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그날 밤, 지은 누나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정확히는 사무소 뒤편에 딸린 살림집이었다.
예전 우리 집은 마당이 있는 2층 주택이었다. 마당 한쪽엔 감나무가 있었고, 여름이면 그 아래서 물총 싸움을 했었다. 그 기억이 선명한데, 지금 눈앞의 마당은 절반이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에 지하실 계단이 파여 있었다.
"지하실은 뭐야."
"안전실. 던전 몬스터가 근처에 넘어오면 대피하는 곳. 요즘 집엔 다 있어."
나는 계단 아래를 잠깐 내려다봤다. 튼튼한 강철문이 있었다. 문 표면에 붙은 안전 수칙 스티커가 색이 바랬다. 이세계에서 봤던 요새 문과 비슷한 두께였다. 저런 문을 일반 가정집에 설치할 정도로 세상이 위험해졌다는 뜻이었다.
"많이 쓰였어?"
"작년에 한 번. 3층짜리 슬라임이 골목까지 넘어왔었어. 그때 아빠가 나 여기 밀어넣고 문 잠갔잖아."
담담하게 말하는 누나의 얼굴에, 그날의 공포가 잠깐 스쳤다가 사라졌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누나는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계속 설명해줬다. 세계 진화 이후 정부는 던전 관리청을 세우고, 탐색자 등급을 F부터 S까지 나눠 관리한다고 했다. 등급이 높을수록 출입 가능한 던전 난이도도 올라가고, 국가 지원금도 커진다고 했다. F등급은 동네 편의점 알바 수준의 취급을 받고, C등급부터는 사설 길드에서 스카우트가 붙는다고 했다. B등급이면 방송 출연 제의가 들어온다고 했다. 여기까지 듣고 나는 젓가락으로 두부조림을 집으며 생각했다. 그럼 95는 대체 뭔데.
"그럼 나는 뭘 해야 돼." 나는 밥을 먹으며 물었다.
"내일 등급 검증받으러 가야지. 그런데..." 누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네가 95라는 거, 진짜 확실해?"
"편의점 크리스탈이 그렇게 떴어."
"그거 진짜면 큰일이야. 국가에서 너 데려가려고 할 거야. 특수부대 스카우트든, 연구 대상이든."
나는 그 말에 젓가락을 멈췄다. 특수부대. 연구 대상. 둘 다 내가 원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10년 동안 마왕 잡으러 다녔으면 이제 좀 쉬어도 되지 않나. 억울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어." 나는 조용히 말했다.
누나가 나를 물끄러미 봤다. 밥그릇을 든 손이 잠깐 멈췄다.
"준호야, 너 이세계에서 무슨 일 겪은 거야."
그 질문에 나는 대답을 미뤘다. 15살 꼬맹이가 검을 처음 쥐었던 순간, 첫 번째 몬스터를 죽이고 밤새 토했던 기억, 동료가 눈앞에서 사라지던 장면들이 한꺼번에 지나갔다. 그걸 누나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 대신 밥그릇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거지할게."
누나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식탁 위에 낡은 상자 하나를 올려놓았다. 상자 겉면엔 매직으로 쓴 내 이름이 반쯤 지워져 있었다.
"이거, 5년 전에 네가 없어졌을 때 나온 물건이야. 네 방에서 찾았어."
상자를 열어보니 낡은 노트와 볼펜, 그리고 작은 나무 반지가 들어 있었다. 반지는 내가 초등학교 때 만들기 수업에서 만든 것이었다. 사포질이 어설퍼서 표면이 거칠었던 게 그대로였다. 아무 가치도 없는 물건인데 누나는 5년간 그걸 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사도 갔을 텐데, 마당까지 파서 지하실을 만들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는데, 이 상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런 거, 왜 버리지 않았어."
"네가 돌아올 줄 알았으니까."
짧은 대답이었다. 나는 반지를 손끝으로 만졌다. 나무 질감이 그대로였다. 뭔가 뭉클한 게 올라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이세계에서 십 년 동안 눈물 흘릴 여유조차 없었는데, 여기 와서 반지 하나에 무너질 뻔했다.
"고마워."
그 말을 하고 나는 설거지를 하러 부엌으로 갔다. 물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쏴아아. 쏴아아.
그릇 부딪치는 소리와 물소리 사이로, 거실 텔레비전에서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자 던전 발생 현황, 등급별 사망자 통계, 관리청의 신규 정책 발표. 세상이 정말로 바뀌었다는 걸 그 무미건조한 뉴스 톤에서 새삼 느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지은 누나와 함께 시내 던전관리청 지부로 향했다. 하얀 건물 앞에는 이미 줄이 길게 서 있었다. 다들 손목에 등급표를 차고 있었다. F, E, D 등급이 대부분이었다. 줄 앞쪽에 서 있던 남자의 손목엔 초록색 배지가 반짝였다. C등급이라고 누나가 귓속말로 알려줬다.
"등급 검증은 정식 크리스탈로 하니까 괜찮을 거야." 누나가 안심시키듯 말했다.
우리 순서가 되자, 접수 창구 직원이 지문 대신 손바닥을 인식하는 장치를 내밀었다. 은색 원반 모양이었고, 표면에 미세한 빛이 돌고 있었다. 나는 손을 올렸다. 서늘한 감촉이 손바닥을 훑고 지나갔다. 커다란 홀로그램 창이 떠올랐다.
[등급 검증 중...]
숫자가 빠르게 올라갔다. 10, 30, 50. 직원이 화면을 보다가 얼굴이 굳었다. 숫자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옆에 있던 다른 직원을 불렀다. 그 직원도 화면을 보고는 표정이 변했다. 둘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 눈짓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이거 큰일 났다는 눈짓이었다.
"손님, 잠깐만 대기실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뭔가 잘못됐다는 예감이 들었다. 예상대로였다. 대기실 의자는 딱딱했고, 정수기 옆에는 던전 안전수칙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10분쯤 지나자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세 명이었다. 셋 다 걸음걸이가 비슷하게 반듯했다.
"서준호 씨 되시죠? 국가 탐색자 관리국에서 왔습니다."
지은 누나가 내 앞을 반쯤 가로막듯 서며 말했다. "제 동생인데, 무슨 일이시죠."
"레벨 95는 국가 등록 최상위 능력자 기준에 해당합니다. 절차상 별도 면담이 필요해서요."
망했다. 조용히 살려고 했는데.
나는 속으로 그 생각을 삼키며 겉으로는 담담하게 말했다.
"어떤 절차죠."
"간단한 인터뷰와 신체 검사입니다. 오래 걸리지 않아요."
말투는 정중했지만 눈빛은 이미 결정된 사안을 통보하는 쪽에 가까웠다. 신청서에 사인만 받으면 끝나는 절차, 그런 눈빛이었다.
지은 누나가 나를 걱정스레 봤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그들을 따라갔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벽에 걸린 등급표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S랭크 칸은 텅 비어 있었다. 이름도, 사진도 없이 그냥 'S'라는 글자만 덜렁 있었다.
별실로 들어가자, 처음 보는 남자가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명찰에는 '관리국 특수능력 담당관'이라고 쓰여 있었다. 책상 위엔 서류철이 여러 개 쌓여 있었고, 그 중 하나엔 이미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언제 이렇게 빨리 만들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서준호 씨. 레벨 95, 칭호 마왕 토벌자. 이런 스펙은 국내에 등록된 적이 없습니다."
"이세계에서 얻은 겁니다."
담당관이 잠깐 말을 멈췄다. 펜을 쥔 손이 미세하게 굳었다.
"이세계요."
"소환됐다가 돌아온 겁니다. 10년 전에요."
담당관의 눈빛이 변했다. 흥미와 경계가 뒤섞인 눈빛이었다. 그는 서류를 한 장 더 꺼내 새 칸을 만들었다.
"그 얘기, 좀 더 자세히 해주실 수 있나요."
나는 짧게 요약해서 말했다. 15살에 소환되어 10년간 마왕을 잡으러 다녔고, 최근 마왕을 토벌하고 지구로 돌아왔다는 것. 담당관은 그 이야기를 받아적으며 몇 번이나 고개를 갸우뚱했다. 볼펜 끝으로 서류를 두드리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었다.
"흥미로운 건, 지구의 '세계 진화'가 5년 전에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서준호 씨가 소환되신 것도 정확히 5년 전이고요. 혹시 그쪽 이세계와 지구의 세계 진화가 관련 있는 건 아닐지..."
그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생각해본 적 없는 방향이었다. 시간을 계산해보니 얼추 맞아떨어졌다. 내가 이세계에 끌려간 시점과, 지구가 던전으로 뒤덮이기 시작한 시점이 정확히 일치했다.
"저를 데려간 신, 소야라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쪽에서도 신이고, 이쪽에서도 신이라고 했습니다."
담당관이 서류에서 손을 멈췄다. 볼펜을 두드리던 버릇도 멈췄다.
"...같은 신이 양쪽 세계를 관리한다는 겁니까."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냥 그렇게 말했습니다."
담당관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표정을 정리하고 서류를 덮었다. 표정을 정리하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이 사람이 방금 들은 정보를 어디에 보고할지 이미 계산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등급은 정식으로 S랭크로 등록될 겁니다. 다만, 이 정보는 극비로 취급될 거고, 서준호 씨 본인도 함부로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S랭크. 처음 듣는 등급이었다. 나는 궁금해서 물었다.
"S랭크가 얼마나 높은 겁니까."
"국내에 세 명뿐입니다. 그중 두 명은 정부 소속 전투부대장이고요."
세 명. 그중 둘이 전투부대장. 나머지 하나가 나. 뭔가 계산이 자꾸 안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갔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망했다. 완전히 망했다.
조용히 살고 싶다는 목표가 시작부터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담당관은 마지막으로 서류 한 장을 내밀며 서명을 요구했다. 개인정보 보호 및 기밀 유지 각서였다. 나는 그걸 훑어보지도 않고 서명했다. 어차피 서명 안 해도 결과는 같을 것 같았다.
별실을 나오니 지은 누나가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손톱을 물어뜯은 흔적이 보였다.
"뭐래?"
"S랭크로 등록된대."
누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거, 완전 위험한 거야. 정부에서 특수임무 명령할 수도 있어."
나는 그 말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대신 다른 걱정이 먼저 떠올랐다. 정부고 특수임무고, 지금 당장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부모님은 언제 돌아오셔?"
누나가 시계를 확인했다.
"오늘 저녁일 거야. 던전 나오는 시간 맞춰서."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누나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누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엄마?"
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건 분명했다. 누나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손을 보며, 방금까지 머릿속을 채웠던 S랭크니 특수임무니 하는 걱정들이 순식간에 뒤로 밀려나는 걸 느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누나는 대답 없이 전화기만 귀에 붙인 채 서 있었다. 그 표정만으로도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