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
계란 두 알, 반쯤 남은 고추장,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반찬통 하나.
저 반찬통은 대체 언제부터 저기 있었을까.
뚜껑을 열어볼 용기는 없었다.
'오늘 저녁은 계란 볶음밥이구나.'
메뉴 선택권 따위는 원래부터 없었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찬바람이 훅 끼쳤다가 사라지는 그 짧은 순간이, 오늘 하루 중 가장 시원한 순간이었다.
뒤로 돌아보니 거실 바닥에 이불 세 채가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이불이라고 부르기엔 좀 그런, 여기저기 짜깁기한 담요들이었지만.
서나, 서화는 서로 발을 걸치고 자고, 도율이는 그 사이에 껴서 입을 벌리고 자고 있었다.
도율이 침에 서화 이불이 다 젖고 있었는데, 서화는 그걸 모른 채 코를 골았다.
이 집 서열은 아무도 신경 안 쓴다는 게 특징이었다.
방 안쪽에서는 서인이가 도현이의 교복 단추를 다시 달아주고 있는 게 보였다.
바늘을 쥔 손이 서투르긴 했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나아졌다.
"내일 새 학기잖아. 단추 떨어지면 애들이 놀려." 서인이가 중얼거렸다.
"누나, 그거 반대로 달고 있는 거 같은데." 도현이가 조심스레 말했다.
"조용히 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서 있어."
중학교 3학년이 중학교 1학년을 챙기는 모습이었다.
원래 이런 건 엄마가 할 일이었는데.
엄마는 여섯 달 전에 죽었다.
정확히는, 새로 만난 남자한테 전세금을 몽땅 맡겼다가 그 남자가 사라진 뒤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의사는 심장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게 정확한 병명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냥, 버틸 이유가 사라진 사람이 죽는 병.
세상에 그런 병명이 있다면 아마 통계청 자료에는 절대 안 잡힐 거다.
그 뒤로 정부는 참 재밌는 발표를 했다.
"국가 재정 위기에 따라 성인 연령을 15세로 하향 조정합니다." 뉴스에서 앵커가 또박또박 읽었다.
옆에 앉은 패널이 심각한 표정으로 뭐라 덧붙였는데, 요약하면 "다들 힘내서 일하라"는 말이었다.
그럼 그렇지,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이제 나는 법적으로 어른이었다.
주민등록증 나이 칸에 숫자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세상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어른이 되면 좋은 점이 뭐냐고?
국가 아동 지원금이 딱 끊긴다는 거였다.
축하 문자 한 통 없이, 그냥 통장에 찍히던 숫자가 어느 달부터 뚝 끊겼다.
남매 다섯을 홀로 부양해야 하는 열다섯 살짜리한테, 세상은 축하한다는 말 대신 통장 잔고를 0으로 만들어줬다.
친절하기도 하지.
"오빠, 오늘도 못 잘렸어?" 서인이가 물었다.
바늘을 든 채로, 눈은 안 마주치고 물어보는 게 은근히 신경 쓰는 티가 났다.
"응, 오늘은 안 잘렸어." 나는 대충 웃으며 대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오늘 알바 자체가 없었으니까 잘릴 것도 없었다.
어제는 편의점, 그 전에는 물류센터, 그 전전에는 전단지.
다 오래 못 갔다.
편의점은 사장이 "얘, 미성년자 아니지?" 하고 물어보길래 성인이라고 대답했다가, 나중에 알바생끼리 하는 대화에서 내 나이를 듣고 표정이 굳어서 잘렸다.
물류센터는 힘이 부족해서, 전단지는 그냥 반응이 없어서.
미성년... 아니, 이제는 성인이라 부르는 게 맞나?
법적으로는 어른인데 몸은 여전히 열다섯 살짜리 몸이라는 게 참 웃긴 조합이었다.
어쨌든 열다섯짜리한테 시급 제대로 주는 데는 없었다.
다들 최저임금 밑에서 눈치를 봤고,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다섯 남매 밥그릇이 그대로 비었다.
그날 밤, 나는 마지막으로 남은 배달 알바를 뛰러 나갔다.
오토바이도 없어서 자전거로.
체인이 반쪽 나가서 페달을 밟을 때마다 끼익끼익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조차 사치처럼 느껴졌다.
골목 안쪽, 가로등이 꺼진 구간을 지날 때였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저 구간은 원래도 평판이 안 좋았다.
가로등 고쳐달라고 민원 넣은 지 몇 달째 그대로였으니까.
"거, 학생. 잠깐 서봐." 누군가 앞을 막았다.
덩치 큰 남자 셋이었다.
술 냄새가 진했다.
'아, 오늘 진짜 재수 없다.'
배달 콜 하나 받아서 이거 다녀오면 오천 원 남는데, 그 오천 원 벌려다가 목숨 값을 치르게 생겼다.
"돈 좀 빌려줘봐." 하나가 웃으며 말했다.
빌려달라는 말치고는 손에 든 게 너무 위협적이었다.
정확히는 뭔가 반짝이는 게 손에 있었는데, 그게 뭔지 확인할 정신은 없었다.
나는 자전거를 놓고 뒤로 물러났다.
등 뒤에 벽이 닿았다.
차가운 벽돌 감촉이 등에 그대로 전해졌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몸이 먼저 알아챘다.
'여기서 다치면, 남은 애들은 어떻게 되지.'
계산이 먼저 튀어나왔다.
두려움보다 계산이 빨랐다.
서나 학교 등원은 누가 시키고, 도율이 밥은 누가 챙기고, 서인이 급식비는.
이 짧은 순간에 그런 걸 계산하고 있는 내가 좀 웃기기도 했다.
남자 하나가 팔을 뻗었다.
그 순간, 뭔가가 몸속에서 확 끓어올랐다.
뜨거운 게 아니라, 정확하게는... 흐르는 느낌이었다.
핏줄을 타고 뭔가가 콸콸 도는 느낌, 정확히 설명하려면 몸속에 수도관이 하나 새로 생긴 것 같았다.
손끝에서 파란 빛이 순간적으로 스쳤다.
[알림: 최초 마나 발현이 감지되었습니다]
뭐야, 이게.
이런 상황에 알림창이 뜨는 건 좀 타이밍이 안 맞지 않나.
남자의 팔이 내 앞에서 뭔가에 튕긴 것처럼 밀려났다.
"으악!" 남자가 뒤로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자기 발에 걸려 한 번 더 구르는 게, 상황이 급박한데도 살짝 웃겼다.
나머지 둘은 그 모습을 보고 그대로 도망쳤다.
의리라는 걸 기대한 내가 잘못이었나 싶었다.
조용해졌다.
가로등도 안 켜진 골목에, 나 혼자 서 있었다.
나는 한참 동안 내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방금 뭔가 반짝였던 게 맞나, 하고 몇 번을 다시 폈다 쥐었다 해봤다.
[알림: 잠재 마나 각성 진행률 100%]
[상태창을 확인하시겠습니까?]
확인하고 싶냐고?
당연하지, 안 궁금할 수가 있나.
이런 걸 안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돌덩이일 거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허공에 파란 창이 떠올랐다.
분명 게임 화면 같았는데, 진짜였다.
만져보니 손끝에 닿는 감촉까지 있었다.
이게 실화냐.
[이름: 강도윤] [나이: 15] [클래스: 미판정]
[마나 친화도: ???] [잠재력: 측정 불가]
측정 불가라니, 이거 성적표로 치면 뭐라고 써야 하는 거지.
'평가 유보'라고 써야 하나, 아니면 그냥 '재시험 요망'인가.
나는 웃음이 나왔다.
허탈함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골목 한복판에서 혼자 웃고 있었으니, 지나가던 사람이 봤으면 신고했을지도 모른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생각했다.
자전거는 아까 넘어지면서 체인이 완전히 빠져서, 그냥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덜그럭거리는 자전거 소리를 들으며, 나는 요즘 뉴스를 떠올렸다.
던전 모험가.
요즘 뉴스에 가장 자주 나오는 직업이었다.
위험하지만, 하루만 잘 뛰면 몇 달치 생활비를 벌 수 있다는.
가끔은 뉴스 말미에 "이번 주에도 헌터 세 명 사망" 같은 자막이 붙긴 했지만, 그건 애써 못 본 척했다.
그리고 나한테, 방금 뭔가 생겼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파란 빛과, 측정 불가라는 애매한 상태창과.
이걸 그냥 썩혀두는 건, 다섯 남매를 데리고 굶어 죽자는 소리였다.
계란 두 알로는 오늘 저녁 볶음밥은 만들어도, 내일 저녁까지 책임질 수는 없었다.
나는 그날 밤, 이불 속에서 도현이와 도율이 사이에 누워 결심했다.
도율이가 자면서 발로 내 배를 걷어차는 걸 두 번쯤 받아내면서.
내일 헌터협회에 간다.
그거 말고는 답이 없었다.
무섭지 않냐고 누가 묻는다면, 무섭지.
근데 아침에 냉장고 문을 또 열어야 하는 것보다는 덜 무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