칠 때 절대 뒤돌아보지 말 것 같은 상식적인 팁들이 줄줄이 나왔는데, 나는 그 모든 걸 메모장에 받아 적었다. "슬라임은 핵을 노리세요, 몸통 중앙에 있는 조그만 알맹이요. 거기만 터뜨리면 끝이에요"라는 문장 옆에는 별표를 세 개나 그려놓았다. 이게 나중에 정말 쓸모가 있을 거라고는, 그때는 반쯤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일주일 동안 나는 그녀의 영상만 봤다. 다른 걸 볼 시간이 없었다기보다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벼워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심지어 그녀가 초반에 올린, 조회수가 몇백 회밖에 안 되는 초창기 영상들까지 찾아서 봤는데, 그 영상들 속 그녀는 지금보다 훨씬 어설프고 목소리도 떨렸지만, 그 떨림이 오히려 진짜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완벽한 사람이 하는 조언보다는, 떨면서도 계속하는 사람이 하는 조언 쪽이 나한테는 더 믿음이 갔던 것 같다.
입장 예약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온 날, 나는 냉장고를 열어봤다. 계란 두 개, 김치 반 통, 그리고 그 삼각김밥이 남긴 잔해뿐이었다. 잔해라고 해봐야 포장지 정도였지만, 냉장고 안이 그 정도로 텅 비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조금 서글펐다. '이걸로 이틀을 버텨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예전처럼 그 사실이 나를 짓누르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으로, 나는 뭔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계란은 삶아서 반찬 대신 먹고, 김치는 밥 없이 그냥 씹어 먹었다. 맛이 없었지만, 그것보다는 '이제 이틀 뒤면 뭔가 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쪽이 훨씬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예약일이 코앞으로 다가온 그 밤, 나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 화면을 응시하며 서은채의 마지막 영상 속 한 문장을 되뇌었다. '오늘, 지금, 그냥 나가보세요.' 그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고, 나는 그 문장을 붙잡은 채 눈을 감았다. 안전 교육 이수증도 출력해뒀고, 건강 확인서도 병원에서 발급받아 지갑에 넣어뒀다. 남은 건 3만 원을 들고 버스를 타는 것뿐이었다. 별거 아닌 준비였는데도,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일이면 처음으로 던전 문턱을 넘게 될 거였다.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그때는 정말로 몰랐다. 슬라임 핵을 노리라는 메모 한 줄과, 스물두 살짜리 유튜버의 응원 한마디, 그리고 통장에 남은 17,200원. 그것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